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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1독립운동은 일제가 우리나라를 강점한지 9년 뒤인 1919년 3월 1일에 일어난 우리 한민족의 일대 독립시위 운동이다.
 일제의 가혹한 무단정치와 농민들의 경제적 착취 그리고 고종황제의 서거가 일본인에 의한 독살이라는 말이 널리 퍼지게 됨으로서, 한민족의 감정이 극도로 자극되어 마침내 구국의 항일 독립운동으로 폭발했던 것이다.
 그리고 3·1운동의 또 하나의 기폭제는 일본에 유학중인 동경유학생 600명이 1919년2월 8일 동경의 조선기독교청년회관에서 대한 청년독립단 대표 명의로 독립선언서를 발표하였다. 그 뒤 학생 대표들이 본국에 건너와 독립선언의 경과와 독립운동에 대한 계획을 알림으로서 국내의 독립 운동가들에게 큰 자극을 주게 된 것이다.
 그 동안 수차에 걸쳐 이종일이 대대적인 시위운동 계획을 세우고 실천에 옮기려했으나, 손병희의 만류에 따라 불발에 그치고 말았지만, 이번에 동경 유학생들 영향도 받았으므로 마침내 1919년 3월 1일을 거사일로 정하고 민족대표들이 태화관에 모여 독립선언문을 낭독하고 독립을 선언함으로서 이것이 계기가 되어 종로 거리에서 많은 학생·신사·상인·노동자·농민·남녀노소 등 수십만의 군중이 모여 질서 정연하게 태극기를 들고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시위에 들어가니, 이것이 바로 3·1독립운동의 시위였던 것이다.
 이렇게 모인 수십만의 군중들은 지도자의 말에 따라 우선 4개 대열로 나누어, 보다 유연한 자세로 시위에 들어가기로 다짐했다.
 일대는 종로통을 지나 덕수궁의 대한문 앞에서 독립만세를 부르며 대한문 안으로 들어가 빈전을 향해 배례하고 나와, 다시 대한문 광장에서 독립만세를 드높이 불렀다. 또 일대는 광교를 지나 경성우체국 앞에서 독립만세를 부르며 서대문 정거장 앞의 광장을 거쳐 의주 거리로 접어들어 불란서 영사관으로 향하였다. 또 일대는 창덕궁 앞으로 나가서 궁문으로 향하다 진로를 바꾸어 대한문 앞으로 행진하였다. 그리고 다른 일대는 미국 영사관 앞을 지나는데, 선두에 있는 어느 여학생의 '대한독립'이란 4자로 된 혈서의 깃발을 보고 미국 영사가 문을 열고 나와 환영하며 독립의지를 고무해 주는 아름다운 광경도 있었다.
 이때 시위대는 독립선언의 취지를 설명해 주고 각 국 영사관 앞을 지나 다시 종로 광장에 이르러, 이미 이곳에 와있던 다른 일대와 합세하여 대 강연회를 실시하였다. 이 같은 한민족의 질서정연하고 위세 당당한 시위 행렬을 지켜본 외국인들은 독립국가의 자격이 있음을 새롭게 재인식하고 아울러 문화민족의 긍지에 놀랐다고 한다.
 이 시위운동은 전국 방방곡곡에 확대되어 드디어 200여만 명이 참가하는 세계 독립운동사상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평화적이고도 무저항적인 3·1독립운동의 일대 시위였으나, 잔인무도한 일경에 의해 7,500여명이 무참히 살해되었고, 또 부상자 16,000여명에, 체포된 사람이 무려 47,000여명에 이르렀다.
 이처럼 3·1운동은 많은 사람들의 피를 보게 했으며 또 그만큼의 성과 또한 있었다.
 3·1운동을 계기로 상해에는 임시정부가 수립되었으며, 일본의 무단통치가 문화통치로 바뀌었으며 중국의 5·4운동이나 인도의 수와라지 운동과 같은 제국주의를 반대하는 민족주의 운동들이 일어나게 되었으며, 무장독립운동, 농민운동, 노동운동과 같은 조직적 시위의 계기가 되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독립의 기약과 전 민족이 일치단결의 정신적 기반이 되었다는 것과 민족의 주체성 확립과 민족의 저력을 과시할 수 있었다는 점이다.
 지금의 한반도 상황 역시 그때와 크게 다르지 않다. 물론 지금의 우리는 다른 나라의 지배를 받고 있진 않지만 한반도에 두개의 정부가 있는 실정이다. 그리고 주변의 강대국들 역시 호시탐탐 우리의 경제와 문화를 침략하고 계속적으로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려 한다.
 한반도에서 반만년을 이어온 우리 선조들의 지혜와 용기를 바탕으로 우리 역시 우리 앞에 닥쳐온 문제들을 처리할 수 있으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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