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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말 온 나라가 혜경궁 김씨로 도배됐다. 엊그제 수능을 치른 고3 수험생들은 한중록의 글쓴이로 알았던 혜경궁 홍씨와 헷갈렸고 화성행차의 장엄한 행렬을 기억하는 이들은 정조대왕의 어머니와 혜경궁의 권력욕을 되씹기도 했다. 

알다시피 혜경궁 김씨는 역사의 어디에도 없다. 정답은 혜경궁 홍씨인데 누군가 SNS 계정의 이름을 혜경궁 김씨로 사용했다. 혜경궁 홍씨는 사도세자의 부인이며, 정조의 생모이다.  한중록의 작가로 유명하지만, 정작 그녀의 일생을 재구성하기란 쉽지 않다. 남편이 뒤주에 갇혀 죽임을 당하고 아들을 죽은 시숙의 양자로 뺏긴 기구한 운명의 여인이다. 그 한과 눈물을 녹여 한중록을 엮었다. 

비운의 여성에서 대왕 정조를 낳은 훌륭한 어머니로 반전의 삶을 산 혜경궁 홍씨는 감옥에 있는 이윤택의 기술로 권력 지향적인 냉혹한 여성으로 바뀌기도 했지만 여전히 우리에겐 구중궁궐의 권력다툼에 희생당한 여인의 이미지가 강하다. 

그런 혜경궁이 김씨로 둔갑해 주말 내내 아니 오늘도 화제의 중심이다. 경찰이 이재명 경기지사의 아내 김혜경씨를 SNS 상에서 화제가 된'혜경궁 김씨'의 계정주로 결론지었다. 이와 함께 김씨를 공직선거법 위반(허위사실 공표 등) 및 명예훼손 등의 혐의로 송치를 결정했다. 

이 사건은 더불어민주당 경기지사 경선 후보였던 전해철 의원이 지난 4월 트위터 계정주를 고발하면서 시작됐다. 경찰에 따르면 '혜경궁 김씨' 트위터 계정으로 드러난 소유주의 정보는 '경기도 성남에 거주하는 여성이며 군대에 간 아들이 있고 S대에서 음악을 전공했다'는 것이었다. 계정 소유주와 김혜경 씨의 휴대전화 뒷자리가 44이고 이메일 아이디도 유사했다. 또한 '혜경궁 김씨'의 트위터 계정 글은 안드로이드에서 작성됐다 아이폰으로 바뀌었다. 이 시기에 김혜경 씨도 안드로이드폰에서 아이폰으로 바꾼 것으로 알려졌다. 

이밖에도 이재명 지사가 트위터에 5·18 광주민주화운동 희생자 가족 사진을 올린 것이 이튿날 혜경궁 김씨 트위터에 올라갔고 이것을 캡처한 사진이 1분도 안 돼 김혜경씨의 카카오스토리에 올라갔다. 경찰은 김혜경씨가 혐의를 부인하고 있고 법적공방이 예상됨에 따라 세부적인 판단 결과는 언론에 공개하지 않기로 한 것으로 전해졌다.

경찰의 수사 발표가 나오자 이재명측은 즉각 반박했다. 이 지사는 자신의 페이스북을 통해 "지난 8일 페이스북에 올린 '불행한 예측'이 현실이 됐다. 기소의견 송치는 이미 정해진 것이었다"면서 "국가권력 행사는 공정해야 하고, 경찰은 정치가 아니라 진실에 접근하는 수사를 해야 한다. 그러나 이재명 부부를 수사하는 경찰은 정치를 했다"고 비난했다. 그러면서 지록위마를 가져왔다. 이 지사는 "지록위마, 사슴을 말이라고 잠시 속일 수 있어도 사슴은 그저 사슴일 뿐이다"라고 한 뒤 "아무리 흔들어도 도정은 흔들리지 않을 것이다. 도정에 충실히 전념하겠다"고 덧붙였다.

'혜경궁 김씨' 논란은 이재명 지사의 여배우 사건이나 '점' 논란만큼 화제가 된 이야기다. 계정의 시작부터 진행 상황과 고발과 수사까지 세간의 화제가 됐다. 도대체 이 계정에는 무슨 이야기가 담겼을까. 문제의 계정은 '정의를 위하여'라는 문패를 달고 지난 2013년부터 사이버 정치를 시작한 것으로 알려졌다. 

처음 공격 대상으로 삼은 것은 이 지사의 친형인 고 이재선씨였다. 이 지사가 성남시장이던 시절 형 재선 씨와 사이가 틀어지자 이 계정은 재선씨를 겨냥한 각종 비난 글을 올리며 SNS상에서 종횡무진으로 활동했다. 

당시 계정에 올라와 있던 글은 "왜 자꾸만 새누리당 국회의원 선거운동 문자 보내고 난리야? 정신병자가 운동해 주면 잘도 되겠네" "이재선? 제정신 아니죠?" "정신병원에 강제입원 시킨 건 이재선의 처와 딸인데 이 시장에게 덮어씌우는 이유는?" "이재선은 왜 이 시장의 공무원 인사에 개입하려 했는지 밝혀라" 등의 글이었다. 문제의 계정은 당시 이재명 시장을 비판하는 다른 네티즌들에게도 가차 없이 말 폭탄을 날리고 이 시장에게는 꾸준히 지지의 글을 보내는 친위부대 성격이 강했다.

