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지왕의 조카이자 진흥왕의 손주인 신라 제26대 진평왕(眞平王)은 허무하게 숨진 태자 동륜(銅輪)의 맏아들이다. 삼국유사에는 정란(政亂)과 황음(荒淫)을 이유로 나라 사람들이 진지왕을 폐위시켰고 진평왕이 하늘로부터 ‘천사옥대(天賜玉帶)’를 받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진평왕이 왕위에 오르기 까지 진흥왕의 두 아들인 형 동륜(銅輪)계와 동생 사륜(舍輪 혹은 금륜 金輪, 진지왕)계의 권력 암투가 있음을 엿보게 하는 대목이다. 화랑세기에도 법흥왕에서 진흥왕. 진지왕 그리고 진평왕까지 의문의 여인 '미실'이 국정을 농단한 기록이
신라 제25대 진지왕(眞智王)은 정복군주 진흥왕의 둘째 아들 사륜(舍輪, 금륜 金輪)으로 삼국통일 위업을 이룬 무열왕계(武烈王系)의 시조이다. 형인 태자 동륜(銅輪)이 일찍 죽어 13살 동생 사륜이 왕위를 이었다고 삼국사기는 전하지만 필사본 화랑세기(花郞世記)는 부왕의 후궁 보명궁주와 밀애를 즐기려 담을 넘다 개에 물려 죽은 과정을 자세히 전한다. 필사본 화랑세기에만 등장하는 의문의 여성 '미실(美室)'이 주축이 돼 태자 동륜을 죽음으로 내몰고 동생 사륜을 왕좌에 앉혔다는 정변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 그러나 태자의 동
큰아버지이자 외할아버지였던 법흥왕(法興王)이 죽자 7세에 왕위에 오른 신라 제24대 진흥왕(眞興王, 삼맥종 三麥宗). 울산 천전리각석과도 인연이 깊은 있는 인물이다. 각석에 새겨진 명문(銘文)에 드러난 원명(原銘) 중 진흥왕의 아버지 '입종갈문왕(법흥왕의 동생 : 사부지갈문왕)'의 이름이 남아 있고 추명(追銘)에는 외할머니 '보도 부인 (保刀夫人)'과 어머니 '지소부인 김씨(只召夫人金氏)' 도 이름을 새겨 서석골(書石谷)에 다녀간 흔적을 남겼다. 눌지 마립간(백제 비유왕 毗有王)기 부터 백
소지 마립간에게 아들이 없어 6촌인 지증왕(智證王 : 지철로왕 智哲老王)이 64세 나이에 왕위를 이었다. '거서간'에서 시작된 신라 시호(諡號)를 '왕'으로 처음 사용한 것이 지증왕 부터이다. 그는 왕이란 시호의 허울뿐인 위엄만 갖춘게 아니었다. 전쟁 위기 마다 주변국 눈치를 살피고 태자를 인질로 보내는 수모를 당하며 군사 원조를 받았던 국가의 무너진 자존심을 세웠다. 그리고 서라벌(徐羅伐), 계림(鷄林), 사로국(斯盧國) 등 혼용 되던 국호도 '신라(新羅)'로 바꾸고 훗날 벌어질 한반도
경주 남산동 남산 기슭 통일전 옆에 작고 아담한 연못과 정자(이요당 二樂堂)가 있다. 특히 한 여름 연잎이 가득한 못 주위를 따라 배롱나무 분홍빛 꽃이 만발하고 솔숲 운치도 좋아 밤낮 없이 사람 발길이 모인다. 정월 대보름날 오곡밥을 지어 먹는 유래가 있는 사금갑 설화(射琴匣 說話)속의 못, 서출지(書出池)이다. 신라 눌지계의 마지막 왕인 신라 제21대 소지(炤知) 마립간 (비처왕 毗處王) 때 북으로 고구려. 말갈 등 외세 침략이 잦아 적국 백제와 동맹을 맺었으나 하늘도 저버렸는지 자연재해 마저 끊이질 않는다. 장창호 작가는 금성에
