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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찍이 20세기 중반, 독일의 철학자 아놀드 겔렌(A. Gehlen)은 '인류의 역사는 끝났다'는 충격적인 선언을 했다. 뜬금없이 왠 '역사의 종말'이란 말인가? 이 이야기는 언뜻 보면 무언가 비현실적이고 현학적인 차원의 논의인 것처럼 보인다. 어떤 사이비 종교 집단의 교리를 말하는 것 같기도 하고 사이언스픽션 영화의 허구적 설정 같기도 하다. 하지만 이 주제는 매우 진지한 메시지를 담고 있다.


 역사의 종말? 과학과 기술과 자본의 연합 속에서 생겨난 자본주의 슈퍼시스템이 세계 모든 사회를 지배하고 있기 때문에, 오로지 과학기술 발전과 경제성장을 통한 윤택한 물질적 삶만이 우리 사회의 유일한 목표가 되었기 때문에, 이제는 더 이상 어떤 새로운 이념도, 어떤 새로운 도덕도, 어떤 새로운 철학도 필요치 않은 상황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이제 모든 이념적 대안은 공허하며 이러한 의미에서 역사는 끝났다는 것이다. 사상사는 종결되었고, 아름다웠던 과거의 정신사적 문화 유산을 정리하는 정도가 인문학자의 역할이라고 말한다.

 

   경영논리에 찌든 사회


 '역사의 종말' 주장은 우리로 하여금 우리의 삶의 현실에 대해 성찰하게끔 한다. 사회를 움직여가는 실제적 힘은 과학기술과 산업자본의 연합시스템이고 정신적·문화적 힘은 실제로는 표피적인 현상에 불과한 것은 아닐까? 우리 삶의 영역 전체에 자본과 행정의 논리가 절대 논리로 관철되면서 우리의 생각과 행동은 이른바 '경영마인드'에 찌들어 있는 것은 아닐까? 효율성과 유용성의 가치만을 애지중지하는 호모 에코노미쿠스(homo economicus)의 형상은 우리가 차가운 계산 기계가 되었음을 보여주는 징표가 아닐까? 우리 시대가 자랑하는 전문가는 심장 전문가, 댐 전문가, 전기 전문가, 주식 전문가, 로봇 전문가는 될 수 있을지 몰라도 대부분의 것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모르는 정신의 불구자는 아닐까?


 우리 시대에 대한 '역사의 종말' 진단은 매우 우울하다. 물론 우리 시대를 단지 종말론적 관점에서만 진단하는 것은 급진적이며 일면적인 해석일 수 있다. 하지만 우리의 시대가 많은 부분에서 걱정스러운 종말론적 현상을 보이고 있음은 분명한 사실이다. 우리의 교육 현실만 보더라도 그렇다. 교육의 방향은 획일화되어 있어 지성적, 도덕적, 정서적, 육체적 요소들이 골고루 조화를 이루는 '전인적' 인간이 아니라 경제·사회 시스템을 잘 돌아가게 하는 '기능인'의 양산에만 관심을 두고 있기 때문이다.

 

   문화적 인간이 되어보자


 그렇다면 이러한 유용성, 효율성, 전문성, 기능성의 가치가 지배적인 사회에서 대안적 삶의 방식에 대한 전망은 아예 불가능한 것인가? 우리가 현대 사회에서 '기능적 인간'으로 존재할 수밖에 없지만 다른 한편으로 '문화적 인간'으로 존재하려고 노력해야만 한다. 문화적 인간이라고 해서 어떤 거창한 것을 말하려는 것은 아니다. 문화의 세계에 관심을 두고 예술과 학문을 취미의 차원에서라도 애호할 수 있는 그런 딜레탕트가 되어보자는 것이다.


 서구 사상사에서 보면 딜레탕트는 부정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토마스 만이 『토니오 크뢰거』를 썼던 20세기 초만 하더라도 딜레탕트는 예술적 감수성이 있는 채 하면서 겉멋만 잔뜩 든 교양 속물 정도로 간주되었다. 예술이나 학문을 끈기 있게 깊이 파고들어 진리를 찾고 예술작품을 창조하기 보다는 그저 어설프게 즐기는 아마추어 예술애호가에 불과했던 것이다.


 물론 학식있는 학자나 창조적인 예술가로 존재하는 것도 좋다. 하지만 우리 모두가 그렇게 될 필요는 없다. 일상 주변을 결코 벗어날 수 없는 우리 자신의 소시민적 삶을 그대로 인정하는 것에서 출발하자. 그 대신에 여기에 매몰되지만 않으면 되는 것이다. 우리는 한편으로 기능적 사회시스템 안에서 열심히 일 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자신의 고유한 문화 세계를 소박하게 만들어가는 딜레탕트가 되자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문학딜레탕트이건, 미술딜레탕트이건, 오페라딜레탕트이건, 사진딜레탕트 아니면 춤 딜레탕트이건 간에 우리는 자신의 문화 세계를 스스로 가꾸고 즐기는 딜레탕트가 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경제적·기능적 인간이 되라고 고집스럽게 강요하는 '역사의 종말' 시대에, 의미있고 풍요로운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딜레탕트가 되어야 한다. 딜레탕트가 많아지면 역사는 다시 새롭게 시작할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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