이 당시만 해도 계정이 문제가 되진 않았다. 문제는 박근혜 탄핵을 전후하며 이재명 시장이 민주당 대선 경선 후보로 나서면서부터였다. 당시 이재명 후보가 문재인 후보와 견줄만큼 가파르게 지지율이 오르자 계정의 활동도 뜨거워졌다.

계정의 내용도 갈수록 거칠었다. "문재인이나 와이프나…생각이 없어요. 생각이…" "문재인 대통령이 대한민국의 소원이냐? 미친 달레반들" "걱정마 이재명 지지율이 절대 문어벙이한테는 안 갈 테니" "문재인이 아들도 특혜준 건? 정유라네" 등 문재인 후보를 집중 공격했다. 또 "노무현시체 뺏기지 않으려는 눈물…가상합니다" "문 후보 대통령 되면 꼬옥 노무현처럼 될 거니까 그 꼴 보자구요" 등 노무현 전 대통령을 비하하는 글마저 서슴지 않았다. 

계정의 폭주는 여기서그치지 않았다. 지난 지방 선거를 앞두고는 당내 경쟁자이던 최성 전 고양시장을 향해 "문돗개" "문따까리"라고 조롱, 전해철 의원을 겨냥해서는 "자한당과 손잡은 전해철은 어떻고요? 전해철 때문에 경기 선거판이 아주 똥물이 됐는데. 이래놓고 경선 떨어지면 태연하게 여의도 갈거면서"라고 비난하는 등 이 지사와 상대하는 인물이라면 당 내외를 가리지 않고 무차별 공격했다. 

이때 네티즌들이 댓글로 이재명 지사의 부인 김혜경씨와 연결 지으면서 문제의 계정 '정의를 위하여'는 '혜경궁 김씨'로 격을 달리한 채 유명세를 탔다. 사건의 파장이 커지자 정치권에서는 이 사건을 안희정과 이재명, 박원순으로 이어지는 정적 제거라는 이야기까지 떠돌고 있다. 

더불어 민주당 지지자들도 SNS상에 "노무현, 문재인 두 대통령님을 모욕한 혜경궁김씨의 남편 이재명을 비호하는 이해찬 당대표와 표창원, 김현 등의 세력들 그리고 이 정치인들을 쉴드 치는 당원들… 정신 차리길 바람. 현재 민주당 최대의 적폐는 아닌 걸 아니라고 말하지 않는 이해찬 당대표임"이라거나 "이해찬은 혜경궁 김씨사건(이재명) 이상하게 처리하면 당대표 크리스마스까지도 못할듯" 등 내홍 조짐의 글들이 실시간으로 올리고 있다. 

그런데 이 지점에서 가만히 생각해볼 문제가 있다. 많은 국민들이 이 문제를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지는 또다른 문제다. 

사실 국민의 대다수는 혜경궁 김씨가 누군지, 어떤 남자의 몸에 점이 있는지 관심이 없다. 정치인의 거짓말에 익숙한 국민이기에 어떤 이야기도 있는 그대로를 팩트로 받아들이지 않는게 대한민국이다. 그런 점에서 지록위마로 손가락의 방향을 바꿔보려하는 이재명 지사와 그의 손가락에 이미 시선을 주지 않은 문재인 대통령 지지자들의 공방이 오히려 주목거리일 수 있다. 

어찌 됐건 민주당은 묘하게 엮였다. 이재명의 입장을 두둔하자니 '혜경궁 김씨'의 계정에 도사린 글들이 비수가 되고 모른척하자니 낯이 벌겋게 달아오른다. 

문재앙이거나 문어벙이거나 아들 취업비리까지는 그렇다해도 노무현 시체 운운한 것이나 세월호에 모욕을 가한 발언들은 나가도 너무 나간 문장이다. 이대로 두면 정당의 존립마저 흔들 늑대소년 우화로 번질 수 있다. 그렇다고 이 참에 현직 단체장을 찍어낼 수도 없는 노릇이다. 그래서 나온 묘책이 표창원의 입을 빌어 "사실이라면 책임져라"는 원론이다. 표창원의 말 때문에 민주당의 난감한 상황이 더 적나라해졌다.   

문제는 이런 따위의 공방이 아니라 이재명 부부의 태도다. 성남시장 시절부터 화제의 주인공을 자처하며 언론의 화제를 모았던 사람이 이재명 지사다. 바로 그를 오늘의 대권주자로 키운 것은 언론과 방송의 합작이다. 그래서 그는 당당하게 말한다. 사슴을 두고 왜 말이라고 부르는가, 듣는 사슴 기분 나쁘다고. 그런데 이상한 것은 이제 사람들이 그가 지목하는 손가락에 관심이 없어 보인다는 점이다. 그저 그와 또다른 그들을 바라보는 여론은 거짓말이 말잔치를 하는 그저그런 정치판의 이야기가 아니냐고 냉소를 보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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