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일 오후 6시 55분께 울산 남구 삼산동 농수산물도매시장 인근 한 가게에서 화재가 발생했다. 유은경기자
백제 혜왕(惠王)이 즉위 1년도 못돼 죽자 아들 부여선(夫餘宣)이 왕좌에 오르니 제29대 법왕(法王)이다. 할아버지 성왕(聖王)은 신라 진흥왕에게 딸을 시집 보내며 나제동맹을 맺고 한강 유역을 차지한 고구려를 함께 물리친다. 신라는 한강 상류를 차지하고 백제는 하류에 머물렀는데 진흥왕이 느닷없이 군사동맹을 깨고 침범해 강 하류를 뺏는다. 이에 성왕은 아들 창(위덕왕)을 내보내 신라 관산성(충북 옥천)을 치려다 오히려 붙잡혀 노비 출신인 신라 장수의 손에 숨져 버린다. 중국과 주요 해상 무역거점을 잃은 백제는 경제적으로 큰 타격을 맞
고대국가로서 나라 기반을 닦은 신라 법흥왕은 가야 정벌에 나서 영토를 크게 확장해 나간다. 금관가야 구형왕의 항복을 받아내고 아라가야도 정복해 신라의 힘이 경주 남쪽 낙동강 유역을 장악하기에 이른다. 장창호 작가는 전쟁으로 국가 영토를 넓히며 왕권을 굳건히 지켰으나 수많은 피의 대가에 뉘우치는 법흥왕을 연기한다. 왕은 살생을 금지하며 통치권자의 자리도 내려 놓고 머리를 깍고 홀연히 산사로 들어간다. 화려한 궁궐의 삶을 버리고 비구니가 된 왕비 보도부인(保刀夫人)도 이어서 연기한다. 법흥왕은 말년에 신라 최초의 국찰 흥륜사(興輪寺)에
코로나19로 일상이 움츠려들자 반사적으로 오토캠핑. 차박. 차크닉 열풍이 MZ세대부터 다양한 세대까지 널리 확산되는 추세다. 위드코로나가 지난 1일 부터 시행된 가운데 울산서 처음 차박페스티벌이 울산문수양궁장에서 지난 26일부터 28일까지 열렸다. 울산신문사가 마련하고 울산시와 남구청이 후원한 '2021 그린차박페스티벌in울산'을 둘러 보고 차박의 매력이 어떤것인지 살펴 보았다. 김동균기자 justgo999@ulsanpress.net#차박 #캠핑 #차크닉▣ 기사 보기 ▶ ▣ 울산신문 홈페이지 ▶♣ Music Licen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를 추진중인 '울주 반구대 일원'이 지난 4일 국가 명승 지정서가 전달되었다. 특히 올해는 반구대 암각화 발견 50주년을 맞아 그 의미가 남다르다. 인류 문화의 원형을 간직한 반구대암각화와 천전리암각화를 비릇 다수의 국내 암각화 발견일이 크리스마스와 유독 인연이 깊다. 모두 크리스마스를 전후해 발견됐기 때문이다. 여섯번째 마지막 영상에서 앞서 만든 5편의 영상 정리하며 반구천을 따라 선사시대 부터 고려.조선시대에 이르기 까지 7천년 역사의 흔적을 쫓으며 그 의미를 찾는데 노력했으나 아쉬움도 있다.
2021년 반구대암각화를 품은 '울주 반구천 일원'이 유네스코 세계유산 우선등재목록 선정과 명승(국가지정문화재)으로 지정되었다. 그러나 누구보다 반겨야할 울주군 대곡리 마을주민들은 반구마을과 한실마을 그리고 원주민과 이주민으로 양분되고 갈등을 겪고 있다. '50년전 크리스마스 선물, 반구대암각화' 다섯번째 스토리영상편에서 대곡리 마을주민들을 만나 서로 다른 입장이 무엇인지 양측의 다른 견해를 들어 보았다. 김동균기자 justgo999@ulsanpress.net▣ 울산신문 홈페이지 ▶https://www.
