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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태풍으로 반구대암각화가 물 속에 잠겼다. 2년만이다. 울산에 엄청난 상처를 남긴 태풍 차바 이후 한동안 잠잠했던 반구대암각화 침수 소식이다. 지난 2007년의 일이다. 지금부터 11년전이다. 당시 본사 사회부 최인식 기자가 반구대암각화와 천전리각석의 훼손 실태를 고발했다. 퇴적암층인 이곳 지형이 물에 취약하며 침수가 반복되는 현상을 방치하면 치명적이라는 내용이었다.

울산시와 문화재청은 얼마후 공주대연구소와 울산대 등에 의뢰해 지표조사와 훼손 정도를 본격적으로 기록해 나갔다. 세계적인 인류문화의 보물인 바위그림이 발견된지 25년간 방치되다 국보로 지정된 것이 지난 1995년이다. 국보 지정 이후 달라진 것은 펜스를 치고 국보 안내판이 만들어진 것이 고작이다. 체계적인 조사나 연구는 민간에 내맡긴채 남의 집 보물인양 외면했다. 그러다 언론이 떠들기 시작하자 학술조사에 표면정밀 조사 등으로 요란했다. 

바로 그 시점이 불과 11년 전이다. 반구대암각화 보존 문제가 우리 사회에서 본격화 된 시점이다. 발견된지 50년이 다되어가는 반구대암각화지만 초창기에는 이정도로 홀대를 받았다. 몰랐기 때문이다. 무식하면 용감하다고 서울대 학술조사팀은 탁본은 고사하고 망치질과 드릴질까지 감행했다. 국보지정 이전 20여년간 전국 대부분 사학과 학부생과 대학원생들이 학술조사를 명분으로 반구대를 찾아 바위그림 위에 먹칠을 하고 '분탕분탕' 탁본질을 해댔다. 그래도 아무런 제재가 없었다. 그런 당국이 바로 대한민국 문화재청이다.

11년전 울산의 신생언론사인 울산신문이 반구대암각화의 훼손을 세상에 알렸다. 영향력이 작다보니 초창기 파장을 크지 않았지만 중앙언론과 방송매체들이 세계적인 바위그림의 현실을 알리기 시작하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공주대 연구팀은 거푸집을 짓고 최첨단 도구를 사용해 반구대암각화의 훼손정도와 대책을 본격 연구했다. 지금 사용하는 기본 자료는 이 당시 만들어졌다. 울산대 연구팀은 지표조사를 통해 반구대암각화의 암석이 퇴적암층이라는 사실과 풍화정도가 4.5에 이르는 중대한 훼손상태임을 밝혀내기도 했다.

이때부터 여론이 들끓었다. 대한민국 문화유산 기운데 가치평가 1위인 반구대암각화가 어찌 물고문을 당하고 있느냐며 항의가 빗발쳤다. 여론이 비등하면 정치가 손을 내밀기 마련이다. 당장 그 때부터 정치권이 반구대암각화를 이용하기 시작했다. 총리는 취임하면 공식 코스로 반구대암각화를 찾았고 여야 대표나 명망가들은 온갖 명분을 대며 암각화를 다녀갔다.

훼손을 고발하고 이를 여론화한 언론,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반구대암각화의 가치를 세상에 알린 학자들의노력이 없었다면 지금도 반구대암각화는 자맥질을 반복한채 우리 문화유산의 사생아 취급을 받아왔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하지만 암각화의 묵은 이끼를 걷어내고 물 속에서 울음을 토해내는 고래를 건져올리기 시작한 것은 바로 울산시민들이었다. 당장 암각화를 물에서 건져 올리고 영구적인 보존의 필요성이 절실했지만 문제는 이미 건설된 사연댐이었다. 물을 빼면 암각화가 살지만 시민들의 식수문제가 난감했다.

그래서 나온 것이 생태제방이었고 물길 변경 등의 안이었다. 고민의 결과였지만 일언지하에 거절당했다. 모욕적인 언사도 들어야 했다. 대규모 토목공사 운운하며 사실을 왜곡하는 이도 있었다. 하지만 이 모두를 감수하면서 문제의 본질에 집중했던 것은 역시 반구대암각화가 가진 본질적인 가치 때문이었다. 문화에 대한 의식이 전무한 울산시민들이라든지 세계적인 문화유산을 물고문 시키는 이해 안되는 사람들이라는 비난도 그래서 감수할 수 있었다. 그런데 10년 세월동안 변한게 없다. 이번에는 생태제방도 접고 맑은물 공급을 전제로 수위조절에 나섰지만 이마저도 오리무중이다. 

지난 2010년 울산신문은 전국언론 최초로 지역신문 발전기금의 지원을 받아 반구대암각화 보존을 위한 기획취재에 들어갔다. 지금 여러 언론에 등장하는 포르투갈 포즈코아 암각화의 보존실태를 제대로 살펴본 것이 바로 이 때다. 당시 포즈코아암각화 박물관측은 한국언론 최초의 취재라며 울산신문 취재팀을 반겼다. 포즈코아 암각화 박물관 책임자인 페르난도 안토니오 가르시아 디아즈씨는 포즈코아암각화의 보존책을 설명하며 댐 건설 전에 발견된 자신들과 다른 상황인 반구대암각화의 보존은 새로운 방법이 필요하다는 주문을 하기도 했다. 

