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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영 편집이사 겸 국장
김진영 편집이사 겸 국장

지난 연말 울산의 오피니언 리더들과 여러 차례 만날 기회가 있었다. 지방 정권의 교체로 오피니언 리더들의 면면도 많이 달라졌다. 지난 20여년간 국외자이거나 변방에 있던 인물들이 지난해 지방선거 이후 울산의 주류사회에 입성했다. 선출직도 있고 임명직도 있지만 대체로 새로운 의욕으로 울산을 바꿔보려는 의지는 여전했다. 문제는 일부 인사들이었다. 울산에서 제법 오랜 시간을 보낸 사람들이 자신이 살고 있는 울산에 대해 가진 생각은 놀라움 그 자체였다. 지난해 지방 선거 이후 울산의 새로운 오피니언 리더가 된 한 인사는 공식석상에서 울산을 비하했다. 그의 주장을 그대로 옮기자면 이렇다. "울산은 급조된 도시라서 역사도 없고 문화도 없는 것 같아요. 뜨네기 도시에다 뭐든 주먹구구식으로 만들어 촌스럽기 만하고..." 공식 석상에서 이런 식의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뱉어 내는 인사가 울산의 오피니언 리더 중의 하나라니 놀라왔다. 그 때의 충격은 아직 남아 있지만 뭐 그리 새삼스러운 이야기는 아니었다.
울산을 새로운 부임지로 찾아오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울산에 대해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를 범한다. 대표적인 것이 공해도시 이미지다. 울산에 들어서는 순간 숨막히는 공해가 자신을 압도하리라는 상상부터 사방이 굴뚝에 둘러싸여 밤마다 불기둥이 펼쳐지리라는 망상까지 자신이 가진 모든 자료를 동원해 망상의 세계를 펼친다. 두 번째 오류가 급조된 도시라는 편견이다. 미안하지만 울산은 급조된 도시가 아니다. 박정희 군사정권의 '코리안드림'을 위해 희생당한 도시이긴 하지만 그 때부터 급조된 마구잡이식 도시는 아니라는 말이다.

문제는 이런 오류를 잠시 울산을 다녀가는 임명직 공공기관장이나 기업의 공장장이 아니라 지역의 리더라는 인사가 하고 있다는 점이다. 적어도 지역의 미래를 설계해 나가는 사람들이 지역에 대한 공부가 그 정도라면 심각한 일이다. 더 큰 문제는 이런 사람들일수록 자신이 가진 고정관념을 쉽게 바꿀줄 모른다는 점이다. 모르면 배우면 되는 것이지만 모른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고 자신이 알고 있고 안다고 생각하는 것이 사실인 것처럼 아집과 독선을 이어간다는 점이 걱정스럽다. 아니 지역 주민들에게는 재앙 수준이다.
본보는 올해의 아젠다로 '사람이 모이는 도시, 울산을 만듭시다'를 내 걸었다. 사람이 모이는 도시는 머물고 싶고 살고 싶은 도시라야 가능하다. 그 근저에 깔린 것은 무엇보다 자신이 살고 있는 도시에 대한 자긍심이다.
법고창신(法古創新)이라는 사자성어는 그래서 유용하다. 법고창신은 온고지신과 비슷하지만 창조의 의미에 방점이 있다. 울산의 오래된 인문학적 정신과 문화적 자양분을 제대로 이해하고 여기에 상상력을 더해서 보다 새로운 것을 창조하자는 뜻이다. 한 때 잘나가던 도시, 부자도시였던 울산은 이제 사람이 떠나는 도시가 된지 오래다. 위기의 세상이 오면 그 자리에서 자신과 마주하고 지나간 시간을 되돌아보는 것이 지혜다. 새로운 것은 완전한 무(無)에서 만들어지지 않는다. 법고(法古)하고 또 법고(法古)해야 새로움이 보이기 마련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울산의 오래된 것과 제대로 마주해야 한다. 울산은 오래된 장소성을 가진 도시다. 울산이라는 이름을 얻은 것은 조선 3대 임금 태종 3년 1413년이지만 울산의 출발은 삼한 때 소읍국 우시산국에서 비롯됐다. 지금 울주군 웅촌면과 양산시 웅상(서창) 일대가 영역이었다. 중심지는 웅촌면 검단. 옛날 지명에서는 '시(尸)'를 'ㄹ'로 표기하여 썼다고 한다. '우시'는 '울'이 되고, '우시산'은 '울산'이 되어, 그래서 울산이라는 이름이 만들어졌다. 울산이라는 이름을 기념하기 위해 지난 2013년 울산 정명 600년을 대대적으로 이야기했지만 오피니언 리더들은 외면했다. 뒤늦게 급조한 행사는 그냥 이벤트성 행사였을 뿐 왜 정명 600년을 기념해야 하는지를 제대로 인식하지 못했다. 지난해는 울주군이 울주 정명 1,000년을 기념하는 대대적인 행사를 벌이면서 울산 속에서도 울주가 맏형인 냥 우쭐해 하기도 했다. 하기야 그 전에 지역의 리더였던 사람은 울주라는 명칭을 울산과 함께 쓸 수 없다며 독립선언처럼 외치다 문화행사 하나를 다른 동네 행사처럼 만들어버리기도 했다. 하지만 울주는 울산과 하나의 지역으로 분리할 수 있는 문화적 변별력을 가진 곳이 아니다. 다만 고려와 조선조 때 각종 제도를 바꾸면서 여러 고을의 행정명칭도 고쳤을 뿐이다.