2개의 암각화 국보가 있는 울주군 대곡천(반구천)일대는 유네스코 등재를 위해 여러가지 풀어야 되는 과제들이 있다. 그 첫번째가 시민의 식수원 확보와 후손에게 물려 줘야할 문화재 보존이라는 갈림길이다. 하천 하류에 있는 사연댐으로 물에 잠기는 암각화는 풍화작용에 오래동안 훼손이 지속되어 왔다. 이런 암각화 보존을 위해 대곡천의 물길 변경과 생태제방 설치 그리고 차수벽(임시물막이) 설치 등 여러가지 논의와 실험 끝에 댐 수위 변경으로 가닥을 잡았다. 올해는 댐 수문 설치까지 확정하고 부족한 식수원은 운문댐에서 공급 받기로 했다. 환경부
신라는 눌지왕(417~458)때 고구려 승려 아도와 묵호자로 부터 불교가 전해졌으나 뿌리 내리질 못하고 약 100년이 넘어 528년 법흥왕 때 이차돈(異次頓, 염촉 厭觸)의 순교로 비로소 공인되었다. 장창호 작가는 법흥왕의 처형 명령에 이차돈의 목이 베이자 흰 피가 쏟구치고 땅이 진동하며 꽃비가 내린 가운데 베어진 머리는 소금강산으로 날아가 떨어지는 기이한 일을 연기한다. 서라벌에서 신성히 여기던 천경림(天鏡林)에 절을 짓겠다는 소문이 나돌고 오랜 민간 신앙을 이어온 신하들은 왕족의 옹호를 받는 불교에 노골적인 반감을 드러냈다. 법
신라 제21대 비처왕(소지왕)때 고구려 승려 아도(阿道)가 신라에 불교를 처음 전했다고 삼국유사에 기록돼 있으나 신라 제19대 눌지 마립간때 고구려 승려 묵호자(墨胡子)가 불교를 전했다는 삼국사기의 기록이 더 널리 알려져 있다. 삼국유사의 아도본비(我道本碑) 등 여러 역사서에 남겨진 신라 불교 전래과정에 대한 시기와 인물에서 각각 차이를 보이고 있다. 아도의 등장 시대도 제13대 미추 이사금과 제21대 비처 마립간기를 오가며 시기적으로 큰 오차가 있다. 아도의 이름도 본명이 아니라는 주장과 아도와 묵호자를 동일인으로 보는 견해도 적
서기 372년 고구려 제17대 소수림왕때 중국 전진(前秦)을 통해 승려 순도(順道)가 불경과 경문을 전하면서 한반도에 불교가 처음 들어 왔다고 한다. 소수림왕은 평양성으로 쳐들어온 백제의 정복 군주 근초고왕에 의해 부친 고국원왕이 숨지자 복수심에 불타고 있었으나 국력을 키워야만 했다. 먼저 다종교였던 나라의 마음을 한곳으로 모으기 위해 불교를 공인했다. 교육기관 태학(太學)을 세워 귀족 자제들을 유교적 정치이념에 충실한 국가 인재로 양성하고 율령을 반포해 중앙집권적 국가 기틀을 다졌다. 소수림왕은 고구려 최초의 사찰 초문사(肖門寺
백제 제15대 침류왕때 중국 동진(東晋)을 거쳐온 인도 승려 마라난타(摩羅難陀)가 백제에 처음 불교를 전했다고 알려져 있다. 장창호 작가는 백제 불교 최초 도래지인 법성포구(전남 영광군)에 다다른 인도 간다라 출신 승려 마라난타와 그를 반겨 맞이하는 백제민들의 만남을 연기하고 있다. 침류왕은 낯선 이방인 마라난타를 궁궐에 머물게 하며 법문을 들으며 불교를 믿게 되었다. 이듬해 새로운 도읍지 한산주(漢山州)에 백제 최초로 절을 창건하고 10인의 백제인을 출가시켜 득도시켰으며 침류왕이 일년만에 숨지자 아들인 제17대 아신왕이 불교를 공
