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왕실에서 대통을 이을 왕손의 잉태는 중요한 일이다. 왕실에서 원자나 원손이 태어나면 그 태(胎)를 소중하게 다루고 태를 묻을 태봉(泰封)을 선정하여 출산 후 배출된 태를 일정한 장소에 묻는 풍습이 있었다. 이러한 문화를 장태문화라 하며, 왕실의 번영과 왕실 자손들의 무병장수를 기원하며 많은 자손을 낳기를 바라는 염원의 뜻에서 전국에 풍수설(風水說)에 따라 명당(明堂)을 찾아 태실을 만들고 태를 묻었다. 태실에 관한 기록을 살펴보면 삼국시대 김유신의 태실이 가장 오래된 장태 기록이 있으며, 고려시대의 태실은 고려 태조 왕건
상운산(上雲山)은 영남알프스의 주봉(主峰)인 가지산의 명성에 가려 일반인들에게는 그리 잘 알려지지 않은 산으로 마치 가지산의 전진봉(峰) 격으로 취급받고 있다. 그러나 상운산은 해발 1,114m로 어엿한 산 이름을 가진, 영남알프스의 한축에 넣어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골이 깊고 많은 이야기를 품고 있다. 강원도 구봉산에서 이어지는 낙동정맥(洛東靜脈)이 영남권으로 진입해 경주 단석산을 지나 일자(一)로 길게 이어져 오다가 삼강봉과 백운산, 소호고개를 지나 마치 고헌산에서 용틀임을 하듯 솟구쳐 오른다. 고헌산에서 기세를 올린 지맥은 본
구름이 피어오른다는 운문산은 예로부터 호거산(虎居山)으로 부르기도 하며, 산의 모양이 마치 한 덩이의 큰 바위처럼 생겼다고 하여 '한바위산'이라 부르기도 한다. 영남알프스의 최고봉인 가지산과 아랫재를 사이에 두고 서로 마주 보고 있는 산으로 운문지맥의 최고봉이다. 행정구역상 경상남도 밀양시 산내면과 경상북도 청도군 운문면을 경계로 능선은 활처럼 휘어져 있다. 조선시대 이중환이 쓴 택리지에 의하면 '운문산은 골이 깊숙하고, 불가에서는 1,000명의 성인이 세상에 나올 것이며, 또 병란을 피할 수 있는 복지'라 했다. 학심이골을 비롯한
문복산(文福山)은 경상북도 청도군 운문면과 경상북도 경주시 산내면에 걸쳐 있는 산으로 영남 알프스산군 중 가장 낮은 막내격인 산이다. 문복산 서쪽에는 600년(진평왕 22)에 수나라에서 귀국한 원광이 창건한 가슬갑사 터가 있고, 개살피계곡 옆에 있다. 개살피계곡은 여러 이름으로 불리고 있다. 지도에는 '계살피계곡'이라 표기돼 있고, 삼계리 사람들은 '게피계곡'이라 부르기도 한다. '개살피'라는 말은 가슬갑사 옆의 계곡이라는 경상도의 방언에서 유래됐다고 한다.세속오계 전수받은 귀산과 추항신라 진흥왕(540∼576)때에 청도 운문사를
영축산(靈鷲山)은 통도사를 품은 산으로 석가모니가 설법하던 인도 마가다국 왕사성에 있는 영축산의 모습과 통하므로 그곳에서부터 이름을 따왔다고 한다. 통도사는 경상남도 양산시 하북면 지산리에 위치해 있으며 석가모니의 진신사리(眞身舍利)가 안치된 적멸보궁(寂滅寶宮)이 있어 불보(佛寶)사찰로 불린다. 통도사에는 현재 본 절인 통도사를 비롯해 17개의 암자가 있는데, 통도사를 중심으로 서·북산 쪽과 남쪽 그리고 산문 밖으로 나뉘어 있다. 이 중 서·북산 쪽 암자는 9개(백운암. 비로암, 극락암, 반야암, 자장암, 금수암, 서축암, 안양암,
