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쌓이는 세월 위로
최영주 수필가
2017년 05월 11일 (목) 20:26:09 울산신문 webmaster@ulsanpress.net
   

막걸리 다섯 잔이 빙 둘러 놓여졌다. 가운데는 안주로 두부김치와 과자봉지가 펼쳐져 있다. 이제 곧 여든 고개를 넘을 갈색 모자를 쓴 분과 여든 초반의 푸른색 트레이닝복 입은 분, 빨강 셔츠 입은 분과 슈퍼의 주인 할매와 둘러앉았다. 미소가 번진 표정들이 흐뭇해 보인다. 

 울산 외곽의 산 중턱쯤에 전원주택을 마련한 친구의 초대를 받고 차를 몰고 올라가다 시멘트를 바른 시골길 삼거리에서 길을 물었다. 슈퍼라기엔 너무 작은 구멍가게가 삼거리 가운데 지점에 문을 열어놓고 있었다. 가게 앞에 세 노인이 햇살을 받으며 서 있다 자상하게 가르쳐 주었다.

 해가 기웃해져 친구네에서 내려오다 삼거리에 다다르자 오전의 할배 세 분이 또 슈퍼 앞에 있었다. 왜 그랬는지 나도 잘 모르겠다. 순간 차를 세우고 내려, 오늘 길 가리킴을 잘 받았으니 막걸리 한 잔 대접하겠다고 청을 드렸다. 나로선 생전 처음 해보는 일이었다. 그럴 거 없다고, 괜찮다며 사양을 하다가 할배들은 허허 웃으며 슈퍼로 들어섰다.

 막걸리 안주를 과자로만 하기 에는 부족하다 싶어 주인 할매한테 두부김치가 되느냐고 물었는데 트레이닝복 할배가 얼른 일어섰다. 김치를 자기 집에서 가져올 테니 두부 값만 받으라고 슈퍼 할매에게 이르고 가게 문을 나섰다. 말릴 새도 없었다. 할매가 끓는 물에 두부를 데쳐 썰어 접시에 담고 트레이닝복 할배가 가져온 김치를 두부 옆에 놓아 두부김치가 되었다. 트레이닝복 할배 덕분에 만 원짜리 두부김치를 오천 원으로 지불하게 되었다. 막걸리 한 잔 사는 내게 오천 원이라도 덜 쓰게 해주려는 할배의 따뜻한 마음 씀이 짜안하게 전해져온다.

 문득 55년 전의 안쪽 방 할배가 세 분의 할배 옆에 함께 앉아있는 것 같다. 그러고 보면 안쪽 방 할배 생각이 나서 세 분께 술대접을 하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초등학교 6학년이었던 그날의 기억은 잊히지 않고 오롯하다. 안쪽 방 할배가 방문을 열고 수제비를 담은 커다란 양재기를 들이밀며 "야아들아 묵어라" 했다. 밤 10시가 되어가는 시간에 수련장을 풀다 잠이 쏟아져 와 안간힘을 쓰고 있던 나는 구세주를 만난 듯 수제비양재기를 안아들며 잘 먹겠다고 인사를 했다. 

 우리 집 안채엔 멀리 있는 친척들이 오면 묵게 하려고 마루 안쪽에 비워둔 방이 있었다. 1960년대 초반 한국전쟁후 피난민들로 인한 주택 부족현상은 우리 집에도 번져 와서 사람들이 수시로 찾아와 방에 세를 들겠다고 간청을 했다. 늘 남의 딱한 사정에 마음이 약해지는 어머니가 잠만 자겠다고 해서 빌려준 방에 60대 부부가 스물여덟 살 된 아들을 데리고 세를 들었다. 그리고 안쪽 방 어른들이 되었다. 안쪽 방 할매가 집 앞 골목을 내려간 큰길에서 밥집을 하고 있어 집에선 아주 가끔씩 음식을 끓이는 정도였다.

 그 안쪽 방의 할배가 방 앞의 마룻장을 들추고 연탄아궁이에서 수제비를 끓여준 것이었다. 어머니가 지인의 장례식에 가서 드물게 집을 비운 날에 늦은 시간까지 고요히 불이 켜져 있는 우리 방안 풍경을 할배는 알고 있었으리라. 공부를 더 하라는 뜻으로 안방에서 우리 방까지 건너와 반듯하게 앉아 신문을 보고 있는 아버지 옆에서, 엄마도 없이 굳은 심정이 되어있는 동생과 나를 할배는 수제비로 품어주고 싶었던 것 같다.

 그런데 양재기 속의 수제비가 이상했다. 오로지 간장만 들어간 맹물에 수제비가 동동 떠 있었다. 이런 수제비도 있나 싶었다. 멸치육수에 감자, 미역, 호박, 파 등이 보기 좋게 들어가고 얇게 떠진 수제비가 먹음직하게 어우러져 있는 것이 수제비 아니던가. 하지만 두껍고 몽땅몽땅하게 뜬 수제비가 단지 맹물 속에서 간장만 머금었는데도 희한하게 씹을수록 구수한 맛이 배어나왔다. 그 집의 간장 맛이 대단히 좋았던 것 같다. 

 12살짜리 아이도 제 나름으로 세상을 이해하며 살아간다. 할배는 아내와 장성한 아들과 함께 몸을 뉘일 지상의 방 한 칸이 없어, 드나들기에 불편한 남의 집 제일 안쪽에 위치한 방에 사정하다시피 해서 세 들어 살고 있었지만 위축된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 간소한 수제비를 주면서도 눈치 보지 않고 그저 '묵어라'고만 하는 할배가 내 눈엔 담백하고 소탈해서 보기 좋았다. 자신의 살아온 날들을 볕 좋은 빨랫줄에 내어널어 바람을 쏘이듯 말하는 할배가 자만심도 없지만 소심한 면도 없어 내겐 간접경험으로 다가왔다. 나는 그런 할배가 편안하게 느껴졌다.

 이 네 분도 안쪽 방 할배를 닮아 있다. 그로부터 반세기가 넘으며 나라의 경제성장률이 이토록 높아졌지만 그 혜택을 그다지 많이 보며 살아온 것 같진 않다. 보릿고개를 지나며 궁핍하고 힘들게 살아온 지난 세월도 한탄스럽게 표현하지 않는다. '돈이 귀한 시절이어서 누구나 어려웠던 시대'였다고 담담하게 말을 해서 궁상맞지 않고 의연해 보인다. 그래서 듣는 사람의 마음을 쪼들리게 하지 않는다. 소박하기 이를 데 없는 안쪽 방 할배의 수제비 같은 분들이다. 한 시대를 순하게 떠받치고 온 어른들이다. 세상 그득하게 착한 세상이 대물림되고 있는 건 시냇물 밑의 맑은 자갈 같은 이런 분들이 자리하고 있음이다. 자갈이 그곳에 사는 생명체들의 거처가 되어주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안쪽 방 할배가 여기 또 있어 참 많이 반갑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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