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재지 : 울산 울주군 두동면 은편리 586-2울산광역시 기념물 제21호지정일 : 1998년 10월 19일시대 : 청동기청동기시대의 지배 세력층이 만든 지석묘군으로서, 상석(床石) 위에 성혈(聖血)이 남아 있다. 이를 촌로들은 칠성바위라고 하는데 기도하면서 만든 성혈 속의 돌찌꺼기를 먹으면 아들을 낳는다는 전설이 있다.고인돌(支石墓)에 상석이 반듯하게 놓여 있는데 외견상만으로는 기반식 고인돌일 것으로 추정된다. 지하에는 돌널무덤(石棺墓)의 지하구조가 있을 것으로 판단된다. 현재 소로 옆의 빈 공터와 논 옆의 경작지에 3기가 상석을
소재지 : 울산 울주군 웅촌면 대대리 573번지 외 1필지울산광역시 기념물 제20호지정일 : 1998년 10월 19일시대 : 삼국대대리 고분은 울산에서 부산으로 가는 7번 국도변에 단독으로 위치하고 있으며 주변에서 확인된 삼국시대의 무덤이 산등성이에 위치하는 것과 달리 평지에 위치하고 있다.정식 발굴조사가 이루어지지 않아 유구의 정확한 내부 구조 등은 알 수 없지만 봉분의 높이 등으로 보아 6세기경에 만들어진 돌방무덤으로 추정된다. 이 고분은 하대고분군에서 이어지는 구릉 끝자락에 위치하며 하대고분군은 구릉정상부에서 마을아래까지 연속
소재지 : 울산 울주군 상북면 명촌리 산72-1번지 외 2필지울산광역시 기념물 제19호지정일 : 1998년 10월 19일시대 : 삼국시대 이후등억(登億) 마을 북쪽의 산성산(山城山:해발 297m) 8부 능선을 따라 쌓은 대표적 테뫼식 석성이다. 삼국시대에서 조선시대까지 주로 왜구를 막기 위하여 축조된 것으로 추정되는 이 성은 위치상 낙동강 하구에서 신라의 중심지인 경주와 연결하는 전략상의 요충지에 해당한다. 이러한 사실은 성 주변 일대에 신라시대의 고분이 많이 있음을 보아서도 알 수 있다. 성터에는 체성(體城)과 수구(水口), 우물
소재지 : 울산 동구 동부동 산187-1외 14필지울산광역시 기념물 제18호지정일 : 1998년 10월 19일시대 : 조선마성(馬城)이란 말이 담을 뛰어넘는 것을 막기 위하여 목장의 둘레를 돌로 쌓은 담장으로 마치 성과 같다 하여붙여진 이름이다. 성종(成宗) 2년(1471) 신숙주(申叔舟)가 쓴 《해동제국기(海東諸國紀)》에 보면 1474년에 예조좌랑 남제(南悌)가 왕명을 받들어 항거왜인(抗拒倭人)의 실태를 조사하면서 그린 삼포(三浦)의 지도가 추가삽입되어 있다. 이 가운데 염포(鹽浦) 지도에 염포의 동쪽 산정 일대에 사복시(司僕寺)
소재지 : 울산광역시 북구 동해안로 1455-6 (정자동)울산광역시 기념물 제17호지정일 : 1998년 10월 19일시대 : 조선조선시대의 보(堡)는 제진(諸鎭)의 보조적 방어시설로서 최전방에서 적의 동태 감시나 인근주민 대피, 유사시 전투를 하는 소규모 성으로서 중요한 기능을 가지고 있었다. 또한 보 주변에는 봉수가 설치되어 즉시 신호나 포성 같은 소리를 통하여 주변의 주민과 인근 지역 및 내지에 알리는 역할을 하였다.왜구를 막기 위해 1450년부터 처음 목책성으로 설치되었다. 1452년 정분이 다시 목책에서 석성으로 쌓도록 건의
