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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의 발견은 인류역사를 바꾼 대사건이었다. 울산에도 삼한시대부터 철 생산지가 있어서 주목을 받았다. 울산광역시 북구 달천동 산 20-1 일원에 있었던 '달천철장(達川鐵場)'이 바로 그곳이다. 신라가 변변치 않은 변한의 사로국에서 출발해 삼국통일을 이룰 수 있었던 원동력도 달천철장이 있었기 때문이다.
 달천철장은 중국의 '삼국지위지동이전(三國志魏志東夷傳)'과 '후한서(後漢書)'에 기록이 나온다. 한반도의 예(濊)는 물론 한(漢)과 왜(倭)에 까지 달천의 철을 가져갔다고 한다. 우리 문헌의 최초의 기록은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 1452년 달천에서 생산된 철 1만2,500근을 수납했다고 돼있다. 달천철장은 그 뒤 조선 어느 시기에 폐광됐다.

 달천철장을 다시 찾아낸 이는 당시 경주에 속해 있었던 울주군 두서면 전읍리 출신의 구충당(求忠堂) 이의립(李義立·1621~1694).
 그는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은 것은 병기를 만드는 데에 필요한 철을 갖지 못한 때문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철을 찾는 데에 일생을 바친다. 26세되던 인조 24년(1646년)에 치술령에 올라가 병기에 쓰이는 무쇠와 유황과 비상을 찾으려는 간절한 뜻을 산신에게 기도했다.
 그의 발길은 팔도에 뻗쳤다. 인조 25년(1647년) 가야산을 찾은 것을 시작으로 금강산과 묘향산, 구월산을 차례로 뒤졌다. 1652년 6월에는 백두산을 찾는 등 북녘 곳곳을 뒤졌으나 소득이 없자 남행한다.

 속리산과 지리산, 태백산, 소백산에 이어 지금의 경북지방을 돈 뒤에 밀양과 양산을 거쳐 효종 9년(1657년) 1월에 경주와 울산 경계지점에서 잠자리에 들었다. 꿈에 나타난 신인(神人)의 도움으로 달천천장을 발견한다. 무려 12년의 고난 끝에 감격을 누렸다. 나중에 유황과 비상까지 찾아냈다.
 그의 공적을 기려 나라에서는 숙천도호부사를 내렸으나 사양하자 가선대부(嘉善大夫)의 품계와 함께 선조 삼대(三代)를 증직(贈職)했다. 부인에게는 정부인(貞夫人)의 교지를 주어 표창했다. 그가 편히 일할 수 있게 '유황을 굽는 역군(煮黃軍)' 180명도 내려주었다.

 이의립이 다시 찾은 달천철장은 한말까지 이어졌으나 사정이 여의치 않아 한때 철생산이 중단되기도 했다. 국망 직전인 1906년에 일본인에 의해 다시 개발에 들어갔으며, 1943년에는 개인이 채굴했다. 1964년에 대한철광이 맡아 개발을 계속했으나, 자원고갈 등 경제적인 이유로 1993년 6월에 철생산을 그만 두고, 사문석만 파내다가 90년대 말 그마저도 중단됐다. 지금은 대규모 아파트단지가 들어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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