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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권을 상실한 민족에게 나라 잃은 설움보다 더 가슴 아픈 일은 무자비한 문화재 약탈이다.
 1930년 일본에서 대학을 졸업한 간송 전형필(澗松 全鎣弼 : 1906~1962)은 조선으로 돌아온 후 무엇을 해야할지를 몰라 가업인 선친의 미곡상회 일을 도우면서 때를 기다렸다. 오래지 않아서 그 기회는 찾아왔다. 스승인 춘곡 고희동의 소개로 위창 오세창 선생을 만남으로써 간송은 빼앗긴 나라에서 무엇을 해야 할지를 어렴풋하게 생각하게 된다. 그는 나라는 빼앗겨도 정신문화마저 도난당할 수 없다는 굳은 신념으로 인생의 대로(大路)를 걷게 된다.
 그것은 전재산을 미련없이 바쳐 얻어낸 값진 우리 조상들의 문화유산이다.


 또한 한민족 말과 글을 위해 말살시키려는 간악한 일인들과 맞서 의연하게 우리글과 우리말을 지키려고 교육사업에도 아낌없이 재산을 투자했다.
 그의 일생에 가장 큰 일이었던 것은 국보급 문화재를 개비스란 영국인 수집가가 루부르박물관으로 반출하려던 것을 거액을 건네고 20여점을 일본에서 되돌려 가져온 것으로 당시로써는 전 세계에서도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 당시 경성의 기와집 8칸짜리 한 채값이 1,000원이 었으니, 400채 값을 치룬 거금이다. 굳이 현시세로 계산해보면 1,200억원인데, 공주에 있던 논 1만 마지기를 팔아서 구입한 고려청자 명품들이다.


 이 같이 전형필은 국권을 빼앗긴 조국에서 조상들의 정신문화를 지키려 했던 위대한 선구자이다. 그는 많은 귀중품들이 국보, 보물로 지정되는 것을 보지 못하고 1962년 57세로 세상을 떠났다.
 그가 이룩한 간송미술관에 있는 수 많은 명품 가운데 돈으로 계산할 수 없이 가장 값진 것은 '훈민정음 해례본' 원본이다. 그가 모은 문화유산은 국보 12점, 보물 10점, 서울시 지정문화제 4점이며, 이 외에도 수 많은 도자기, 불상, 석조물, 서적들이 있다.
 지난 2006년 가을, 간송 탄생 100주년을 기념하는 전시회가 열리면서 한 사람이 남기고 간 업적이 위대하게 재조명되고 있어 실로 마음이 흐뭇했다.


 이것이 어찌 남의 일이랴. 울산에도 간송처럼 많은 돈을 투자하지는 않았지만, 경주 출신으로 일찍이 울산 중구에 자리 잡은 목호 김종수 선생은 자신이 구상해지은 3층 건물에 20여년전 목호 미술관을 개관했다.
 벌써 이십여년째, 수많은 신인, 중견인들의 작품을 전시하여 문화예술계는 물론 일반 시민들에게 까지 그림에 대한 안복(眼福)을 누리게 해 주었다.
 올해로 미국에 간지 10여년, 일년에도 수 차례씩 오가며 새로운 문화거리 조성과 앞서가는 선진문화를 접목시키려고 부단히 애쓰는 모습을 볼 때 마다 울산의 간송으로 존경스럽기만 하다. 또한 불과 10M정도 떨어진 곳에 이사해 문을 연 취산방이란 갤러리가 있다. 부산 수영 태생인 강정길(67)선생은 울산에 자리 잡은지 30여년. 우연찮게 미술계에 입문해 그림, 전각, 골동을 수집하면서 울산시민들에게 우리 문화와 외래 문화를 맛깔스럽게 선보이고 있다.


 울산 중구 성남동과 옥교동을 비롯한 인접한 거리는 다시 울산문화 예술이 되살아나는 산실이다. 문학이 그렇고, 미술, 음악, 인쇄, 서예(필방, 표구)가 그렇다.
 이 모든 문화예술의 출발점이 이곳이 었으니 한 시기를 거쳐 마치 하회의 강물이 휘돌아 오듯, 다시 중구로 모여들어 울산 문화와 예술을 꽃피워가야한다.
 이제 울산문화예술을 꽃 피우는 중구 문화포럼 모임에는 튼튼한 뱃사공 춘천 김용언 회장과 열정적인 회원들이 있기에 더욱 마음이 든든해 진다. 머지않아 다시 중구문화는, 아니 울산문화는 화려하게 갤러리에서부터 꽃피리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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