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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폴 세잔, 바구니가 있는 정물(캔버스에 유채, 65×81㎝, 1888~90)프랑스 오르세 미술관 소장.

나폴레옹 3세는 들끓는 민심에 묘책을 내, 살롱에서 낙방한 그림을 살롱전이 열리는 옆 건물에 따로 전시하게 했다.
 프랑스다운 아이디어로 성난 예술가들을 진정시킨 '낙선전'(Salon des Refuses)이 열린 것은 1863년이다. 살롱전보다 더 많은 이야깃거리를 만들면서 파리지엔 입방아에 단골로 오르내린 작품은 마네의 '풀밭 위에 점심식사'였다.

 살롱전이 온 프랑스 문화예술인에게 관심을 받은 건 아카데미 회원이 되는 유일한 길이였을 뿐만 아니라, 가장 권위 있고 인기 있는 공모전이었기 때문이다.
 아카데미 회원이 된다는 것은 부와 명예를 동시에 획득한다는 말과 같았다. 그만큼 온갖 비리와 부패, 협작과 모략이 넘치는 곳이기도 했지만 말이다.

 낙선전이 열린 이후 프랑스 예술계는 변화를 받아들이는 문화수용력이 커진다. 신고전주의와 낭만주의가 마지막 불꽃을 태우던 기류와, 전혀 다른 10년 뒤에 인상파라고 불리는 신진작가들과, 세기말 현상을 드러내는 미술이 막 드러나기 시작한 때와 일치한다.
 낙선전에는 모네, 피사로, 휘슬러 등 인상파 작품이 대거 들어있었다. 여기에 현대미술 아버지라고 불리는 '폴 세잔'도 끼여 있었다.

 그는 낙선전(당시 세잔은 24살) 이후 인상파 그룹전에 참가하면서 살롱에 도전했지만 번번이 실패하고, 자신만의 예술을 위해 1881년에 엑상프로방스로 내려갔다. 사람들과 접촉을 극단적으로 꺼리고, 움직이지 않는 물체를 좋아하고, 물려받은 유산으로 예술에만 몰두할 수 있었던 그는 괴팍한 예술가였다.
 가끔 세운 모델이 움찔거리기라도 하면 정물이 움직이는 거 봤냐며 노발대발했다.

 평생을 움직이지 않는 산과 과일과 집안에 물건에 매달렸던 그는 세상의 구조와 물체의 근원을 그리려했다. 아름다운 선과 색, 공간의 깊이가 아니라, 왜 사물이 존재하는지, 어떤 형식으로 구성된 것인지 그리려 했다.

 그리고 온전히 세상을 이해하는 방법은 무엇인지에 대한 탐구를 그림그리기로 실천했다. 물체를 그리는 예술이 아니라 우리의 삶과 구조를 탐구하는 철학을 그리려 했던 것이다.
 그가 오렌지와 사과를 그린 작품이 수백점이나 남긴 이유이다. 그는 에로틱한 누드도 없고, 진짜처럼 그린 사과도 없고, 눈앞에 펼쳐진 것처럼 풍경을 그리지 않고도 예술이 찾아야 하는 목적과 의무를 깨닫게 했다.

 그의 뒤를 이은 많은 예술가들과 감상자들에게 예술인식의 지평을 넓혔다. 그림의 한계는 점선면과 하나의 시점밖에 없다는 것이었지만, 세상구조는 그렇게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폴 세잔은 이것을 한 장의 캔버스에 담는 것이 목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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