호박소는 영남알프스의 가지산 용수골과 백운산 주래골이 합쳐지는 골짜기 삼양교 아래에 있다. 백옥 같은 화강암이 수억만 년 세월을 거치면서 물에 씻겨 커다란 소(沼)를 이루었는데 그 모양이 마치 절구(臼)의 호박같이 생겼다 해 호박소(琥珀沼) 또는 구연소(臼淵沼)라고 부른다. 폭포의 높이는 10여m, 둘레는 100여 척(약 30.3m)이나 되며, 깊이는 측정하기가 어려울 정도로 깊었다고 한다. 옛날 이 지방 사람들이 물의 깊이를 알아보기 위해 돌을 매단 명주실 한 타래를 다 풀어보았지만, 끝이 닿지 않았다고 할 정도로 깊다 한다. 동
영남알프의 변방에 위치한 치술령은 호미지맥(虎尾枝脈)이 북동진하면서 솟구친 봉우리다. 신라 때 박제상의 부인이 남편을 그리워하며 세 딸을 데리고 치술령에 올라 왜국 쪽을 바라보며 통곡하다가 몸은 죽어 망부석(望夫石)이 되고, 혼(魂)은 새가 돼 국수봉의 바위 동굴로 숨어들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져 내려오는 곳이다. 치술령에 올라서면 날씨가 좋은 날이면 일본 대마도(쓰시마)가 보일 정도로 동해가 한눈에 들어온다. 치술령 정상에서 일본 땅 바라보니/ 하늘에 닿은 동해 물결, 가없어라./ 내 님 떠나실 때 손만 흔들어 주시더니/ 죽었는지,
영남알프스의 변방에 위치해 있는 무룡산은 삼태지맥의 한 봉우리다. 토함산(765m)의 산줄기가 이 구간의 최고봉인 경주 외동의 삼태봉(630.5m)을 거처 방어진 화암추등대까지 이어지는 도상거리 40.5㎞로 그 중간 기점에 무룡산이 있다. 무룡산은 울산의 진산(鎭山)이다. 옛날에는 진산(鎭山)과 주산(主山)의 제도가 있었는데 무룡산은 울산을 지켜온 수호산으로 고을 사람들은 이 산을 우러러보며 가뭄이 들면 이곳에서 비를 빌었던 성산(聖山)이기도 하다. 또한 무룡산은 울산아리랑의 노랫말에도 실릴 만큼 우리와 친숙해져 있는 산이다. 그리
천성산 적미굴은 동학을 창시한 수운 최재우 선생이 머물렀던 곳으로 알려져 있다. 적미굴은 소위 천성산 중앙 능선이라 불리는 산 정상(비로봉) 8부 능선에 있다. 이 능선은 짚북재(옛날 원효대사가 당나라에서 온 1,000명의 대중을 천성산 화엄벌에서 화엄경을 강론하기 위하여 이곳에 모으기 위하여 짚으로 만든 북을 매달아 놓은 곳)와도 연결되는데 양산시 하북면지에 따르면 '이 골짜기(내원골) 산 정상 근처 바위 상단에 붉은색을 띤 눈썹 형태의 바위가 있어 적미(赤眉)골이라 하고, 그 바위굴을 적미굴(赤眉窟)로 불린다'고 적고 있다. 즉
천성산은 영남알프스의 주봉인 가지산이 서서히 남진하면서 간월산, 신불산, 영축산, 정족산, 부산 몰운대로 이어지는 낙동정맥의 한 구간이다. 그 옛날 원효대사가 당나라에서 온 1천명의 승려를 천성산 화엄벌에서 화엄경(華嚴經)을 강론해 모두 득도하였다는 전설에서 천성산(千聖山)이라 부른다. 천성산은 많은 계곡과 폭포, 봄철의 진달래, 철쭉꽃이 무리를 지어 피고, 가을철에는 온산이 만산홍엽을 이룬다. 골짜기마다 아름다운 전설과 원효대사의 숨결이 살아 움직이는 듯하고 흘러내리는 계류의 소(昭)와 담(潭)은 아름답다 못해 마음껏 멋을 부린
