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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는 나라안에 어지러운 비운이 겹친 한 해였다. 봄에는 백령도 부근에서 일어난 천안함 폭침사건으로, 가을에는 연평도 포격사건으로 어지럽고 불안했다. 지금도 언제 다시 제3의 북한 공격이 있을지 몹시 초조로함이 가시지 않은 상태다.

 지난번 천안암 사태 때는 곧 전쟁이 일어날 것 같이 일촉즉발의 위기상황에서 더 불안하고 초조로웠던 사람은 민간인들이 아닌 군인들이었다고 전해 들었다. 전방부대에 배속된 어느 병사는 집에 있는 어머니 에게 전화를 걸어서 "엄마 무서워, 전쟁이 난데, 불안해 죽겠어"라고 말했다는데 후방에 있는 어머니가 어쩌란 말인가? 나라를 지키고 국민들을 안심시키기 위해 군대에 간 아들이 겁난다고 총칼을 들고 전쟁터로 가지 않을 것인가? 이토록 정신무장이 바닥에 떨어진 장병을 어찌 믿고 안심할 수 있으랴 싶다.

 올 후반기부터이긴 해도 충의정신을 고취시킨다는 차원에서 효문화선양회의 강사진들이 발벗고 나섰다. 이들은 효문화선양회가 초·중학교를 대상으로 효교육을 하는 강사진들이다. 울산광역시 교육청에서 사라져가는 효를 어떻게 하면 자라나는 아이들에게 가르칠까 고심하다 지난해부터 시작한 교육이다. 천진한 아이들이 효가 무엇인가를 몰라도 당장은 발등에 불이 떨어지지 않으나, 장병들이 적과 싸우겠다는 구국의 충의 정신이 없다면 이는 허수아비 군대와 다름이 없다. 근래 군기강이 해이해졌다는 각계의 목소리가 높고 군대를 전역한 노병들도 나라의 안위와 군의 나태해진 정신자세를 한탄하고 있다.

 지난 10월부터 울산 근교에 있는 군부대를 방문하며 울산 의병과 충의정신을 강의하며, 울산의 병사와 광복군에 대한 행적들을 질문해 보았지만 대다수가 알지 못했다. 특히 대한독립을 위해 청춘과 재산을 다받친 대한광복군 총사령관이 누구냐고 물었으나 단 한 사람도 아는 병사가 없었다. 순간 아득한 생각이 눈앞을 스쳤다. 행인지 불행인지 청산리전투에 전공을 남긴 부사령관 김좌진은 여럿 알고 있었다. 한편 반가운 생각보다는 실망감이 가슴을 무겁게 눌렀다. 부사령관은 알면서 왜 총사령관에 대해서는 이름조차 모를까? 순간 나도 모르게 화가 나서 큰 소리로 소리쳤다.

 "여러분들은 군인이야, 대한광복군의 총사령관도 모른다면 말이 되는가?"
 모른다는 사실에 너무 맥이 빠지면서 강의할 기분도 사라졌다. 여태 정부에서는 우리의 피 맺히고 한맺힌 역사를 어떻게 가르쳤기에 대한 독립군 총사령관의 이름조차 모른단 말인가? 생각할수록 화가 치밀었다. 적어도 그 자리에 앉아 강의를 듣는 병사들은 인텔리 병사들이다. 최고학부인 대학을 다니다가 군입대한 청년들 아닌가. 가장 지성인이라고 자처하는 대학. 그런 대학들을 다니다 온 젊은 이들이 제나라의 국운이 풍전등화 같았던 시기의 구국을 위해 싸운 인물도 모르고 있으니 어찌 5,000년 민족사를 알겠는가. 2,000년사도 제대로 알고 있을까 의심스럽고 통탄할 일이다. 매국노 이완용, 장승원은 몰라도 구국의 일념으로 모든 것을 다 받친 독립군총사령관을 비롯한 피 흘려 나라를 구한 독립군과 애국선열들은 알고 있어야 옳지 않은가. 나는 이순간 다른 이야기를 접고 박상진에 대해 열강을 시작했다.

 박상진총사령관은 1884년 울산 북구 송정에서 승지 박시규(朴時奎)와 여강 이씨 사이에 무녀독남으로 태어났다. 일본이 조선을 침탈하기 위한 을사조약을 채결하자 많은 애국지사들이 비분강개하여 고종황제의 의거밀명을 받고 의병활동을 전개하다 1908년 스승 허위가 체포되어 포살형을 당했다. 이에 충격받은 박상진은 잠시 하향하여 마음을 추스렸고, 이 당시 만난 영해출신 신돌석 의병장과 의형제를 맺었다. 1913년 손문과 직접만나면서 적극적으로 독립운동에 매달렸다. 1915년1월 대구에서 조선국권회복단이 조직되고, 1915년7월 풍기에서 시작된 채기중의 대한광복단이 하나로 뭉친 대한광복회를 새롭게 결성시켰다. 이 때에 박상진이 대한광복회 총사령으로 추대되고, 김좌진, 채기중 등이 부사령관직을 맡게되었다.

 훗날 1916년 9월 대구의 친일거부 서우순 제거 권총사건이 있었고, 1917년에는 친일파이던 칠곡의 거부 장승원을 채기중, 유창순 등을 시켜 처단시켰다. 1918년2월1일 생모의 출상을 앞두고 장례식에 참석했다가 일경의 경주수비대 수백명이 상가를 포위하여 장승원 제거 주동으로 체포되었다. 박상진은 가혹한 고문을 받으면서도 끝내 활동의 비밀을 자백하지 않았다. 경주에서 공주경찰서로 끌려가 14개월동안 온갖 고문을 이겨내고 1919년9월 대구 복심원에 이송되었다. 이곳에서 1년여 시간을 보낸 후 1921년8월11일 38세의 꽃다운 나이에 대구감옥에서 동지 김한종과 사형을 집행, 순국했다.

 나는 마지막으로 박상진 총사령관이 순국 직전에 남긴 마지막 절명시(絶命詩)를 열창하며 강의를 끝냈다.
 '다시 태어나기 어려운 이 세상에/다행히 남아로 태어났으나/아무일도 이루지 못하고 가니/청산이 조롱하고 녹수가 비웃네'
 나의 열강에도 무심한 듯, 생기없는 눈동자들을 마주보며 허탈함이 산처럼 무겁게 가슴을 눌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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