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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 반구대암각화                                                                                                                                  

김진영

오늘의 뉴스
첫 눈이 내린 새벽, 반구대암각화 초입에 한 사내가 동사했다. 차림은 남루했지만 머릿결이 가지런한 사내의 주검은 예사롭지 않았다. 출동한 과학수사 차량 위에 눈발이 차곡차곡 포개질 무렵 사내의 주민등록증이 확인됐다. 강중석. 46세. 울산시 울주군 언양읍 대곡리. 한실마을 이장이 시무룩한 표정으로 사내를 덮은 천을 걷었다. 힐끗 쳐다보는 이장의 눈빛에 설핏 섬광이 튀었다. 조회 없이 무보증 최고 3,000만 원까지 대출됩니다. 1분에 OK. 1988-1788 상담원 한가희를 찾아주세요. 죽은 사내의 뒷주머니에서 젊은 여자가 웃고 있다. 묻지도 따지지도 않습니다. 전화만 주시면 1분 안에 당신의 통장으로 입금됩니다.
귀신고래 한 마리.
사내의 겨울은 혹독했다. 한실마을 무너진 폐가에 웅크리고 살던 사내는 겨울과 함께 텐트를 쳤다. 반쯤 수면 위로 드러난 반구대암각화 초입에 스스로 집을 지은 사내는 가을 내내 웅크린 채 그린 귀신고래 한 마리를 걸개로 걸고 바위 표면 고래와 마주했다. 동안거의 시작처럼 가부좌를 튼 그의 정강이가 푸석한 퇴적암으로 힘없이 말라갈 무렵, 기자들과 카메라가 사내의 얼굴을 무차별적으로 탁본했다. 한번은 어느 방송에서 한 시간짜리 특집방송을 한다며 사내의 폐가를 뒤지기도 했다. (자맥질을 반복하는 반구대암각화를 물에서 건져내야 한다며 한 울산시민이 무기한 단식농성에 들어갔습니다. 더 이상 정부와 지자체의 기형적인 보존안을 두고 볼 수 없다는 시민의 용기가 전국민의 관심과 공분을 불러오고 있습니다.) 사실일까. 관심과 공분은 고사하고 귀신고래 걸개그림은 영하의 날씨에 딱딱하게 굳어가고 있었다.
퇴근길에 만난 비
오후면 그칠 것이라는 눈발이 어두워질 때쯤 싸락눈과 빗발로 돌변했다. 가끔 훌쩍이듯 바람이 불고 불쾌한 흔적을 남긴 첫눈이 낮은 포복을 하는 퇴근길, 신복로터리 주변은 두통처럼 체증이 목을 조아왔다. 넥타이 끈을 슬며시 풀고 사이드 브레이크를 당기자 태화강 떼 까마귀 한 무더기 연무처럼 대숲을 하강한다. 1598-7942 사랑을 나누세요. 뜨거울수록 좋은 붉은 입술이 회색 벽면에서 비를 맞고 있다. 여전히 도로는 자동차 뒤태만 달아오른 채 기다란 욕정을 내뿜으며 하각하각 음탕한 소리를 흡입하고 있다. 휘발성 냄새가 웅크린 눈 싸라기를 쫓아가며 할딱거리듯 애무하는 동안 빨간불은 불쑥, 황금빛 점멸등으로 요란하게 깜박거렸다.
 
● 김진영- 1963년 부산에서 태어나 중앙대대학원 국어국문학과를 나와 경상일보, 국제신문 등 언론사 기자 생활을 거쳐 지난 2007년부터 울산신문 편집국장 겸 편집이사로 일하고 있다.
 

▲ 최종두 시인

"감정이 우러나오는 근원이 깊지 못하면 좋은 시를 쓸 수 없다" 박목월 시인이 늘 강조하며 일러주시던 말이다. 이 말을 새기면서 김진영 시인의 시를 대하면 새삼 그 말의 의미를 깨닫게 된다. 김진영 시인은 울산신문의 편집이사 겸 편집국장이다.
 그가 인생의 후배로 내가 걸어온 언론의 길을 걸으면서 침착하게 서두름 없이 결코 섣불리 앞에 나서지 않으면서 차분한 품성으로 언행일체를 겸손하게 속으로만 감정을 삭혀버리는 것이 바로 감정의 깊이를 두껍게 하고 모범된 삶을 살고 있는 모습을 보이게 되는 것이 아닐까? 또한 그것이 그로 하여금 익을 대로 익은 시를 쓰게 하는 요인이 되고 있음을 느끼게 하고 있는 것이다.
 시평(詩評)을 하면서 칭찬에 인색한 원로시인 황금찬 선생이 벌써 서슴없이 인정해주셨다. 그래서 나의 이야기를 적기보다는 그 시평의 요지를 옮겨놓는 게 좋을 것 같다.
 김진영의 시를 읽으면서 한국문학사에 변화의 바람을 일으킨 이 상 시인을 떠올릴 정도로 시를 받치는 은유적 비유나 상징에 새로운 감성이 돋보인다. 그런 변화가 시 전체에 투영되어 신선하고 충격적인 감성이 강하게 분출되는 현상으로 독자를 다가오게 한다. 시작(詩作)을 멈추지 않는다면 한국문학사에 남는 시인이 될 것으로 보인다. 나는 이 시평이 김진영 시인에게 주어진 영광스런 상이라 여기고 울산문단의 경사로 생각되어서 가슴이 울렁거렸음을 밝혀둔다. 최종두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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