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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종은 의욕적으로 한글을 창제했다. 이후 한글은 백성을 교화할 목적으로 활용되었다. 즉 언해할 필요가 있는 한문본에 대해서는 국가에서 언해를 했다. 이것은 한문본을 온전히 국어로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기 위해서였다.

 

   개인적인 용도로만 사용


 그렇지만 정작 한글은 국가나 관청에서 언해서가 필요할 때에만 이용되었을 뿐이다. 일반 백성들의 일상 생활 속에서 널리 사용된 것은 아니었다. 물론 민간에서는 한글로 개인적인 편지를 주고받는 일이 있었다. 그러나 한글은 이렇듯 철저하게 개인적인 글에서만 사용될 수 있었다. 그리고 공식 문서 등에 사용되지는 못했다.


 당시의 규정을 살펴보기로 한다. 우선 조선 통치의 기본 법률집인 ≪경국대전≫에는 '용문자식(用文字式)'이라 하여 공문서의 예시가 나온다. 여기에는 한자와 이두로 작성된 문서의 예만을 보여주고 있다. 곧 공문서에서 한글은 사용되지 못했던 것이다. 또한 1675년에 숙종은 사채 문서에 증인과 문서를 작성한 사람이 없고 그 문서가 한글로 되어 있으면 그 채권은 인정하지 말라는 교지를 내렸다. 영조때의 교지에도 그러한 내용의 규정이 보인다. 이러한 사실로 미루어 한글은 당시에 국가에서 인정하는 공식 문서에는 사용될 수 없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교지가 있었다는 사실을 뒤집어 생각해 보면, 그 당시에 한글로 표기된 문서가 존재했음을 알 수 있다. 실제로도 17세기 이후 관아의 공문서 중에는 한글로 기록된 것이 발견되기도 한다. 그러나 국가에서는 이러한 한글 문서를 공식적인 문서로는 인정하지는 않았던 것이다.

 

   고종때 공식문자로 인정


 이러한 사정은 1894년 갑오경장 이후 고종이 칙령을 내리기 이전까지 계속되었다. 고종은 칙령 제1호에서 "종전의 공문과 반포된 예규는 오늘부터 폐지한다."라고 하고 칙령 제14호에서 "법률과 칙령 모두 국문(한글)을 위주로 하고 한문을 번역하여 붙인다. 간혹 국한문을 혼용할 수 있다."라는 내용의 칙령을 내렸다. 비로소 한글은 국가의 공식적인 문자로 인정받은 것이다. 이러한 배경에는 지배층의 한자, 한문의 선호의식이 강하게 작용했음이 틀림없다.

 

   16C 후반 이후 널리보급


 사실 한글이 창제된 이후 일반 백성들에게까지 널리 보급된 것은 16세기 후반 이후의 일로 보인다. 즉 백성에게 한글이 보급된 것은 공문서의 작성 문자로 공인된 것과는 달리 오랜 역사를 지닌다. 1527년에 간행된 최세진의 ≪훈몽자회≫에는 "시골 사람들은 한글을 모르는 이가 많아서, 언문 자모를 실어 한글부터 배우고 ≪훈몽자회≫를 읽게 하면 교육적인 효과가 있을 것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이 증언으로 미루어 이 당시에는 한글이 그리 널리 보급되지는 못했지만 일반 백성들에게까지 파급되었음을 분명히 알 수 있다. 이후 16세기 후반에 들어서 여러 방면의 한글 문헌이 간행되고, 천자문 등의 한자 입문서와 유교 경서의 언해서가 간행되었다. 적어도 이 당시에는 한글이 그 전에 비해 널리 보급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또한 이 시기에 한글 가사 문학과 한글 소설 문학이 발전했다. 한글의 사용 영역이 확대되었고, 한글 편지 등 여성에 의한 한글 사용이 보편화되었다. 이를 통해서도 16세기 후반부터는 한글이 상당히 보급되었고 이후 계속 한글의 사용과 보급이 확대되었을 것임을 알 수 있다. 오늘날 우리가 공기처럼 편하게 향유하는 '명품문자 한글'은 이렇게 긴 세월을 두고 역사 아니 정확히는 세계문자사에서 주인공으로 우뚝 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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