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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나의 스승인 박목월시인이 육영수여사의 개인교양 강좌를 맡아 하게 되고, 여사께서 광복절 행사장에서 북한으로부터 사주를 받은 문세광에게 피격돼 서거한지 꼭 40년이 되는 이번 광복절을 맡게 되니 그때의 그 광경이 유별나게 떠오르고 남다른 감회로 그때를 돌아보게 된다. 그것은 스승이 여사의 일대기를 담은 '육영수 여사란' 책을 펴낼 때 선생님을 옆에서 도우며 현장의 취재 길을 따라 나서고 책의 교정을 보게 됨으로써, 영부인 육영수여사의 생애를 편린이나마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여사의 생가인 충청북도 옥천군 옥천읍 교동리 313번지를 비롯해서 그곳의 죽향 초등학교, 어린이회관, 양지회관 샛방살이를 하던 여러 곳을 돌아보고 국립묘지의 유택과 결혼식을 올렸던 대구의 계산성당 또, 흉탄에 쓰러진 국립극장 등을 돌아보고 난 뒤의 심경은 무어라 형용할 수 없는 비통함을 느끼면서 한 여인의 짧은 생애가 이렇듯 고귀하고 숭고할 수 있을까? 하고 가슴이 뜨겁도록 감동만을 느꼈을 뿐이었다. 그 후, 선생님이 쓴 책을 내고 나서 가장 먼저 나에게 사인과 낙관까지 찍어주셨는데, 거기에다 또 박근혜 대통령께서 지난 대선후보 당시인 2012년 10월 4일 새누리당 울산시당에 오셨던 날 사인을 해주신 책이어서 몇 배나 더한 감동을 느끼며 소중하게 간직하는 책이 되었다.
 
옥천군 옥천읍 교동리 교동댁의 작은 아씨로 고이 자란 육영수 여사가 대통령의 영부인이 되어 돌아가실 때까지의 인생사를 오롯이 담은 이 책은 여사의 일대기인 동시에 가족사이다. 가족사이다 보니 고 박정희대통령과 박근혜대통령의 얘기가 아닐 수 없는 것이다. 그 시절 개화정신이 강했던 여사의 아버지 육종관(陸鍾寬)씨는 여사와 박정희대통령의 결혼을 한사코 반대하셨다. 고이 키운 딸을 전쟁이 한창인 시기에 어찌 군인에게 시집을 보내겠느냐는 것이 반대의 이유였다. 그러나 여사는 1950년 12월 12일 오후 2시 대구 계산성당에서 있은 결혼식장엘 몰래 가방을 들고 집안사람의 눈을 피해 달려갔던 것이다.

온순한 성품의 여사로서는 실로 놀라울 정도의 결단이었던 것이다. 결혼식의 주례를 맡은 허억(許億)선생의 주례사 또한 이채로웠다.  주례는 엄숙한 소리로 신랑 육영수군과 신부 박정희양의 백년가약에 주례를 맞게 되어... 했을 때, 폭소가 쏟아질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한글로 쓴 이름을 읽다보니 정희란 이름이 신부일텐데 잘못 쓰여진 이름으로 알아보았던 모양이었다. 그렇게 이루어 낸 부부가 수많은 격랑을 넘고, 해치고 넘으면서 그날 하루만의 남자, 그날 하루만의 여자인 박정희양의 '하면된다'라는 굳은 의지와 신념으로 헐벗고 굶주리던 나라를 부강하게 이루어 놓았고, 또 한 여자로서 신랑이었던 육영수여사는 내조와 봉사의 길을 걸으며 사람 만나는 일과 사람 돕는 일을 천직인냥 여기면서 가난하고 불우한 자의 손을 잡은 지고지순한 일생을 살다가셨다. 그리고 박정희 대통령이 결혼식장에서 여자가 되었던 까닭으로 딸을 대통령을 만들었을까? 하는 묘한 생각을 해보곤 한다.

 나는 육영수여사의 영구차가 청와대를 떠날 때 영구차에 팔을 짚고 비탄에 빠져있던 박정희대통령의 모습을 지금도 잊지 못하고 있다. 또, 연도에 늘어선 200만의 인파가 호곡하며 애통해 땅을 치던, 아니 우리 모두가 슬픔에 잠겼던 그때를 잊지 못한다. 글을 쓰다보니 북(北)에는 소월(素月)이요 남(南)에는 목월(木月)이라 불리던 스승이 불현 듯 그리워진다.

 제법 추운 겨울 어느 날 선생님은 국립묘지에 안장 된 여사의 묘소를 참배하자고 말씀 하셨다. 이른 아침 동작동 국립묘지로 달려갔더니 먼저 선생님이 와 계셨다. 묘소가에 세워져있던, 모윤숙 시인의 추모시를 내가 옮겨 적고 있을 때, 선생님은 손수건으로 눈물을 닦고 계셨다. 그 모습을 보는 순간 나도 참지 못하고 울먹이고 말았다. 그때 낯모르는 어떤 이가 다가서며 말했다.
 '선생님들도 슬퍼하시는군요?' 그는 서른일곱 살 난 촌부로 충청남도 서천에서 왔다고 했다. '길을 걸어도 자꾸만 손을 잡아주시던 여사가 생각이 나서…'

 그 촌부는 선생님이 확인한 결과 단체와 개인을 합해 1천만명의 참배객이 다녀간 다음 6번째로 찾아온 참배객이었다.
 그 촌부의 심정이 그때 육여사를 추모하는 국민의 감정을 가장 소박하고 진실되게 대변해주는 거울이었을 것이다. 우리 모두가 만세를 불러야 할 광복절을 슬픔의 바다로 만들어버린 천인공노 한 그들의 만행은 아직도 그칠 줄 모르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결코 잊지 못할 것이다. 그날 국민들이 호곡하던 그 비통함을…

 사무쳐 그리운 여인이시여
 돌아서 당신의 삶을 끝내고 가시는 길
 이토록 다버리고 가시는 길에
 비옵니다 꽃보라로 날리신 영이시여
 저 먼 신의 강가에 흰새로 날으시어
 수호하소서 이조국 이겨례를
 -모윤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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