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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제 징용 판결이 사법적 감성주의라는 비판으로 물들고 있지만 짓밟힌 역사는 어떤 판결로도 위로가 되지 않는 법이다. 지나간 역사는 한 개인이든 국가든 후대에 연결고리 이상의 의미를 준다. 일본 정부와 언론이 우리 사법부의 판결을 두고 과잉반응을 하는 이유는 부끄러움 때문이다.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르지만 감추려니 과장된 목청과 몸짓이 나올 수밖에 없다. 아베의 추종자들이 매일같이 우리를 향해 무거운 단어를 동원하며 '가만 있지 않겠다'고 외치는 것은 바로 그런 심리에 뿌리를 두고 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울산도 일제강점기와 여러 가지로 얽혀 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지금의 산업수도를 위한 밑그림을 일제가 그려놓았다는 사실이다. 일제강점기 당시 일제는 울산을 인구 50만 명 규모의 공업도시로 만들 계획을 세웠다. 조선축항주식회사 대표 이케다 사다오(池田佐忠)가 울산공단을 만드는 데에 앞장섰다. 울산의 지형조건이 공단으로 개발하기에는 최적이라고 봤다.

대륙침략의 야심을 담은 거대한 개발계획은 일제의 패전으로 물거품이 됐고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수립하던 박정희 군사정권은 일제가 남긴 개발계획 문서를 입수했다. 군사정권 당시 국토건설청은 일제의 문서를 토대로 울산이 공단 입지에 최적지란 판단을 내리고 박정희에 보고했다. 그 순간부터 울산은 대한민국 근대화의 선봉이자 산업수도로 우뚝섰다. 

그 역사의 고리 때문인지 울산은 유독 일본에서 골수 우익의 본향으로 유명한 도시들과 친선관계를 맺어왔다. 하기시와 구마모토, 그리고 비젠시 등이다. 문제는 이들 도시가 일본의 골수 우익 도시라는 사실이 아니라 그런 내용을 제대로 알고 우호협력이나 자매결연을 한 것인지 조차 모호하다는 사실이다. 

울산이 얼마나 도시의 뿌리에 대한 의식이 없는 도시인지는 여러 가지 사실로 증명된다. 도시의 역사와 정체성은 그 도시에 삶의 뿌리를 내리고 사는 이들의 자존심이다. 도시의 리더, 지식인들이 문제 의식을 가지지 못하면 그 도시는 뿌리없는 도시, 천박한 하류문화가 흐르는 이상한 도시가 돼 버린다. 그 대표적인 사실이 몇 년 전 열린 울산박물관 개관기념 기획전시다. 울산박물관은 일제강점기 시절의 울산을 담은 '75년만의 귀향, 1936년 울산 달리' 특별전을 열었다. 일본 국립민족학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울산 자료 78점을 대여해 전시한 것으로 그 자체로 의미 있는 전시였다. 문제는 이 특별전의 바탕이었다. 

울산의 과거 기록은 1930년대 울산을 조사한 동경제국대학 조사팀의 조사 자료가 남아 있기에 가능했다. 좀 더 들어가 보면 이 자료는 불순한 의도를 가진 전리품이었다. 일제강점기 때 제국주의자들의 하수인이었던 동경제국대는 조선인들의 삶과 문화를 광활하게 수집했다. 당시 조선총독부가 지휘한 주민생활 조사는 울산만이 아니라 전국 주요거점에서 제국주의자들의 주도면밀한 계획아래 진행됐다.

조사의 목적은 당연히 식민지로 강제 병합한 조선반도는 물론 조선인들의 골수까지 내선일체화 하겠다는 프로그램의 일부였다. 이른바 식민지 정책의 3단계 사업으로 조선민족을 철저하게 일본의 종으로 만들기 위해 벌인 제국주의의 야욕이 유산처럼 남았고 그 전리품이 울산사람들에게 아무런 반성없이 전시됐다. 이런 따위의 기획 전시는 얄팍한 지식과 눈길 끄는 이벤트에 집착하는 관리들의 합작에 지나지 않지만 일본의 도시들과 자매결연을 체결하고 우호협력을 만들어가는 문제는 전혀 다른 이야기다. 친선관계를 맺거나 유지하는 과정은 단순한 과거의 연결고리를 소환하는 작업이 아니라 그 도시와 우리 고장의 역사적 맥락을 살피는 작업부터 시작돼야 마땅하다. 하지만 울산의 우호협력도시나 자매결연 도시는 아무리 따져보고 짚어봐도 그런 고민의 흔적이 없어 보인다. 

지난 2010년으로 기억한다. 울산시가 일본 구마모토(熊本)시와 우호협력도시 협정을 체결했다. 우호협력의 종잇장에 서명을 하고 광범위한 교류를 다짐했다. 행정은 물론 의회와 민간 부문에서까지 이미 활발한 교류가 있으니 우호협력도시 협정은 당연하다는 뉴스도 나왔다. 그 후로 다시 세월이 흘렀고 엄청난 교류가 있었다. 어린 학생들부터 원로문인들까지 해마다 벚꽃이 필 때면 구마모토로 오가는 발길이 '사쿠라' 꽃잎처럼 번잡스러웠다.