장창호 작가는 삼국유사의 가락국기 네번째 마지막편에서 금관가야 시조 김수로왕에서 제10대 구형왕(仇衡王)까지 500여년간 이어온 왕조의 역사에 대해서 이야기 하고 있다. 장 작가는 역사서에 가야 왕에 대한 기록이 금관가야 왕조 계보 정도로만 남아 있는것을 아쉬워하며 가락국 제6대 좌지왕(坐知王)기를 연기한다. 좌지왕이 용녀(傭女)와 혼인하자 외척들이 나라를 주무른다. 보다 못한 충신 박원도(朴元道)과 목숨을 내놓고 왕에게 용녀로 인해 어지러워진 정사에 대해 간언을 하자 왕이 받아 들여 용녀를 쫓아내고 새로운 왕비 복수(福壽)를 맞이
가락국 시조 수로왕의 왕비인 허황옥(許皇后)은 서역 아유타국(阿踰陀國, 인도 북부 고대국가)의 공주로 하늘의 명을 받아 수로왕의 왕비가 되어 김해 허씨(許氏)의 시조가 되었다. 왕좌에 오른 수로왕이 왕비 없이 지내자 신하들이 왕비를 얻으라고 청했다. 그러나 왕은 하늘 뜻에 따라 왕이 되었듯이 배필 또한 하늘이 정할 것이라 답하며 거절한다. 며칠 뒤 수로왕은 신하 유천간에게 망산도(경남 창원시 진해구 용원동)에 가서 기다리다가 하늘이 내려준 왕비를 모셔 오라고 명한다. 그리고 또다른 신하 신귀간에게도 같은 명령을 내려 승점(김해시 분
금관가야 수로왕이 왕위에 오른 어느 날 바다 너머 용성국(龍成國, 일명 완화국 琓夏國) 왕비가 낳은 알(卵)에서 태어난 탈해(脫解)가 가락국에 이르러 궁궐로 오더니 왕에게 대뜸 왕의 자리를 내어달라 하자 어이 없어하는 가야 수로왕이 거절한다. 그럼에도 탈해가 술법(術法) 대결을 청하자 두 사람은 날짐승으로 변신술을 펼치며 자웅을 가린다. 장창호 작가는 온라인 콘텐츠 오디오클립을 통해서 역사서에 널리 알려진 수로왕과 탈해의 변신술 대결은 군사적 대립을 암시한 것으로 추정하며 패기만만 하다 못해 오만한 탈해와 노련한 수로왕의 신화 속
올해는 울산시 울주군 대곡천의 '반구대 암각화'가 발견 50주년을 맞는 해이다. 대곡천의 또다른 암각화 '천전리각석'은 지난해에 발견 50주년을 맞았다. 인류 문화의 원형이 새겨진 2개의 암각화를 품은 대곡천 일대를 세계유산으로 등재키 위해 많은 사람이 숨가쁘게 달려 왔다. 암각화에 어떤 형상들이 새겨졌는지 그리고 암각화의 국보와 명승 지정에 이어 세계유산 등재를 위해 가는 여정을 살펴 본다 . 김동균기자 justgo999@ulsanpress.net#유네스코 #세계유산 #반구대암각화▣ 울산신문 홈페이지
서기 42년 변진(弁辰) 지역에 가야의 여러 나라 중 김해 지역에 세워진 나라 금관가야(金官伽倻)가 가락국(駕洛國)으로 김수로왕(金首露王)이 나라를 세웠다. 가락국기는 고려 문종 때 가야 관리직 금관지주사(金官知州事)가 저술한 역사서로 김수로왕(金首露王)의 전설과 금관가야사를 기록했으나 전체 내용은 전해지지 않고 있다. 삼국유사에 '가락국기' 일부를 옮겨 전하고 있다. 장창호 작가는 삼국유사에 전해지는 구지가(龜旨歌) 노래를 부르며 변한 땅에세 행해진 주술 의식을 연기하고 있다. 하늘의 목소리를 들은 9명의 부족장과