대운산(大雲山·742m)은 울산광역시와 경상남도 양산시의 경계에 걸쳐있는 산으로 신라 원효대사의 마지막 수도처로 알려져 있다. 동국여지승람 기록에는 불광산(佛光山)으로 되어 있으나 언제부터 대운산(大雲山)으로 바뀌었는지는 알 수가 없다. 산자락에는 원효대사가 창건했다는 장안사를 비롯하여 척판암, 내원암, 백련암 등 이름난 암자가 여러 개 있다. 대운산을 오르다 보면 대운교에서 왼쪽과 오른쪽으로 계곡이 갈라지는데, 오른쪽 계곡은 내원골과 절터 골로 왼쪽은 도통골과 박치골로 이어진다. 옛날 절터 골에는 대원사라 하는 큰 절이 있었다고
운문사는 경상북도 청도군 운문면 신원리 호거산에 있는 사찰로 대한 불교 조계종 제9교구 본사인 동화사의 말사이다. 운문사 사적에 의하면, 557년(진흥왕 18년)에 한 신승이 북대암 옆 금수동에 작은 암자를 짓고 3년 동안 수도하여 도를 깨닫고 도우 10여 인의 도움을 받아 7년 동안 동쪽에 가슬갑사, 서쪽에 대비갑사, 남쪽에 천문갑사, 북쪽에 소보갑사를 짓고 중앙에 현재의 운문사를 대작갑사(大鵲岬寺)라는 이름으로 창건하였다. 사찰 동쪽으로는 영남알프스의 주봉인 가지산 줄기가 경상 남·북도를 경계 짓고 있고, 남쪽에는 억산과 운문산
갈산고지는 태봉산으로도 불리는데, 주봉인 신불산을 배경으로 한 빨치산의 근거지로 알려져 있다. 일명 681고지로 불리는 갈산고지는 배내골이 한눈에 훤히 내려다보이는 곳으로 사방을 관측하기 좋은 지정학적 천혜의 요새였기 때문이다. 정상에 서면 사방이 모두 열려있어 적들의 동태를 쉽게 관찰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도주하기 좋으며, 능선을 따라 다른 지역으로 이동이 쉬운 곳이다. 또한, 멀리 원동과 언양을 오가는 길이 한눈에 들어오고, 신불산, 간월산, 영축산, 시살등, 천황산, 재약산 등도 한눈에 관측된다. 이곳이 남도부 부대의 숙영지
신불산(神佛山)이란 이름은 언제부터 명명되었는지는 정확하게 전해지지 않는다. 신(神) 자는 성지라는 뜻의 성산을 의미하고 불(佛)자는 부처를 말하거나 도시를 말하는 것으로도 해석된다. 또한, 한자를 풀이해 보면 신(神) 귀신 신, 불(佛) 부처 불, 산(山) 뫼 산으로 신들이 부처님께 기도를 올리는 산으로도 해석된다. 신불산은 동남으로 '무늘등'을 경계로 하고, 북쪽으로는 간월산을 경계로 한 '쇠판골' 능선을 가장자리로 하여 병풍처럼 가천마을을 둘러싸고 있다. 옛날 이 산 아래 사는 마을 사람들은 신불재
밝얼산은 영남알프스의 지붕이라 불리는 배내봉(背內峰)이 동쪽으로 허리를 틀어 언양 부로산(봉수대)까지 이어지는 긴 등(능선길)으로 한자로는 박월산(朴月山)이 된다. 옛날 길조차 제대로 없던 시절, 차마고도와 같았던 긴 능선길을 넘나들었던 배내골 사람들과 밀양과 원동에서 물목을 거두어들인 장꾼과 보부상, 소 떼를 모는 소 장수들이 언양 오일장으로 넘나들어야 했던 고생길과 같은 곳이었다. 이 긴 능선길은 상북 거리오담(간창, 거리 하동, 지곡, 대문동, 방갓)마을과도 이어지는데 마치 말안장처럼 생겨 말 무제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래서인
