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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초등학교 선생님이 학생들에게 "여러분은 남을 배려하는 마음을 갖고 있어요?"하고 물었더니, 한 학생이 큰 목소리로 "없어요, 선생님!"하고 자랑스럽게 대답하더란다. 그래서 선생님이 왜 배려하는 마음이 없는지 물어보았더니, 그 아이의 대답인 즉, "남을 베려하면, 겁이 나서 싫어하잖아요?"라고 하더란다. 이 어린이는 비록 배려의 뜻은 몰랐지만, 남이 당할 아픔과 공포를 생각하고 배려할 줄 아는 착한 어린이였던가 보다.
 배려란 우리말 사전에는 "보살펴주려고 이리저리 마음을 써주는 것"이라고 정의되어 있는데, 한자로 풀이해보면 '아내 배(配)', '생각할 려(慮)'를 쓴다. 즉, '아내가 남편에게 하듯이 자상하게 보살피는 것'처럼 사랑으로 상대방을 생각하는 마음을 말한다.
 산업화와 도시화의 진척에 따라 전통부락이 와해되고, 이웃과 이웃이 남남으로 살아가는 익명성(匿名性)의 사회 속에서, 인간의 정서는 점점 삭막해져가고, 비인간화 현상이 나날이 심각해져가고 있다. 그래서 이웃사촌이란 말이 옛말이 된지 오래다. 사람과 사람이 살갑게 비비대며 살아가는 인정이 메말라가고, 무한 경쟁의 정글과 같이 서로가 경쟁자로 여기며 살아가게 되었다.
 또한 사람의 존재 이유가 소유와 권력, 또는 쾌락에 있는 것처럼 착각하며 살아간다. 쾌락이나 소유는 우리에게 순간적인 기쁨을 안겨줄 뿐, 진정한 삶의 의미를 채워 줄 수는 없음에도 불구하고, 일차원적인 본능에 우리의 삶을 맡기고 살아간다. 쾌락주의 원칙에 따라 살아가는 일에는 양심이나 사회적 체면으로부터 자유로운 하등동물들이 사람보다 유리하다. 본능대로 살아가는 동물과 달리, 사람은 양심과 도덕률이 정신을 지배하고 있어서 쾌락원칙만 따르기에는 갈등을 느낄 수밖에 없다.
 인간다운 삶이란 금욕적일 것까지는 없지만, 사회질서유지를 위해 상대방에 대한 배려와 절제가 선행되어야 할 것이다. 참으로 강한 사람은 자기 자신에 대한 통찰력과 자중감을 가진 사람인 동시에, 자기를 존중하듯이 남을 존중하고 배려할 줄 아는 사람이라고 말하고 싶다.
 정글 속의 맹수들은 적자생존(適者生存)의 법칙에 따라 강한 자 만이 살아남고 약자는 강자의 먹이에 불과하지만, 사람은 보다 고차원적인 의미를 추구하며 살아가는 존재이다.
 맹수가 오래 살지 못하는 것처럼 권력을 탐하는 사람이 길게 영화를 누리지 못한다. 역사를 더듬어 보더라도 부패하고 타락한 문명이 오래 유지된 것을 본 적이 없다.
 재물을 위해 양심을 팔고, 권력을 위해 신의도 저버리는 삶이 아니라 진리에 순응하며 상대방을 배려하는 마음속에 미래의 희망은 싹트고, 우리 사회가 지속가능한 사회로 바뀌지 않을까?
 "개처럼 벌어서 정승처럼 쓰라는 말이 있지만, 쓸 때도 정승처럼 쓰고 벌 때도 정승처럼 벌어야 한다. 왜냐하면, 인생에 있어서 결과도 중요하지만 과정도 중요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 시대의 참된 정승을 기억해야 한다. 자기 재산의 대부분을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 쓰도록 내어 놓은 빌 게이츠와 워렌 버핏 말이다.
 우리는 재물과 권력을 위해 사람을 도구로 이용하고 억압할 것이 아니라, 21세기의 정승들처럼, 재물과 권력을 도구로 하여 갖지 못한 사람들에게 베풀고, 약한 사람들을 섬기는 일에 써야할 것이다.
 약한 사람에 대한 배려와 가지지 못한 사람들을 위한 나눔이 있는 곳에 참된 평화가 싹트고, 미래에 대한 밝은 희망이 자라날 것이다.
 우리 사회가 끝없는 탐욕과 이기심으로 인해 회복할 수 없는 지경에 빠지기 전에, 남을 위해 이리 저리 마음을 써주는 배려가 좀 더 편만해졌으면 하는 마음 간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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