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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산에 체육회가 만들어진 것은 1946년 4월이었다. 1945년 8월 15일 광복이 된 이후에도 울산은 별다른 체육조직이 없이 동호인을 중심으로 체육활동이 펼쳐졌다. 그러나 체계적인 활동에 어려움이 뒤따르자 46년에 들어서면서 장성식씨와 김정제, 박현호, 이문조씨 등이 주축이 된 동호인들이 민간주도의 울산체육회를 만들었다.

 초대회장에는 당시 울산읍장이던 박정우씨를 추대하고, 부회장에는 장성식, 최신출씨를 선임했다. 또 고태진, 박현호, 박영출, 정인걸, 송영석씨 등 20여명을 임원으로 뽑았다. 광복이 된지 8개월만에 울산체육회가 탄생함으로서 비로소 체육인구의 저변확대와 지역체육 진흥의 새로운 전기를 마련했다.
 민간주도의 울산체육회가 만들어진 1946년 4월 당시의 울산군 인구는 15만명, 울산읍 인구는 2만명을 겨우 넘어섰지만, 체육에 대한 일반의 관심은 점차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그러나 공공체육시설은 물론 사설체육시설도 한 곳도 없어 체육활동에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지금의 남구 삼산동에 있던 구 울산비행장 활주로와 구 철도관사 빈터 등지에서 축구와 정구경기가 열렸다.
 때문에 공설운동장 마련이 숙원이었다. 체육회 회장단과 임원들의 헌신적인 노력으로 1946년 11월 지금의 중구 복산동에 있던 구 울산제일중학교 뒤편의 경남도 소유부지 3천여평을 확보했다. 하지만 면적이 적어 부회장인 최신출씨가 자신의 토지를 내놓아 공사에 들어갈 수 있었다. 마침내 다음해인 1947년 10월에 연면적 3747평의 울산공설운동장이 준공됐다. 울산체육회는 준공기념으로 울산군내 초등학교가 참가하는 남선축구대회를 개최했다.

 울산체육회는 창립 이후 15년간 민간주도로 활동해오다가 61년 5·16군사혁명으로 활동이 일시정지됐다. 2개월만에 정지상태가 풀렸으나 정부의 운영개선책에 따라 민간주도에서 관 주도로 바뀐다. 그에 따라 울산체육회도 자동적으로 울산군으로부터 감독을 받게 됐다.

 울산체육도 울산이 공업센터로 지정됨과 함께 비약적인 발전을 이뤘다. 1962년 6월 1일 울산이 울산시와 울주군으로 분리되면서 체육회도 자동적으로 나뉘었다. 울산시와 울주군으로 분리되기 직전인 62년 5월 20일에 부산 구덕운동장에서 치러진 제1회 경남도 체육대회에 울산은 육상과 야구, 배구, 궁도, 씨름 등 6개 종목에 선수 32명과 임원 21명이 참가해 종합우승을 차지했다. 당시에 부산도 경남도 아래에 있었으며, 구청별로 출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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