사학골(死鶴谷)은 언양의 진산(鎭山)인 고헌산에서 발원한 물줄기가 사연댐으로 흘러드는 지류이다. 이물은 연구골을 거처 반곡에서 고하마을 앞 동남쪽 산간계곡을 따라 약 3㎞쯤 굽이굽이 돌아 사연댐의 주류인 대곡천(大谷川)과 합류하는 지점까지의 계곡을 고하골(庫下谷) 또는 사학골(死鶴谷)이라 부른다. # 한쪽 날개가 없어 죽은 학의 형국 '사학골'사학골이라는 지명은 고하마을에서 동남쪽인 반구대로 가는 골짜기 왼쪽(계곡의 북쪽) 산이 풍수지리설로 볼 때, 마치 학(鶴)이 날개를 펼치고 있는 형국을 하고 있다고 한다. 그러나
들어가는 사람은 봤어도 나오는 사람은 본 적이 없다는 저승골! 제발 저승골에 가지 마시라! # 살아있는 듯 굽이치는 바위·볕도 안 드는 협곡저승골은 전형적인 V자형 협곡으로 배내봉에서 간월산 자연휴양림 방향으로 흘러내리는 골짜기로 급경사가 심한 곳이다. 저승골의 지명은 고려장(高麗葬)에서 유래됐다고 전한다. 고려장은 늙은 부모를 산속의 구덩이에 버려뒀다가 죽은 뒤에 장례를 지냈다는 풍습으로 70살이 된 늙은 부모를 풍습대로 자식이 지게에 지고 산속 깊은 곳에 버리고 돌아오면 밖으로 나갈 수 없는 노인들은 굶어 죽거나 맹수들의 밥이
멈추어라! 순간이여, 너는 정말 아름답구나! 약혼한 여자처럼 아름답고 순결한 자연을 보려거든, 어느 봄날 이곳을 와 보시라! 피 맺힌 마음의 상처를 달래려거든 어느 늦가을 다시 한번 이곳으로 와 보시라! 프랑스 소설가 발자크가 쓴 '골짜기의 백합'에 나오는 한 대목이다. 달음산(撻陰山)은 부산광역시 기장군에 있다. 산과 바다의 경치를 한눈에 조망할 수 있는 곳으로 발자크가 쓴 골짜기의 백합에 나오는 한 대목을 연상하게 할 만큼 동해에서 솟아오르는 새벽 햇빛을 제일 먼저 맞는 기장군 제1경의 명산으로 꼽는 곳이다. 또한
천마산(613m)은 울산시 울주군 두서면 미호리 상동마을 오른쪽으로 높이 솟은 산으로 호미지맥(虎尾枝脈)의 첫 봉우리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이 산줄기는 포항의 호미곶까지 이어진다. 삼국 통일 전 김유신이 백운산 감태봉 바위굴에서 불철주야 기도를 올리고 있을 때 이상한 차림을 한 노인이 준 보검을 받은 뒤 천마를 타고 힘껏 땅을 박차고 날아 처음 발을 디딘 곳이라고 한다. 백운산 정상에서 대략 4㎞ 거리에 있다. 천마산 기슭에 있는 이 백병바위는 병처럼 생긴 흰 바위로 사람의 생사(운명)를 미리 알려주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인간
백운산은 신라 때 열박산이라 불렀으며 언제 산 이름이 바뀌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김유신이 삼국통일의 영기(靈氣)를 얻은 산으로 알려져 왔다. 백운산의 상봉을 감태봉, 중봉을 삼강봉으로 불리는데, 감태봉의 유래는 이곳이 백운산에서 가장 높은 봉우리로 김유신이 여기에서 별자리의 우두머리인 허성(虛星:현부)과 각성(角星:금성)의 영기를 받았기 때문이라 한다. 또 삼강봉은 산 맨 꼭대기에 빗물이 떨어지면 태화강, 낙동강, 형산강 세 곳으로 나누어 흐를 만큼 기묘한 분수령을 이루고 있음에 따라 붙어진 이름이다. 감태봉에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