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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의 산
최옥연 수필가
2017년 01월 19일 (목) 17:27:31 울산신문 webmaster@ulsanpress.net
   

겨울비가 내리고 있다. 오늘은 고향 가는 길이다. 아니 아버지의 유택으로 가는 길이다. 고향 길 접어들면 언제나 갯바람이 먼저 반긴다. 매번 오는 고향길인데도 중년이 넘어서면서부터 그 길이 사뭇 다르고 자꾸만 간격의 틈이 생긴다. 바쁘게 움직여야만 하는 현실에서 잠시나마 고향으로의 회유는 성찰이나 휴식의 기회이기도 하다. 평범하게 살고 있는데도 일상에 팽팽히 서서 긴장하고 살았다면 고향 가는 길은 지천에 늘려있는 잡목처럼 마음의 긴장감이 사라지고 편안해진다.

 두루두루 몸 걸쳐두고 사는 일이 많다보면 만나는 사람 또한 많아진다. 나이가 들수록 고향 갈 구실이 점점 줄어든다. 가끔은 급한 볼일로 고향 가까이까지 와서 부모님을 지척에 두고도 무거운 발길로 그냥 되돌아가기 일쑤다. 그러는 사이에 아버지는 홀연히 떠나버렸다. 기다려주지 않는 시간은 못난 자식의 핑계나 명분거리도 되지 못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불효에 대한 일말의 미안함을 일상의 바쁨으로 넘겨 버리곤 한다. 나 또한 그럴진대 누구를 빗대어 말하랴.

 공동묘지 입구에 차를 세우고 내렸다. 군 입대를 앞둔 아들과 함께 당신의 유택으로 간다. 아버지는 몇 명의 손자들 중에서 외손자인 아들이 살갑기도 해서인지 유난히 좋아하셨다. 마음이 먼저 가면 그렇게 어려웠던 일도 아닌데 오늘 이 발길은 좀 미안스럽다. 아들이 받쳐 든 우산 속에서 아버지의 목소리가 빗물에 감겨오는 듯하다. 못난 딸자식 나무라듯 생전의 음성처럼 조용히 늘어진다. 길가에 늘어진 떡갈나무처럼 키가 훌쩍 자란 아들이 성큼성큼 걸어간다.

 지난밤에도 친구들과 밤새 술을 마시고 새벽녘에나 들어왔다. 아들은 입대의 날이 가까이 다가오자 내심 마음이 초조한 듯 평소보다 말수가 줄어들었다. 그러나 여기까지 오면서도 내게는 그 속내를 드러내지 않으려고 무던히 애쓰는 것 같다. 찹찹한 마음을 스스로 다스리려고 노력하는 듯하다. 군인의 길은 이 나라의 건장한 남자라면 누구나 가야되지만 가고 싶지 않은 것이 또한 그 길이 아닐까 싶다. 나 또한 적당한 위로의 말이 없어 먼 바다를 내려다본다. 아들의 스산한 마음을 어찌 모를까.

 걱정하는 어미의 마음을 아는 것인지 앞서 걷던 아이가 되돌아서서 나를 기다리고 있다. 조금 걸었는데도 숨이 차다. 힘들어서 헐떡이는 나에게 평소에 운동 부족이라며 핀잔이다. 아버지는 평생을 버거운 삶을 업보처럼 지고 살았다. 그 버거움 속에는 우리들도 있었다. 그런데도 아버지의 버거운 짐 옆에서 나는 당신을 기다려 본 적이 없는 것 같다. 언젠가는 효도하리라 여겼던 마음들은 지키지 못할 공허한 약속은 짧은 시간에 허망한 공수표가 돼버렸다. 아버지 생전에도 당신은 언제나 그랬다. 어깨를 누르는 힘들고 지칠만한 무거운 짐도 부리고 나서 담배 한 대 피우고 나면 괜찮다고 했다. 그렇게 일상의 짐을 스스로 지고 부리며 살았다. 

 잡목이 우거진 야산을 경작해 밭을 일구는 노동을 당신은 숙명이라 여긴 듯하다. 그 무게를 운명처럼 여기고 부지런히 살았다. 요즘 흔히 말하는 부모의 배경을 두고 금수저, 흙수저니 하며 심지어 가난한 부모를 원망하라는 어처구니없는 말들도 일반화된 지 오래다. 그런 말들도 가족과 떨어져 살아보지 않은 사람들의 넋두리로 생각한다. 부모는 같이 살 수 있으면 더없이 좋겠지만 비록 가까이 있지 못 해도 존재만으로 힘이고 배경이고 희망이 된다. 당신의 손마디마다 군살이 박혀도 별거 아니라고 하던 당신이 여기 누워있다. 편안한지 물어보고 싶다. 산 아래 멀리 굽어보는 바다는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당신과 조석으로 한 몸이 되어 뒹굴던 곳이다. 지나온 회안들을 품속처럼 품어 안은 듯 미소만 동동 띄운다.

 막내의 울음이 저승까지 들린다는 것이 비단 어미의 마음에만 그럴까. 우리네 아버지들은 속내를 드러내고 살지 못했다. 자식을 사랑하는 것도 마음으로 족했다. 아비의 마음도 별반 다르지 않는 듯하다. 내게 아버지는 존재 그 자체만으로도 좋았다. 어둡고 먼 길 저만큼의 어디쯤에 당신이 서 있을 거란 막연한 기대가 힘이 됐다. 외등처럼 지키고 있어서 인생의 빛이었다. 이만큼 부단히 사람 노릇하며 살고 있는 것도 따지고 보면 아버지의 덕이라 생각한다.

 중국의 진시황제는 대 상인이자 투기꾼인 여불위에 의해 만들어진 계획된 황제이다. 그런 유명한 부모가 아니어도 당신은 우리에게 부끄럽지 않은 아비였다. 그런 당신에게 나는 부끄럽지 않은 딸이었는지 물어보고 싶다. 그 물음 말미에 수면위로 떠오르는 말없는 회심의 미소가 예사롭지 않다. 잠시나마 따듯한 당신의 기억을 되새기며 먼 바다를 본다.

 겨울비가 촉촉이 산을 적시고 있다. 생전에 아버지는 가을걷이를 마무리하고 나면 산으로 갔다. 문중산 중턱에서 아름드리 소나무를 베어 만든 장작을 지게 지고와 부엌에 차곡차곡 쟁여 놓고 나면 매서운 추위가 덮치는 겨울도 두렵지 않았다. 아버지는 그랬다. 비록 풍족하게 살지 못하고 더러는 온 식구가 같이 살 부비며 산 적이 없어도 잠깐의 따뜻한 시간들이 긴 신간 소원했던 것들도 다 치유되기에 충분했다.

 생전에도 늘 조용조용히 말하던 당신이라 별달리 살갑지 않았으니 그때의 모습으로 조용히 내리는 비를 보듬어 안는다. 저 먼 다도의 올망졸망 낮은 섬들이 아버지의 이웃같이 가깝게 다가온다. 외롭지만 않을 것 같은 당신의 유택을 뒤로하고 다시 아들과 일상으로 길을 튼다. 또 오겠다는 내 약속의 의미를 아는지 그냥 따뜻한 미소로만 지켜보는 듯하다.

 때도 없이 찾아드는 것이 그리움이다. 그 애틋함도 조금은 남겨두고 돌아선다. 비를 맞은 옷이 축축하다. 가까운 날을 기약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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