신라 제18대 실성(實聖) 마립간. 키가 무척 크고 명민하고 지혜로왔다고 한다. 장창호 작가는 실성마립간 편에서 먼저 경주 황남동 대릉원의 합장릉인 황남대총 피장자로 추정되는 내물마립간에 대해 앞서 언급한다. 내물 마립간때 외세의 침입이 잦았다. 백제 근초고왕이 왜와 연합해 자주 침범하자 고구려 광개토왕에 도움을 청한다. 이때 내물 마립간은 조카 실성을 고구려에 볼모로 보냈다. 401년 9년만에 신라로 돌아와 왕위에 올랐으나 내물왕에 대한 원한이 남아 있었다. 결국 왜와 화친을 맺으면서 내물 마립간의 아들 미해왕자(미사흔)를 볼모로
고구려 장수왕으로 부터 보해왕자(복호,卜好)를 구해낸 양산 태수 박제상은 미해왕자(미사흔, 未斯欣)를 구하러 울산 율포(栗浦)에서 출발해 왜국으로 향한다. 박제상은 일본 왜왕에게 눌지왕이 아버지와 형을 죽이고 자신 마저 죽이려해 바다 건너왔다고 속이려하나 왜국의 의심은 풀리지 않았다. 이때 신라에 숨어든 일본 첩자들에게 신라왕이 미사흔과 박제상의 식솔들을 모두 가두었다는 정보가 들어 온다. 박제상의 숨은 계략이었다. 미해왕자를 은밀히 신라로 향하는 배를 띄우고 자신은 왜국에 잡혔다. 왜왕은 "왜 나라의 신하라고 말한다면, 높은 벼슬
신라 제19대 눌지(訥祗) 마립간(麻立干) 때 선대 왕이자 당숙인 실성(實聖) 마립간은 눌지 마립간의 동생 보해(복호,卜好) 왕자를 국교을 맺은 고구려(장수왕)에 볼모로 보내 버렸다. 눌지왕도 잦은 침략을 일삼던 왜국과 화친을 맺으며 미해(미사흔 未斯欣) 마저도 볼모로 잡혀 가버렸다. 이때 양산 태수 박제상이 근심에 젖어 있던 눌지왕을 위해 고구려와 일본에 볼모로 잡혀 있던 두 동생을 구해 내고 자신은 일본 왜왕의 회유에도 불구하고 잔인한 죽음을 맞이한다. 고구려에서 보해왕자를 먼저 구한 박제상은 부인과 딸의 얼굴도 보지 않고 왜국
신라 고분들이 집중적으로 모인 경주 황남동 대릉원에는 가장 큰 황남대총과 천마총 등 전체 23기의 능이 한 곳에 모여있다. 최근 경주 핫플레이스로 떠오른 황리단길과 인접해 많은 관광객들이 찾는 곳이기도 하다. 이 대릉원 정문 입구에서 들어가다 처음 만나는 작은 능이 있는데 김알지의 7대 손으로 김씨 왕 시조(始祖)인 미추(未鄒) 이사금의 능이다. 능 북향에 다른 능에서는 볼수 없는 작은 대숲은 제14대 유례 이사금 때 이서국(경북 청도 고대국가) 군사들이 금성(金城 : 경주)에 쳐들어 오자 댓잎(대나무 잎)을 귀에 꽃은 병사들이 나
신라 전기 마지막 박씨계 왕인 제8대 아달라(阿達羅) 이사금 때 동해 바닷가(포항 영일만 호미곶)에 연오(延烏)와 세오(細烏) 부부가 살았다. 어느날 남편 연오가 바다에서 해초를 따다 어떤 바위에 실려 일본(도기야 都祈野 : 해돋이의 뜻)으로 떠내려 갔다. 그리고 이른 곳의 사람들이 그를 받드니 일본 변방에서 왕이 되었다. 돌아 오지 않는 남편을 찾던 아내 세오는 연오가 벗어 놓은 신발이 있는 바위에 올랐는데 역시 실려 일본에 이르니 남편과 재회 하고 귀비(貴妃)가 되었다. 이후 계림(신라)은 해와 달을 잃어버려 임금이 일관(日官)
