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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에 들어서면서 울산에는 뚜렷한 인물은 나타나지 않지만, 나름대로 지역사림(士林)을 만들어 나갔다. 16세기 말의 임란 때에 유림을 중심으로 많은 의병장이 나왔다. 후기에 들어 다른 지역에서 옮겨온 인물과 함께 사족층이 더욱 늘어났다. 생원, 진사시와 문과 급제자도 배출됐다.
 울산에서 진사시에 뽑힌 최초의 인물은 언양 출신 김신숙(金信叔). 중종 23년(1528년)에 진사시에 뽑힌 그의 행적은 알려지지 않고 있다. 후기에 접어 들어 학성이씨 시조 이예(李藝)의 후손 이동영(李東英)과 영천에서 울산에 옮겨온 그의 동문 친구 박창우(朴昌宇)가 현종 7년(1666년)에 생원시에 함께 뽑혔다. 김방한(金邦翰)이 숙종 4년(1678년), 박창우의 아들 박세도가 숙종 9년(1683년)에 생원시에 합격했다.
 박창우는 영천 출신으로 우리 나라 시조문학의 큰 봉우리 노계(蘆溪) 박인로(朴仁老)의 후손으로, 현종 5년(1664년)에 이동영의 경제적인 도움을 받아 울산 송정동에 옮겨왔다. 이동영과 박창우는 미수 허목(許穆, 1595-1682)의 문하생. 이동영은 이휴정문집(李休亭文集), 박창우는 괴천집(槐泉集)이란 문집을 남겼다.
 숙종 22년(1696년)에 이문구가 생원시에 합격하는 등 고종 때까지 울산과 언양에서 12명이 생원시에 뽑혔다. 김신숙이 진사시에 합격한 뒤 영조 때 유학중(柳學中)과 이준민(李俊民), 서석린(徐錫麟)이 진사시에 합격하는 등 고종 때까지 울산과 언양에 걸쳐 13명이 진사시에 뽑혔다.
 드디어 문과 급제자가 나왔다. 정조 13년(1786년)에 진사시에 합격한 이근오(李覲吾)가 다음해 정조 14년(1787년)에 문과에 뽑혔다. 승문원 부정자를 시작으로 성균관 박사와 병조정랑 등의 벼슬을 지냈다. 낙향한 뒤에 양사재(養士齋)를 세워 후학의 교육에 힘썼다. 죽오집(竹塢集)이란 문집을 남겼다. 특기할만한 인물로 영조에서부터 순조 연간의 이양오(李養吾)가 있다. 그는 생원이나 진사시에도 뽑히지 못했지만, 울산에서는 이름난 학자였다. 울산에서 처음으로 문과에 뽑힌 집안 동생 이근오는 실제로는 그의 제자였다고 한다. 그는 당시의 세태를 고발하는 세평시(世評詩) 20수를 남겼다. 학문의 타락상과 조세제도의 문란, 당쟁의 폐단, 관리의 부패상, 향교와 서원의 폐단 등을 고발했다.
 조선 후기에 들어서면서 활발한 활동을 펼친 울산과 언양의 유림은 이후 울산의 구강서원과 언양의 반고서원을 건립하게 된다. 구강서원은 나중에 사액서원으로 승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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