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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영경 방어진고 교사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고 있는 어느 날 안내 사항이 있어 아침 자습 시간에 교실에 들어가게 됐다.
 중요한 내용이라고 몇 번을 강조하며 목소리를 높이고 있는데 한 남학생이 고개를 푹 숙이고 무언가에 집중하고 있었다. 그냥 지나쳐도 되지만 무엇을 그토록 몰두해서 하고 있는지 궁금했다. 가까이 다가가니 커다란 손으로 윤동주의 '서시'를 붓펜으로 한 구절 한 구절 조심스럽게 써내려가고 있었다. 커다란 손으로 글자를 예쁘게 쓰려고 애쓰는 모습을 보니 나도 모르게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무엇보다 "선생님, 이 구절 너무 좋아요.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 가는 것을 사랑해야지'라는 부분이 제일 좋아서 이렇게 크게 적었어요. 윤동주 시인 정말 멋있는 분 같아요!"라고 말하며 자신이 쓴 손글씨를 나에게 보여주는 모습은 평소의 장난기 가득한 얼굴에서는 찾아볼 수 없었던 모습이라 특별한 장면으로 다가왔었다.

 울산시교육청에서 독서교육의 한 방침으로 "필사(筆寫)적으로 책읽는데이~"를 운영하는데 그 세부 프로그램으로서 각 학급별로 필사책을 친구들과 돌려가며 직접 작성하여 책 1권을 완성하고 있는 것이었다. '필사(筆寫)'란 '손 글씨로 베껴 적다'는 의미로 좋은 글귀를 직접 손글씨로 작성하여 '읽기를 통한 독서의 생활화'를 추진하려는 독서 교육 방안 중의 하나이다.
 사실 몇 년 전만 하더라도 메모지에 필기를 하며 중요한 내용을 기록하려고 했었는데 스마트폰이 일반화되면서부터 중요 내용은 적기보다는 찍어서 보관하는 것으로 대신하고 있다. 많은 정보를 수집할 수 있어 유용하고 편리하긴 하지만 어쩐지 예전만큼 머릿속에 강렬하게 남아 있지는 않는 것 같다. 오죽하면 학생들이 부모님의 휴대폰 번호도 자신의 휴대폰 전화번호부를 검색해서 알려주는 실정이니 학생들이 뭔가를 집중해서 쓰고 있는 장면은 생소할 수밖에 없었다.

 '수기(手記)'로 무언가를 쓰는 것은 귀찮고 불편한 것으로 여겨져 찬밥 취급을 당해오고 있었다. 그런데 글을 직접 필사해보는 것은 몇 가지 유의미한 교육적 의미를 지닌다. 첫째, 책을 읽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쓰는 활동을 병행함으로써 의미를 되새길 수도 있고 기억도 오래갈 확률이 높다. 언어 영역은 듣기, 말하기, 읽기, 쓰기의 여러 가지 영역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단순히 듣고 읽기만 하는 것보다는 언어의 다양한 영역을 함께 사용하면 기억력이 더 오래 간다는 연구 결과가 이를 뒷받침해준다.
 둘째, 지금의 학생들은 필기구보다 컴퓨터가 익숙하다보니 글씨 연습이 어릴 때부터 제대로 되어 있지 않은 경우가 많다. 그래서 간혹 자신이 쓴 글씨를 자신이 못 알아보는 경우도 있다. 이처럼 독서에 '필사(筆寫)'를 활용한다면 글씨 연습도 자연스럽게 될 수 있을 것이다.
 셋째, 정제된 올바른 문장을 베껴 씀으로 인해 정확한 문법 지식을 학습하고, 올바른 말하기 태도를 함양할 수 있다. 문자나 카톡, SNS 등을 주고받는 환경은 잘못된 맞춤법, 과도한 줄임말의 잦은 사용을 유발하였고 이는 말끝을 흐리거나 정확하게 의사를 전달하지 못하는 말하기 습관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독서교육의 하나의 방안으로 시행되고 있는 '필사(筆寫)'는 책 내용을 오래토록 마음속에 새겨 둘 수 있는 방법으로 글씨를 익히고 다양한 언어 영역 능력을 기를 수 있게 한다. 또한 시의 의미와 시인에 대해 굳이 교사가 목소리를 높여 가르치지 않아도 작가의 생각을 나의 머릿속에 내면화하고 나아가 생각을 확장시켜 갈 수 있는 방법 중의 하나이기도 하다.
 새로운 것에 대해 막연한 설레임과 즐거움을 느끼며 필사할 책과 붓펜들을 받아 든 학생들의 모습을 보니 어쩌면 우리 어른들이 직접 손글씨를 쓸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해주지 않은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우리 어른들도 한 번쯤은 디지털 문명 기기에서 벗어나 아날로그적인 감수성을 느껴보면 어떨까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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