소재지 : 울산 울주군 삼남면 교동리 산90번지울산광역시 기념물 제16호지정일 : 1998년 10월 19일시대 : 조선1998년 10월 19일 울산광역시기념물 제16호로 지정되었다. 울주군 삼남면 교동리 마을 뒤 봉화산이라 불리는 산의 정상에 부로산 봉수대가 있다. 정상 20m의 평지에 1∼3m 높이로 둥근 담을 쌓아 놓은 것이 봉수대의 흔적이다. 특이한 것은 20m 너비의 봉수대 안에 지름 3m의 둥근 웅덩이를 만들어 두었다. 이 봉수대는 양산의 위천 봉수대에서 신호를 받아 두서면의 소산 봉수대로 전달하는 역할을 하였다. 봉화산은
소재지 : 울산광역시 울주군 서생면 나사리 산 36울산광역시 기념물 제15호지정일 : 1998년 10월 19일시대 : 조선조선시대에 만들어진 봉수대이다. 『세종실록』 지리지에 보면, 울산군에는 봉화가 여덟곳 있는데 이길봉화는 북쪽으로는 하산봉화, 남쪽으로는 아이포봉화와 연락한다고 하였다. 『경상도속찬지리지』에 보면, 이길봉화는 동쪽으로는 하산봉화, 북쪽으로는 가리산봉화와 연락한다고 하였다.김정호의 『대동지지(大東地志)』에 보면 이길봉수는 울산부의 남쪽 67리에 있다고 하였다. 『증보문헌비고』 병고 봉수에 의하면 전국 봉수의 주요 간
소재지 : 울산 동구 봉수로 29-2 (화정동)울산광역시 기념물 제14호지정일 : 1998년 10월 19일시대 : 조선1998년 10월 19일 울산광역시기념물 제14호로 지정되었다. 울산광역시 화장장에서 남서쪽으로 약 70m 떨어진 정상부에 위치한다. 지금은 학교 밀집지역 가까이에 있으며, 주변에 넓다란 녹지가 있다. 높이 7.5m, 지름 8m의 석대로, 지름 25m의 원형 토성 안에 있는데 울산만의 관문을 지키는 봉수대 가운데 핵심이 되었다. 정조 때 별장 1인이 봉졸 100명을 배치하여 바다로부터의 침략을 경계하였다. 봉수(烽燧
소재지 : 울산 북구 당사동 230외1울산광역시 기념물 제13호지정일 : 1998년 10월 19일시대 : 조선1998년 10월 19일 울산광역시기념물 제13호로 지정되었다. 《세종실록》과 《동국여지승람》에 기록되어 있는 동해안의 연변봉수(沿邊烽燧) 가운데 간봉의 하나로서 우가산 정상에 있다. 울산의 마지막 연락지점에 해당되는 이 봉수대는 경주 하서지(下西知) 봉수대와 남목천(南木川:현재의 주전) 봉수대로 연결되며 인접한 유포석보(柳浦石堡)의 별망으로도 사용되었다.석축으로 쌓은 방호벽 내부 동쪽으로 치우친 곳에 지름 10m, 높이 3
소재지 : 울산광역시 중구 원유곡길 106 (유곡동, 최제우유허지)울산광역시 기념물 제12호지정일 : 1997년 10월 9일시대 : 구한말최제우는 경주 출신으로 외세의 침략과 봉건사회의 모순에 반대한 종교였던 동학의 교조이다. 가난했던 그는 장사를 하거나 서당에서 글을 가르치면서 생계를 이었고 의술과 점술에도 관심이 많았다. 난세에 참된 도를 구하려 했던 수운은 양산, 울산, 경주 지방에서 수련을 멈추지 않았다.1860년 4월 5일 마침내 결정적인 종교체험을 통해 도를 구하고 그 이듬해부터 포교를 시작하였다. 1863년에는 경상도와