탈해왕 때 금성(金城) 서쪽 시림(始林) 수풀에서 닭 울음 소리가 들려 가보니 나뭇가지에 금궤(金櫃)가 걸려 있고 그 속에서 사내아이가 있었다. 이에 아이의 성을 '김(金)'이라 하고 이름은 '어린아이'란 뜻의 '알지(閼智)'라 불렀다. 이후 시림은 계림(鷄林)이라 불렸다. 김알지는 신라로 유입된 알타이계 북방민족(흉노족)이란 속설이 지배적이다. 이주민족 출신이었던 김알지는 6대에 걸쳐 신라에 뿌리 깊게 내리며 7세손 미추(味鄒) 이사금에 이르러 처음 김씨가 왕위에 올랐다. 신라 992년
가야에서 대업에 실패하고 환갑을 넘겨 62세에 신라 4대왕에 오른 석탈해(昔脫解) 이사금은 키가 9자 7치 (약 2m 추정 : 1자 약 20cm 당시 도량 기준 ) 였다고 한다. 또한 용모 뿐만 아니라 매우 지혜로웠다고 한다. 장창호 작가는 바다 너머 나라(용성국) 왕비에게서 알(卵)로 태어난 석탈해는 금관 가야에서 김수로와 힘 겨루기에 패하고 큰 깨닮음을 얻어 신라에 이르자 그 땅의 문화를 받아 들이고 신망을 얻기 위해 애썼다고 추론하고 있다. 석탈해 탄생 설화에는 아진포 포구(경주시 양남면 나아리)에서 바닷 고기를 잡아 임금에게
삼국유사에 노례(弩禮)와 유례(儒禮) 등 두가지 이름으로 기록된 신라 3대 왕 유리(儒理) 이사금(尼師今). 부친 남해왕이 숨지며 "아들. 사위를 막론하고 나이가 많고 현명한 자가 왕위를 이으라"는 유언에 따라 태자 유리는 매제 석탈해에게 왕위를 넘기려 했다. 재상이었던 석탈해는 장인이 숨지자 태자에게 떡을 보내 이(齒)의 숫자가 많은 사람이 임금이 되자고 제안한다. 용성국(龍城國: 다파나국 (多婆那國)에서 너머온 석탈해는 잇금이 유리 태자 보다 적어 왕위를 물려주게 된다. 이에 왕호가 '차차웅'에서 ‘잇금(齒理 치리
박혁거세 거서간의 맏아들 남해(南解) 차차웅(次次雄 : 왕)은 신라 2대 왕위에 올라 '거서간'이란 왕호(王號)를 '차차웅'으로 바꿨다. 신라의 이두(吏讀)문자 표기에 따라 '무(巫)를 의미'하는 '차차웅'은 정치적 지배자 뿐만 아니라 제사장 이라는 두가지 역할을 함께 맡았다고 본다. 이는 남해왕 재위기에 국가적 위기가 유독 많은 것과도 무관하지 않다. 북으로 평양 낙랑(樂浪)이 남쪽 바다에선 왜(倭)의 침입이 잦아 한때 금성(金城) 궁궐 마저 위태로웠다. 또한 자연 재해도
진한 때 서라벌은 6개 촌에 사는 6개 씨족 수장(首長)들이 이끌었다. 어느날 알천 양산(楊山) 언덕에 모인 여섯마을 촌장인 알천 양산촌의 알평, 돌산 고허촌의 소벌리도, 취산 진지촌의 지백호, 무산 대수촌의 구례마 , 금산 가리촌의 지타, 명활 고야촌의 호진 등 6명이 회의를 열어 임금을 추대하고 나라를 세울 것을 논의 했다. 그러다 인근 기슭 우물가 나정(蘿井)에 흰말 한 마리가 나타나 무릅을 꿇고 울며 하늘을 향해 절을 하자 기이하게 여긴 촌장들이 나정에 이르니 자주빛 알만 있었다. 그 알에 한 아이가 태어나 동천 물가에서 아