문제는 이제 더 이상 반구대암각화 보존을 탁상공론화 할 때가 아니라는 점이다. 11년 숙성기간도 종지부를 찍어야 한다. 우리가 지금부터 집중해야 할 부분은 반구대암각화의 온전한 보존과 그 가치를 세계에 알리는 일이다. 반구대암각화는 무엇보다 인류 문화의 뿌리를 웅변하는 증거물이다. 지난 1971년 반구대암각화 발견 이후 많은 학자들이 암각화의 역사성과 상징성, 예술적 가치와 사료적 가치에 대해 연구해 왔다. 주목해야 할 것은 반구대암각화를 기점으로 시작되는 인류사의 확장이다.

반구대암각화 보존과 함께 문화재 당국은 반구대암각화를 중심에 두고 한민족의 이동경로와 고대 인류사의 재구성 작업에 박차를 가해야 한다. 그 단초는 무수히 많다. 알타이 지방을 기점으로 시베리아와 극동에 이르는 수렵문화의 유사성을 연구해야 한다. 그 하나의 단초가 시베리아 우르쿠츠크 인근에는 시스키스키 암각화다. 반구대암각화만큼 시련과 고초를 겪은 이 암각화는 반구대암각화를 새긴 사람들의 뿌리를 이야기해 준다. 사실 이 암각화 이외에도 바이칼 인근 지역은 우리 민족과 많은 유사성을 갖고 있다. 

시스키스키 암각화는 불행하게도 1948년에 완성된 앙가라강 댐으로 인해 대부분 수몰됐다. 사슴과 사냥술을 묘사한 이 암각화는 반구대암각화의 원형이라 해도 될 만큼 많은 유사성을 갖고 있다. 지난 2008년 내몽골 적봉에서 한국형 암각화가 발견됐다. 고려대 한국고대사 연구팀이 발견한 이 암각화는 바이칼에서 시작된 암각화의 흔적이 한반도 동쪽 끝 울산으로 연결되는 결정적 단서가 됐다. 내몽골 암각화는 천전리각석에 새겨진 방패형 검파형 암각화의 기원을 찾는 중요한 증거물이 됐다. 바이칼과 내몽골, 요하문명지와 한반도로 이어지는 고대인류의 이동이 바위그림으로 뚜렷한 족적을 남긴 셈이다.

한민족 주류의 기원이 북방에 있다는 설은 가설 단계를 넘어 인류학적으로나 문명사적으로 검증이 되는 과정에 있다. 오늘날 한반도를 중심으로 살고 있는 한민족은 혈통적으로 몽골로이드계 인종에 속한다. 몽골로이드계 인종이란 오늘날 인류의 직계조상으로 간주되는 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가 출현한 후, 지금으로부터 10만년~5만년전부터 이 땅에 살았던 사람들로 학계에서는 추정한다. 최초의 원주지를 떠나 오늘날 바이칼호를 축으로 그 연안과 동부지역에 자리잡은 인종집단이 그들이다. 바이칼에 터를 잡은 민족의 일단이 내몽골과 요하를 거쳐 한반도로 이동했고 그 종착지가 울산이었다는 증거가 바로 반구대암각화다.

세계 동물학회에서는 인류와 고래의 관계를 연구할 때 그 출발로 반구대암각화를 제시한다. 자신들이 고래잡이의 최초 인류라던 노르웨이 사람들이 반구대암각화가 발견된 이후 입을 다물고 있다. 학자들은 인류가 기원전 6000년경부터 고래를 잡았고 그 증거가 울산의 반구대암각화에 있다고 자신 있게 주장한다. 수만년 전 바이칼을 무대로 사슴사냥으로 문명을 일으킨 몽골로이드인들은 '따뜻한 남쪽, 풍요의 땅'을 찾아 해 뜨는 땅, 동쪽으로 이동했고 그 이동의 종착지로 강과 바다가 만나는 울산을 택했다. 그들은 울산에서 해양문화권의 한 무리와 공동체를 이뤄 대륙과 해양의 문화를 융합했다. 그 새로운 문화의 증거가 바위그림으로 남았고 해가 떨어지는 시간 샤먼의 주술에 따라 다음날 아침, 동트는 바다에서 큰 고래 한 마리 사냥할 수 있기를 주문처럼 외웠다.

문제는 현장에 있다. 반구대암각화가 위치한 울산시 울주군 언양읍 대곡리는 사연댐이라는 인공구조물도 있지만 선사이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원시 가마터부터 각석과 누각은 물론 서원과 고가가 고스란히 남아 있는 살아 있는 역사박물관이다. 바로 여기서 울산의 문화적 토양을 일구고 울산이 세계 문명의 한 축이었음을 선포해 나가는 작업이 이뤄져야 한다. 4차산업이 요란하지만 울산의 미래 먹거리는 바로 여기에 있다. 하지만 잘 모른다. 반구대암각화를 제대로 셋팅하면 얼마나 엄청난 문화관광 자산이 되는지를 모르니 지금도 물에 잠긴채 방치하고 갑론을박만 주고받고 있다. 딱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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