소재지 : 울산 중구 다운동 산147번지 일원울산광역시 기념물 제11호지정일 : 1997년 10월 9일시대 : 청동기 이후 청동기시대부터 통일신라시대에 걸쳐 조성된 대규모 고분군으로 태화강과 척과천 사이의 구릉지대에 형성되어있다. 1993년과 1995년의 발굴조사 결과 청동기시대의 마을과 무덤 위에 다시 삼국시대 및 통일신라시대의 무덤이 더해진 복합유적임을 알게 되었다. 청동기시대 문화층에서는 긴 네모꼴의 움집터들이 확인되었고 청동기시대를 대표하는 토기와 돌촉 등의 석기류가 출토되었다. 삼국시대 초기 유적층에서는 여러 무덤들이 확인
소재지 : 울산 울주군 삼남면 방기리 444-5번지울산광역시 기념물 제10호지정일 : 1997년 10월 9일시대 : 선사알바위는 알 모양의 구멍들이 있는 바위라는 뜻이다. 이 구멍들은 돌 표면을 쪼아서 형태를 잡은 다음 회전마찰을 통해 다듬은 것이다. 주로 고인돌의 덮개돌이나 자연암반에 새겨진다. 성혈은 주로 태양, 여성의 성기 등을 상징하며 이는 풍요와 다산의 의미로 해석된다.청동기시대 농경의 발달은 인구 증가와 동시에 많은 생산량을 필요로 하게 되었고 이것이 다산과 풍요를 기원하는 신앙적 의식의 표현으로 이어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소재지 : 울산광역시 북구 중산동 616-1 외울산광역시 기념물 제9호지정일 : 1997년 10월 9일시대 : 신라1997년 10월 9일 울산광역시기념물 제9호로 지정되었다. 삼한시대부터 신라시대에 걸쳐 형성된 대규모 고분군이다. 1991년 발굴조사 과정에서 널무덤·돌무지덧널무덤·구덩식돌방무덤·굴식 등의 다양한 고분의 구조가 확인되었고 각종 유물이 출토되었다. 확인된 고분의 구조와 출토된 토기는 신라 고분과 토기의 기원을 밝히고 편년을 밝히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뉴비전 아트포럼참여작가 : 김기태·김혜경·박철·박외득·박태영·신금종·
소재지 : 울산 울주군 웅촌면 은현리 산 207-5번지울산광역시 기념물 제8호지정일 : 1997년 10월 9일시대 : 삼국적석총은 선사시대부터 역사시대의 고구려, 백제 초기에 나타나는 묘제의 한가지로 일정한 구역의 지면에 구덩이를 파거나 구덩이 없이 시체를 놓고 그 위에 돌로 쌓은 무덤을 말한다. 고구려의 경우 초기에는 강돌을 주로 사용하였지만 이후 깬 돌을 계단식으로 쌓아올려 무덤을 만들었다.은현리 적석총은 마을 뒤편 야산에 위치하며 경사가 10˚ 이내로 완만한 곳에 축조되어 있다. 사람머리 크기의 자연석으로 쌓아 만든 삼국시대의
소재지 : 울산 울주군 언양읍 송대리 산15번지울산광역시 기념물 제7호지정일 : 1997년 10월 9일시대 : 고려언양현 사람으로 아버지인 김부는 예부시랑을 지냈다. 그는 1216년부터 1219년까지 거란군의 여러 차례 공격을 물리쳐 나라를 어려움에서 구하였다. 당시 13세기 동아시아의 정세는 몽골이 크게 흥기하고 있었으며 거란 역시 몽골의 공격을 받아 1216년 압록강을 건너 고려의 북방지역으로 밀려오게 되었다.이때 김취려는 대장군으로 조양진에서 거란군을 물리쳤고 연주에서도 거란군의 포위를 돌파하였다. 이에 거란군은 청새진을 넘어
