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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은 시대를 반영한다.' 이 문장만큼 그림이 가져야 하는 존재목적과 의미를 명확하게 표현한 것은 없다. 영혼 없는 육체로 사는 모습을 온전한 삶이라고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생각만큼 이런 그림을 많이 볼 수는 없다. 시대를 반영해야 한다는 관념을 가진 작가들이 의외로 드물기도 하고, 그것보다 더 중요한 무언가 더 있을 것이라는 믿음 때문이다. 어쩌면 이런 명제는 작품을 해석하고 의미를 전달하면서 생긴 일인지도 모른다. 그러거나 말거나 우리는 나의 안목과 취향에 따라 즐기면 될 것이고, 더 깊은 이해를 원한다면 그에 필요한 방법대로 따르면 될 것이다.

▲ 임창섭
 200여 년 전 프랑스는 혁명의 열기로 온 나라가 뒤덮여 있었다. 외젠 들라크루아는 1830년 가을에 몇 달 전 여름에 있었던 7월 혁명을 그리고 있었다. 그는 부르주아 집안의 아들로 태어나 화가로 성공하려고 결심했다. 그리고 인생 최대의 목표를 프랑스 왕립아카데미 회원이 되는 것으로 세웠다. 태어난 집안 혹은 문화적 환경 때문인지 몰라도 그는 애초부터 혁명이나 사회문제에는 별 관심이 없었다. 그가 살던 19세기 초 프랑스는 혁명의 파도가 수십 년 동안 치던 격랑의 시대였음에 불구하고 문학에 더 관심을 기울였고 그것을 주제로 그린 한 그림이 첫 발표작이기도 했다. 그가 그린 많은 작품들이 격동적인 인간의 감성을 표현한 것들임에도 그것은 대부분 과거의 역사나 문학에서 가져온 테마였다. 그래서 그를 현실에 바탕을 둔 작품을 많이 그리지 않았다는 이유로 낭만주의자라고 평가하고 있다. 물론 다른 이유도 많지만 말이다. 무슨 마음을 먹은 것인지, 들라크루아는 1830년, 프랑스 7월 혁명이 가지는 역사적 의미를 그리기로 하고 가을부터 붓을 들기 시작했던 것이다. 

▲ 외젠 들라크루아,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 캔버스에 유채, 1830, 루브르미술관소장.


 1789년 단두대에서 사라졌던 루이 16세의 동생인 샤를 10세는 1830년 출판자유의 정지, 하원의 해산, 선거자격 제한 등을 포함한 7월 칙령을 발표했다. 그러자 부르주아, 노동자, 청년 등 파리지엔은 바리케이드를 시내에 쌓고 정부군을 상대로 총을 들었다. 3일간의 벌인 전투에서 혁명군이 승리로 끝나 '영광의 3일간'을 역사에 기록하게 된다.  

 자유, 평등, 박애를 상징하는 국기를 왼손에 들고, 오른손에는 총을 든 여성이 시체를 넘어 대중을 이끄는 여성을 중심에 그렸다. 그 왼쪽에는 작가 자신의 모습을 한 부르주아와 노동자, 오른쪽에는 권총을 치켜든 평민의 소년을 그렸다. 바닥에는 검푸르게 변한 시체들이 뒹굴고 있는 장면을 묘사한 이 그림은 1831년 살롱에 출품되자 왕실에서는 당장에 구입했다. 이 불온한 그림을 대중의 눈에 보이지 않게 하기위해서 말이다. 하지만 결국에는 루브르미술관 소장이 되어 지금은 누구나 볼 수 있게 전시되어있다. 혁명을 기린 이 그림 덕택인지는 몰라도 들라크루아는 말년에 그가 목표했던 프랑스 왕립아카데미 회원이 되었다. 살아서 작가로서 큰 명예를 얻었지만, 죽어서는 시대를 고민한 작가로 언급되는 일은 드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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