9세기 중엽 통일신라는 전성기를 맞아 호사스런 생활를 엿보고자 한다. '사철놀이택', 일명 '금입택 (金入宅)'은 '금을 입힌 집' 혹은 '금테를 두른 집' 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이는 삼국을 통일하고 태평천하를 누린 신라 귀족들의 호사스런 생활을 엿볼수 있다. 제49대 헌강왕(憲康王)대 왕경(王京)에는 17만 8,936호(戶) 집이 있었고 그중 금입택이 35채가 있었다고 삼국유사는 전하고 있다. 삼국을 통일한후 국가는 상당한 전리품이 생겼났으며 귀족들도 또한 수많은 토지
신라의 옛땅인 삼국시대 진한. 장창호 작가는 진한의 영토와 역사에 대해 다루면서 또다시 시대를 넘나들며 통일신라 말기의 고운 '최치원'과 중국 후한서 역사서를 남긴 남북조시대 남조 송나라의 역사가 '범엽'을 등장 시켜 두 사람과 나이 든 한 백성이 함께 대화를 나눈다. 진한의 땅에서 나라를 세워 번창했던 신라는 후삼국 시대에 접어들어 외부적으로 후백제 견훤의 군사적 압박에 나라는 쇠락하고 내부적으로는 통일신라 위업이 빛을 잃어가며 골품제 폐단과 왕족.귀족들의 권력 찬탈로 갈등하며 몰락해가는 통일 신라를
해를 숭상했던 한민족은 한반도로 남하해 '삼한'이라는 고대 부족국가에서 형성했다. 장창호 작가는 삼한에 이어서 나라를 건국한 고구려의 고주몽. 가야의 김수로. 신라의 박혁거세 등 삼국시대의 대부분 국가의 시조들이 알에서 태어난 건국 신화 배경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고 있다. 신화에 대한 여러 가지 논란 속에도 장 작가는 시조들의 탄생한 알은 하늘을 숭상했던 민족에게 먼 창공을 넘나들던 '새'의 존재를 하늘의 메신저로 보는 인식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며 삼국유사의 고대국가사에 대해 스토리를 이어간다. 진행 :
주몽은 오이. 마리. 협보 등 세 벗과 동부여를 떠나 졸본으로 향하는 길에 맞닥드린 큰 강 (엄호수)을 힘겹게 건너 마침내 졸본천(흘승골성)에 이른다. 또한 이 여정에서 재사. 무골. 묵거 등 세 현인을 만나 고구려 기틀을 다지는데 큰 힘을 얻는다. 장창호 작가는 고구려 동명성왕이 건국 과정에 벗과 현인들을 만나 고대국가 세우는 여정을 스토리로 풀어 가고 있다. 진행 : 김동균기자 justgo999@ulsanpress.net ▶ 울산신문 오디오클립 'U울림통' 바로가기 ▶ 영상 보기 : 장창호 TV[22] 고구려 3
동부여 금와왕과 대소(帶素) 태자 그리고 여섯 왕자들은 끊임 없이 배 다른 형제 주몽(朱蒙)을 시기하고 견제한다. 끊이지 않는 시련에 주몽은 졸본(卒本)부여로 도망 치다 강에 이르러 강물에 길이 막히고 대소 태자 추적에 쫓기게 되자 강을 향해 하늘의 손자이자 하백의 외손자인 자신을 도와 달라 크게 외친다. 이에 강의 물고기와 자라가 무리를 지어 다리를 만드니 주몽 일행은 쉽게 강물을 건너게 된다. 그리고 기원전 37년 주몽은 압록강 지류인 동가강 유역 비류국(沸流國) 인근에 오뇨산성에 고구려를 세운다. '고구려 2'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