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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량으로 번잡한 울산시청 앞 거리는 401년전 한양 숭례문에서 출발한 통신사 대열이 울산을 거쳐 부산포로 향하던 조선통신사의 길로 현재는 지난해 파견 400년을 맞아 세워진 표지석만이 당시의 역사와 흔적을 말해주고 있다.                       유은경기자 usyek@ulsanpress.net

 "1607년 조선통신사가 국서를 받들고 지났던 길입니다 조선통신사의 일본왕래 400주년을 기리고 선린우호 정신을 다짐하며 여기 이정표를 세웁니다"
 차량으로 번잡한 시청 앞 거리는 401년전 한양 숭례문에서 출발한 통신사 대열이 울산을 거쳐 부산포로 향하던 길이다. 정확히 서울에서 460km, 부산에서 54km 위치한 지점이다.   


 이제는 시청앞 네거리 한켠에 파견 400년을 맞은 지난해 세워진 이 표지석만이 당시의 역사와 흔적을 말해준다.
 가로·세로 각각 50㎝, 높이 120㎝ 크기의 이 표지석은 조선통신사 옛길 중 영남대로 구간 12곳에 세워진 것들 가운데 하나. 서울 숭례문 앞, 서울 양재동, 용인, 충주, 문경, 안동, 의성, 영천, 경주, 울산, 웅상, 부산에 세워져 있다.
 조선통신사는 일본과 조선의 정치적 이익이 맞아떨어진 결과로 파견된 사절단이었다. 그러나 통신사는 일본에 파견되어 정치적인 면뿐 아니라 문화적인 면에서 큰 파장을 가져다주었다. 조선통신사가 방문하는 일본 지역은 문화 수혜지로서 크나큰 변화와 발전을 겪을 수 있었던 것이다.


 조선 후기 1607년 일본 막부의 요청에 의해 통신사가 파견되었다. 통신(通信)이란 신의를 교환한다는 뜻으로, 통신사는 조선 국왕이 일본 막부장군에게 파견했던 조선 국왕의 공식적 외교사절이었다.


 이들은 국서(國書)와 일본 가속에 줄 예단의 품목인 별폭(別幅)을 지참하고 한양을 출발하여 부산(동래부)까지는 육로로 간 뒤 쓰시마(對馬)를 경유, 쓰시마 번주의 안내로 해로를 이용, 시모노세키(下關)를 통과하여 일본 각 번의 향응을 받으며 오사카(大阪)의 요도우라(淀浦)에 상륙했다. 그 뒤 육로로 교토(京都)를 거쳐 일본의 에도(지금의 도쿄)까지 왕복했는데, 이들의 왕래 일정은 다소의 차이가 있기는 하나 대개 6개월~1년이 소요되었다.


 그 규모는 조선 국왕의 국서를 가진 3인(정사, 부사, 종사관)을 포함하여 조선의 최고 관료, 학자, 예술인, 악대, 무인(경호원), 통역관 등 300~500명에 이르렀으며, 일본 막부도 막대한 비용을 들여 통신사를 접대했다. 이 시기는 한일 간의 전쟁이 없었던 평화의 시대로, 통신사는 평화와 선린우호를 위한 국가사절로서 선진문물을 전파함과 동시에 한일 문화교류에 큰 역할을 했다.
 401년 전 두 나라 사이의 물리적 거리보다 더 먼 심리적 거리를 걸었을 조선통신사는 어떤 심정이었을까.
 조선통신사 파견 401돌을 맞은 지금. 기념비 외에는 아무런 흔적도 남아있지 않지만, 이 길만은 지금도 당시 통신사 대열의 발자국이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김미영기자 myidaho@ulsanpress.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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