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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련나무 아래 서서
심수향 시인
2017년 03월 23일 (목) 19:43:04 울산신문 webmaster@ulsanpress.net
   

막 벙글고 있는 목련꽃 아래 서서 보얀 속살을 밀어내려 팔락거리는 목련 송이와 눈을 맞추고 있다. 회색 솜털 껍질을 벗어내려는 목련송이들의 긴장과 설렘이 손에 잡힐 듯하다. 다행히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푸르고 햇살은 눈부시다. 

 겨우내 북쪽을 바라보고 있던 목련송이들이 목적지에 거의 다다른 것처럼 한껏 부풀고 있다. 들여다보고 있는 사이 알뜰한 비밀을 풀어내듯 목련 한 송이가 꽃을 밀어내려하고 있다. 내 손에 힘이 들어가는 걸 느낀다. 이제 텅 비어 있는 저 허공에 꽃등을 내걸듯 한 송이 한 송이 아리도록 하얀 꽃을 피워 매달 것이다.

 경탄의 눈으로 몇 컷 사진기에 옮겨 놓으면, 설렘이 일고 그 설렘 곁에 아버지가 빙그레 와 서고, 저만치 부신 눈을 찡그린 어머니가 웃고 있다. 해마다 떠올리는 이 한 장의 풍경은 지극히 따뜻하다. 이 풍경은 늘 나의 봄을 활짝 열어젖히는 커튼 역할을 한다.

 내가 고등학교 다닐 즈음 집 뒤를 감싼 대숲이 꽃을 피웠다. 대 꽃이 피면 집안에 우환이 있을 것이란 이야기도 들렸고, 그래서인지 아버지는 대를 거두어내고 그 자리에 목련이며 배롱나무며 장미를 울타리처럼 심었다. 그 중 가장 먼저 꽃을 피운 것이 백목련이었다. 집 주변에 배꽃 사과꽃 지천으로 피었지만 그것은 어른들에겐 생업을 위한 꽃이었으니 꽃일 수는 없었을 것이고, 오로지 꽃만 보기 위해 심은 나무에서 핀 첫 꽃이었다. 당시엔 흔치 않았던 하얀 조가비 같은 낯선 꽃이 피어났으니 모든 식구들이 귀하게 여기고 소중하게 생각했었다.

 목련, 목련에 대한 아련한 기억 한 켠에 영상처럼 돌아가는 지워지지 않는 커다란 자목련 한 그루가 있다. 그것은 종가 사랑채 안뜰 연당과 그 곁에 깊은 그늘을 드리우고 서 있던 자목련이다. 연못에 떠 있던 자색의 어린애 신발 같았던 목련꽃잎은 감히 범접할 수 없는 대상을 훔쳐본 느낌으로 가슴에 비밀스레 떠 있다.

 그것은 사건이라 하기에는 지극히 사소한 일이었다. 대여섯 살쯤이었을까. 작은 댁 큰 종고모는 어린 나를 업고 종가 제사에 다녔다. 그때는 4대 봉제사였으니 제사는 많기도 하였다. 솜씨 좋은 종고모는 안채 부엌에서 음식다림질을 하였고, 나를 행랑채 아이들과 놀게 하고는 가끔씩 변소 걸음에 유과나 엿 같은 것을 들여다 주었다. 그러던 어느 봄날이었나 보다. 숨바꼭질을 하느라 나는 사랑채 방문을 열고 들어가 장방 속에 깊이 숨었다. 술래 아이를 아무리 기다려도 오지 않아 나는 방으로 내려왔다. 방에 나와 있으면 나를 찾으리라는 기대도 잠시 햇살 환한 장지문 위로 스치는 검은 그림자가 하나 둘 늘고, 그 그림자가 끌고 오는 소리가 점 점 크게 들리는 무섬증에  나는 고함을 치며 울었다.

 보얀 앞치마를 두른 재종숙모님 손에 이끌려 밖으로 나와 눈물범벅으로 나를 무섭게 떨게 했던 대상을 마주하였다. 그것은 흐드러지게 핀 커다란 자목련이었다. 천둥처럼 무섬증에 들게 하였던 그 소리는 귀를 기울여도 잘 들리지 않는 꽃잎 지는 소리. 어렸지만 민망했을 것이다. 아기 신발만한 연당 위에 떠 있던 자색 꽃잎과 어룽진 눈물에 비친 날아갈 듯 만개한 신비로운 자목련의 고혹적 아름다움. 이후 자목련은 청상에 홀로 된 재종숙모님의 모습과 겹쳐지는 아픈 꽃으로 내게 얹혀 있다.

 그 사이 꽃 한 송이 점점 더 벙글고 있다. 막 피어나는 소녀 같이 맑아 보인다. 사람들은 꽃을 여자에, 여자를 꽃에 비유하지만 백목련만치 다양한 여자를 보여주는 꽃이 또 있을까 싶다.

 오래 전 퇴근하여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목련꽃이 봉긋 봉긋 피어나는 걸 보았다. 꽃만 보아도 가슴이 두근거리던 시절이었다. 하필 그날 밤 달빛은 휘영청 밝았고, 푸르스름한 목련꽃에서 소복한 재종숙모님의 뒷모습을 보았다. 이튿날 아침 묵도하는 수녀님 모습을 조심스레 돌아보며 출근하였고, 다시 퇴근길에 교복을 벗어던진 생기발랄한 여대생 같은 모습을 만났다. 다음 날 부신 햇살이 한나절 지나고, 익을 대로 익은 여자의 발칙함을 모두 보았다. 단 사흘 사이에 삶의 모습을 모두 보여주던 그날의 목련.

 이후 봄마다 목도하는 목련의 지는 모습은 이미 산전수전을 다 겪어 아무 미련이 없는 늙은 여인의 쇠락함을 여지없이 보여준다. 누가 여기에 미추를 이야기 할 수 있는가. 나는 이미 지려는 꽃, 피어나려는 목련에게서 너무 멀리 왔나보다. 목덜미가 선뜩해진다. 목련나무 아래에서 비켜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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