소재지 : 울산 남구 성암동 81번지 일원울산광역시 기념물 제6호지정일 : 1997년 10월 9일시대 : 조선개운포는 조선시대 전기부터 수군의 만호가 주둔하였으며 낙동강 이동지역 동남해안을 방어하는 수군의 기지였다. 개운포성은 외황강과 울산만이 만나는 곳에 위치하고 있으며 남북으로 긴 타원형의 성곽이다. 평지와 산지의 특성을 모두 갖춘 평산성으로 성내에 골짜기를 가지고 있는 포곡성이기도 하다. 1459년 동래 부산포의 수영이 개운포로 옮겨와서 1592년까지 개운포는 경상좌도수군절도사영이었다.수영이 동래 해운포로 이전된 이후 개운포에
소재지 : 울산광역시 울주군 알프스온천4길 15 (상북면)울산광역시 기념물 제5호지정일 : 1997년 10월 9일시대 : 신라간월사터는 간월산 동쪽방향으로 위치하고 있으며 폐사된 이후 주위가 대부분 경작지로 이용되었다. 1984년 학술발굴조사가 이루어졌으며 그 뒤 현재의 모습으로 정비되었다. 발굴조사 결과, 건물터와 금당, 축대, 주초석(柱礎石), 장대석(長大石), 2기의 삼층석탑이 확인되었다. 금당지 앞쪽으로 남북으로 위치한 삼층석탑이 자리 잡고 있다. 다른 사찰과 비교하여 금당과 탑 사이의 거리가 좁고 남북으로 위치한 쌍탑의 거
소재지 : 울산 남구 황성동 668-1번지울산광역시 기념물 제4호지정일 : 1997년 10월 9일시대 : 신라처용암은 남구 황성동 세죽마을 해변에서 약 150m 떨어진 바위섬이다. 신라 제49대 헌강왕의 명령에 동해용이 크게 기뻐하여 바다에서 일곱 왕자를 거느리고 왕의 앞에 나타나 춤을 추고 음악을 연주하였다. 그 가운데 한 아들이 왕을 따라 와서 왕의 정사를 도왔는데 그가 처용이다. 왕이 그에게 아름다운 여자를 아내로 삼게 하여 머물러 있도록 하고 급간의 관등을 주었다. 아내의 미모가 반한 역신이 흠모한 나머지 사람으로 변해 밤에
소재지 : 울산 동구 주전동 산 192-2번지 일원울산광역시 기념물 제3호지정일 : 1997년 10월 9일시대 : 고려시대 봉수는 과거 통신수단이 발달하지 못하였던 시대의 군사통신제도이다. 조망이 양호한 산정에서 밤에는 횃불로 낮에는 연기로 국경과 해안의 안위를 중앙에 알리기 위한 목적으로 설치되었다. 봉수제는 1149년에 성립되었다.각 봉수에는 오장과 봉수군(이 교대로 근무하면서 평상시에는 한 홰 적이 나타나면 두 홰 적이 국경에 접근하면 세 홰 적이 국경을 넘어오면 네 홰 적과 접전하면 다섯 홰의 봉수를 올리도록 하였다.1894
소재지 : 울산 울주군 언양읍 서부리 234-6울산광역시 기념물 제2호지정일 : 1997년 10월 9일시대 : 청동기언양 지석묘는 규모로 보아 영남지역 일대에서 가장 큰 바둑판식 고돌이다.지석묘의 상석은 덮개돌이 사다리꼴 모양으로 비스듬히 놓여 있다. 지석은 거대한 편이다.언양읍 서부리 주민들은 이 지석묘를 ‘용바우’라고 부르며 민속 신앙의 대상으로 삼아 치성을 드렸다고 한다. 아직 발굴조사가 이루어지지 않아 지하의 돌방 형태나 출토 유물은 알 수 없지만 보존 상태가 양호하며 덮개돌이 매우 큰 것이 특징이다. 뉴비전 아트포럼참여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