울산시 울주군 언양읍 대곡천은 백운산에서 내려온 물길이 수차례 굽이쳐 휘어 감으며 아름다운 풍광을 이뤘다. 선비들은 절경이 빼어난 이 하천 일대를 '구곡천'이라 부르며 백련정. 집청정. 관서정 등 자연을 벗 삼아 정자를 짓고 스스로 학문을 닦고 후학들을 길렀다. 고려 말 유배지 언양에 머물던 포은 정몽주는 이곳 정취에 반해 자주 찾았다고 한다. 음력 9월 이른 가을에 엎드린 거북이 형상을 닮은 '반구대'에 올라 한시 '중양절감회(重陽節感懷)'를 지었다. 이후 많은 선비들이 이 언덕에 올라
공산성 전투 크게 이긴 후백제는 강주(경남 진주)와 부곡성(경북 군위군)에서 고려를 물리치며 연전연승했으나 929년 고창(경북 안동) 전투에서 고려 유금필(庾黔弼) 장수를 만나 8,000여명의 사상자를 내며 패전하더니 이후 전장터에서 열세를 면치 못하게 된다. 운주성(충남 홍성군)전투에 패한후 기세가 걲인 견훤은 넷째 아들 금강(金剛)에게 왕위를 넘기려 하자 맏아들 신검(神劍)과 동생 용검.양검은 불만을 품고 한밤중 부친 잠자리에 뛰어들어 견훤을 금산사(전북 김제시)에 유폐 시키고 동생 금강은 죽여 버린다. 모악산 산자락 금산사에서
고려와 수호 동맹를 맺은 신라 경애왕을 제압하고 공산성전투에서 고려에 맞서 크게 이긴 후백제 견훤은 승리에 도취해 고려의 평양 땅을 밟겠다는 도발적인 편지를 고려 왕건에게 보냈다. 이에 질세라 왕건도 답장을 보내 자신의 넓은 도량을 내보이며 견훤을 사마귀와 모기에 빗대며 그의 비뚤어진 도덕성도 꾸짖는다. 후백제 국서(國書)인 편지는 견훤의 책사, 파진찬(波珍飡) 최승우(崔承祐)가 썼다. 당나라 유학파인 최승우는 통일신라 말기 최치원, 최원위과 더불어 최씨 성을 가진 3명의 천재 중 한 명으로 알려진 인물이다. 왕건의 편지도 역시 당
농사꾼 출신 장수의 아들로 태어난 견훤(甄萱)은 쇠락하던 통일신라 말기 변방의 신라 장수를 하다 패망한 600년 역사의 백제 부흥을 꿈꾸며 후백제를 세웠다. 지방호족의 딸인 견훤 모친은 꿈에 한 사내가 나타나 곁에서 잠을 자고 갔다. 여러 날 같은 꿈이 반복되자 사내의 자주색 옷에 실을 꿴 바늘을 꽂아 두었다. 다음 날 날이 밝자 바늘에 꿰어둔 실을 따라 가보니 멀지 않은 곳에 지렁이가 바늘에 꽃혀 죽어 있었다. 지렁이 정기를 받고 태어난 견훤의 야래자(夜來子)설화이다. 오디오클립에서 후백제 견훤의 스토리를 연기하는 장창호 작가는
백제 법왕(法王)의 아들이자 서동요(薯童謠)의 주인공 제30대 무왕(武王)이 왕위에 오르자 빼앗긴 백제 영토를 되찾기 위해 신라 성을 공격하며 45년간 나라를 다스렸다. 무왕은 서동설화에 따르면 어머니와 연못의 용(龍)사이에서 태어나 산 속에서 마(薯)를 캐다 팔며 생활했기에 서동(薯童)이라 불렸다. 서동이 미색이 뛰어난 신라 진평왕의 셋째 딸 선화공주를 음해하는 향가 서동요를 지어 서라벌에 퍼트리니 마침내 궁궐에 쫓겨난 공주를 부인으로 맞아 드렸다는 내용은 널리 알려진 이야기이다. 산골 소년 서동은 신라 공주의 조력으로 백제 왕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