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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오늘도 강이 보이는 신호등 앞에 차를 세우고, 정면에 서 있는 세 그루 메타세쿼이아를 바라본다. 자를 대고 그린 듯 반듯한 삼각 모양 나무는 때로는 차창 너머로 마그리트의 그림을 보는 듯한 착각에 빠지게도 하고, 때로는 누군가 압화를 완성시켜 허공에 걸어둔 것 같은 느낌이 들게도 한다. 오늘도 나는 이 나무 뒤에 있는 강을 떠올리며 푸른 하늘과 잘 지어진 건축물 같은 나무를 감탄하며 올려다보고 있다.

 삼 사 년 전인가 1월쯤으로 기억된다. 그날도 신호를 기다리다 잎맥만 남은 나뭇잎 같은 투명한 나무 한 그루를 마주보게 되었다. 티 하나 없는 쨍한 겨울 하늘에 실가지까지 투명한 성직자 같은 나무를 발견한 것이다.  몇 년 동안 이 길을 오가면서 한 번도 눈여겨보지 않았던 나무였다. 생각해보니 강변로의 울타리나 강의 배경 정도로만 이해하고 눈여겨보지 않았던 것 같다. 곁에 선 버드나무 대나무 건너편 벚나무도 아는데 왜 나는 저리도 괜찮은 나무를 이제 발견했는지 안타까워했다.

 사실 메타세쿼이아는 큰 정원의 정원수나 가로수로는 몰라도 혼자서는 특별하게 사람 끄는 재주를 가진 나무는 아니다. 특히 태화강변처럼 높은 지대에 서 있는 메타세쿼이아는 방풍 역할로는 최고인지 몰라도, 바로 아래 길에서는 관심을 가지고 올려다보지 않으면 시야에 잘 들어오지도 않는다.
 게다가 겨울을 이기고 나온 매화처럼 향기롭거나 의미를 지닌 나무도 아니고, 벚꽃처럼 천지를 뒤덮는 아름다운 꽃을 피우는 나무도 아니다.

 하지만 이 나무가 매력이 없는 나무라 생각하면 오산이다. 몇 년 동안 눈여겨 봐 온 메타세쿼이아. 우리가 봄꽃에 흠뻑 빠져 목련 개나리 진달래 심지어 라일락까지 보내고 시들해질 무렵쯤, 문득 눈앞에 연둣빛 잎들로 잔잔히 자신을 드러내고 서 있다. 이때의 연둣빛은 하늘에서 내려온 보드레한 융단 같이 눈이 시원해지는 푸른 들판 같다. 여름, 태풍이 와도 요란스레 잎을 흔들거나 소리치지도 않고, 행여 잘려나간 가지가 있다 해도 금방 잎들을 펼쳐 상처를 덮고 그러안는 배려를 보여주는 나무다.

 그런 나무를 보고 있으면 식구 많은 집의 든든한 큰 오빠나 인문학에 조예가 깊은 집안 어른을 보는 것 같다. 그래서 나는 점잖은 이 메타세쿼이아에게 군자나무라는 별명 하나를 헌정하였다.

 변함이 없다고 변화까지 없는 것은 아니다. 다만 야단스럽지 않게 자신을 가꾸며 자신을 키우며 살아가고 있을 뿐이다. 가을엔 다른 나무들이 열매를 내려놓고 단풍든 잎들을 다 지울 때까지 그는 꿈쩍도 않고 서 있다가 주변이 조용해지면, 그때서야 자신의 잎들을 깊은 갈색으로 물들여간다. 이 갈색 잎에 저녁놀이 내리면 그 어떤 나무에게서도 찾을 수 없는 깊고 중후한 분위기가 주위를 휩싼다. 나도 모르게 옷깃을 여미게 되는 순간이다. 찬바람 불고 첫추위에 떨다 문득 바라다보면 어느새 잎을 다 떨어뜨리고 빈 몸의 의연한 나무를 다시 만나게 된다.

 요즘 강변에 줄지어 선 메타세쿼이아를 올려다보면 즐겁다. 신호등 앞의 세 그루 나무에서 출발한 나의 관심은 이제 모든 메타세쿼이아에게로 이어지고 있다. 언제 이 마음이 바뀔지 모르나, 아직은 이 나무가 참 좋다. 사회가 어지럽고, 숱한 말들이 다시 말을 낳는 요즘 이 나무 같은 사람이 있다면 그를 진정한 어른으로 모시고 싶다. 교언영색으로 사람의 마음을 휘어잡는 사람 말고, 조용하고 진중하고 변함없이 길을 열어주는 메타세쿼이아 같은 사람. 그런 사람이 진실로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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