구마모토. 울산과 인연이 깊은 도시다. 임진왜란 당시 왜장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가 조선에서 퇴각하면서 많은 울산 사람을 끌고 가 지금까지 그곳에 울산마찌(蔚山町)라는 마을이 남아있을 정도다. 남아 있는 이름만큼 울산과 구마모토는 옛친구를 만난 듯 급속도로 가까워졌다. 교류를 할 때마다 두 도시의 대표들은 '화해'를 이야기 하고 '과거를 뛰어넘는 미래'를 이야기 했다. 왜 뛰어넘어야 하고 왜 화해해야 하는지는 아무도 말하지 않고 화해의 전제는 무엇인지도 이야기하지 않았다.

구마모토는 가토 기요마사를 빼고 이야기가 안되는 도시다. 가토 기요마사, 가등청정(加藤淸正)이다. 경상도 민요 '쾌지나 칭칭나네'가 '쾌재라, 청정이 도망간다'에서 유래했을 정도로 조일전쟁 7년간 울산을 본거지로 조선인 학살·납치 강간을 자행한 원조 사무라이다. 가토가 울산을 지배할 당시, 정확한 기록은 남아 있지 않지만 다양한 사료를 유추해보면 폭압의 정도가 추잡하고 악랄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 가토가 조일전쟁 하사품으로 받은 땅이 구마모토다.

어리석은 한 언론사 사장이 울산마찌라는 친근한 이름 하나에 반해 울산시장을 꼬득여 구마모토와 울산을 친구로 만들었다는 이야기는 2010년의 일이다. 가토의 발바닥을 닦고 왜놈의 오물을 치우는 종살이로 끌려간 옛 울산인들이 무더기로 모여살던 동네이름을 가토는 울산마찌로 정해 울타리 밖으로 도망치지 못하게 했다. 그 왜장 가토의 구마모토는 사쿠라와 울산동백, 그리고 끌려간 울산 사람들이 공존하는 묘한 공간이다. 

좀 더 먼 이야기를 해보자. 바로 일본의 시골마을 하기 이야기다. 울산은 놀랍게도 지난 1968년 이 시골마을과 자매의 연을 맺었다. 울산시와 하기시는 지난 1968년 10월부터 자매도시협정 체결 이후 경제, 스포츠, 문화, 청소년 교류 등 매년 다양한 교류를 해오고 있다. 후지미치 켄지 하기시장은 지난 2016년에 울산을 방문해, 울산광역시 승격 20주년 기념행사에 참석한 바 있다. 

하기는 어떤 곳인가. 안중근 장군이 하얼빈에서 저격한 이토히로부미와 그의 정치적 동지들인 이노우에, 미우라 등 조선 침략의 장본인과 명성황후 시해의 주범들이 자라고 야욕을 키운 땅이다. 왜 하필 그런 도시와 울산이 형제의 연을 맺었는지를 50년이 지난 지금 이야기 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냐고 할지모르지만 그렇게 간단한 이야기는 아니다. 하기든 구마모토건 시작이 잘못된 교류라면 지금이라도 다시 생각해야 한다. 일본이 과거사에 대해 한치의 반성이나 인정이 없는 상황에서 문화교류 운운하며 그들의 대표가 오가고 우리 울산의 청소년들이 방문단을 꾸리는 일은 우리 스스로가 부끄러운 일이다.

어디 하기 뿐인가. 코무덤으로 유명한 일본의 비젠시도 울산과 친구가 되어 있다. 울산 동구는 지난 2015년 일본 오카야마현 비젠시와 우호협력도시 협정을 체결했다. 비젠에는 동구 방어진항에서 유년시절을 보내고 일본으로 귀환한 일본인들과 그 후손들의 추억이 연결의 고리로 남아 있었다. 문제는 동구가 우호협력도시 협정을 체결한 비젠시의 역사다. 비젠시에는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당시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전공(전리품)의 기준으로 삼기 위해 조선인들의 코를 베어오게 한 능욕의 역사가 남아 있는 곳이다. 

울산 동구 사람들이 왜 그런 역사를 가진 비젠시와 우호협정을 맺어야하는지, 그리고 그들은 울산에서, 아니 대한민국에서 지나간 시절 자신의 조상들이 행한 역겹고 졸렬하고 잔악스런 과거를 어떻게 사죄할 것인지를 정직하게 먼저 이야기 하는 것이 순서라는 이야기다. 앞뒤 좌우를 따지지 않고 그냥 이대로 흘러가는 것은 역사에 또다른 죄를 짓는 일이다. 더 이상 부끄럽지 않은 울산인이 되기 위해서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라는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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