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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1월 현재, 울산광역시 중구 태화동 91-2번지 일원에는 흙더미가 가득하다. 지나는 사람들 모두가 한번 씩 보았음직한 공사안내판(2010년 11월 까지 존치)에는 '태화루 암벽 복원 사업'이라고 적혀 있었다. 그리고 공사안내판에는 앞으로 세워질 태화루의 모습이 장엄하게 그려져 있었다.
 영남의 3대 루(樓) 중의 하나였기도 하거니와, 울산을 대표하였던 태화루가 오랜 기간 동안 모습을 감추었다가 곧 세상에 다시 나온다는 것만으로도 흥분되고, 기대되는 일임에 분명하다. 하지만, 전통건축을 전공한 필자의 생각으로는 작지만 중요한 의문을 가지고 그림을 바라볼 수밖에 없다.

 태화루는 처음 만들어진 연대가 분명하지 않다. 다만 선덕여왕 17년(643)에 자장율사가 태화강변에 태화사를 지었다는 내용으로 미루어 볼 때, 태화사의 부속 건물로 당시에 지어진 것으로 추정하고 있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이다. 이와 같은 견해를 사실이라고 간주하면 태화루는 태화사에 딸린 문루(門樓)였을 가능성이 높다.

 만약, 태화루가 사찰에 딸려있던 루(樓)가 아니고, 그저 경치 좋은 곳에 별도로 세워졌던 루였다면, 그 원래의 모습을 추정하는 과정은 달라진다. 절에 딸린 루(樓)는 경치 완상용이 아니다. 절의 주지 및 명승이 설법을 할 경우, 대중들은 금당 앞의 마당에 앉아 듣게 되는데, 청중이 너무 많을 때는 루에 올라 듣게 되고, 비라도 올 경우에는 더욱 더 긴요하게 이용되었다. 또한 일주문으로부터 사찰로 진입하는 불자들이 부처의 집으로 들어가는 마지막 문으로서의 기능을 하였던 것이 바로 루였다.

 이러한 일반적인 내용을 감안하고 보면, 공사안내판에 그려져 있는 태화루는 태화사가 세워졌던 초창기의 모습이라고 보기 어렵다. 얼마 전 까지 있었던 예식장을 걷어내고 그 자리에 거의 비슷한 규모로 그려져 있는 태화루는 사찰의 문루 모습이 아닐뿐더러 외부로부터 진입이 불가능한 곳에 만들어져 있다.
 이를 정리해 보면, 현재 안내판에 그려진 태화루의 모습과는 달리 신라~통일신라시대의 태화루는 현재의 태화교 북쪽 끝을 향한 남동향이었고, 사람들은 외부로부터 태화루 아래를 지나 태화사로 들어갔을 가능성이 높은 것이다.

 이러한 모습은 고려시대까지 이어진 것으로 보인다. 고려중기의 시인이었던 김극기(金克己)는 기문(記文)에  '…남쪽으로 경해(鯨海, 고래가 뛰어노는 바다)의 넓고 넓은 물결에 임한 것이 태화사이다'라고 하였다. 물론 고려시대를 거쳐 조선시대까지 남아 있었던 태화루가 신라시대에 만들어진 그대로의 모습으로 유지되었던 것은 아니었다.

 『고려사』에 997년 고려 성종이 태화루에 올라 군신들과 연회를 베푼 기록이 있다. 그리고 고려말~조선초기의 문신이었던 권근(權近)이 쓴 기문(記文)에 태화루를 1401년에 중건하였고, 이전의 것보다 더 웅장하게 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이와 더불어 서거정의 중신기(重新記)에도 1485년에 한차례 더 태화루를 중건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로 볼 때, 고려시대의  태화루는 문루(門樓)에서 경치 완상용 루(樓)로 개조 되었을 가능성이 있고, 위에 언급한 조선초기의 2차례에 걸친 중건도 그러한 기능을 충분히 담기 위한 증·개축에 해당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고려중기의 태화루 상황을 묘사한 김극기는 기문에 태화사가 '남쪽으로 경해(鯨海)의 넓고 넓은 물결에 임하였다'고 했고, 조선초기의 문인인 서거정은 태화루 중신기(重新記)에 '눈을 들어 멀리 바라보니, 그 경치가 내가 전에 본 누대들과 비슷한데 광원한 것은 오히려 이곳이 나은 것 같다'라 했다.

 기문의 내용과 시구는 고려말~조선초기 태화루에 오르자마자 보이는  장면을 읊은 것이다. 다시 말해서 태화루의 정면은 태화강 하구의 넓은 삼산들[野]과 소금밭[염전(鹽田)], 바다와 섬으로 향한 남동쪽을 바라보고 있었던 셈이다.
 그렇다면, 지금의 '태화루 암벽 복원 사업' 안내판에 그려진 태화루는 그 놓인 위치와 방향에 대하여 재고의 여지가 충분히 있어 보인다.

 물론, 필자의 의견은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작은 의문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현재의 추정 그림이 많은 연구자들이 심사숙고한 결과로 나온 내용이라는 점을 감안하고, 태화루 건립계획 과정의 여러 보고서를 참고해 보면, 태화언덕 일곽 내에서 태화루의 위치와 방향에 대해 보다 세심한 고찰의 의지와 언급이 없다는 점은 새삼 놀랍고, 걱정스럽기도 하다. 더 늦기 전에 태화루의 위치와 향(向) 그리고 규모에 대한 보다 진지한 고민을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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