울주라는 이름은 고려 8대 임금 현종 9년 1018년에 생겼다. 그 전에는 흥려부(흥례부)로 불렸다. 고려 태조는 삼국을 통일한 뒤 울산의 여러 군현을 합쳐 흥려부라 하고 호족 박윤웅에게 지역을 다스리게 했다. 언양 일대는 별도의 행정구역으로 나눠져 있다 울주라는 이름 아래 통합됐다. 그러다가 조선 태종 때 '울주(蔚州)'는 지역명을 '울산(蔚山)'바꿨다. 우시산국부터 계변성과 학성, 그리고 흥려부에서 울주까지 다양했던 지명은 조선조에 와서 울산으로 정리된 셈이다. 결국 울산과 울주는 호칭만 다를 뿐 같은 지역이다. 그럼에도 대다수 시민은 울산과 울주가 동떨어진 것으로 여기고 있다. 울주군이 울주라는 이름을 쓰고 있는 점을 들어 울주군 영역으로만 한정지어 인식하고 있다. 심지어 상당수 울주군민은 울산광역시라는 한 울타리 안에 있으면서도 울주라는 이름이 마치 울산과는 독립된 별개의 역사성을 가진 상위의 것인 양 우월의식까지 드러내고 있다. 그 모두가 착오다. 울산이 바로 울주요, 울주가 바로 울산이다. 울주라는 이름이 더 큰 울산을 이르는 말이다. 통상 주(州) 자가 붙는 곳이 큰 고을을 이야기 할 때 사용했다. 조선 태종 때 그 '주'자를 뗀 것은 중앙정부가 울산을 하찮게 여긴 결과였다. 울산으로서는 섭섭하고 억울한 처사였다. 고려조 때 왕실의 외척이 살았던 땅으로 그나마 명맥을 유지했던 울산은 조선조에서 왜구가 끊임없이 노략질을 하는 변방으로 유배의 땅이 됐다.
신라 천년의 무역항으로 고려왕조 외척세력의 근거지로, 반구대암각화에 뿌리를 둔 선사문화 1번지로 이어진 울산의 자긍심은 사실상 조선조부터 사라졌다. 그런 울산이 일제강점기를 통해 지리적 이점으로 일제의 보급창이 됐고 군사독재시설 조국근대화의 희생양이 됐다. 그럼에도 울산의 살림을 도맡아 온 울산광역시를 비롯한 지자체는 울산의 역사문화를 중흥시키는 데에 너무나 소홀했다. 근래 갖가지 일을 벌이고 있지만, 단체장의 구미에 맞춘 업적을 내세우는 보여주기식 사업에 치중했다는 따가운 지적을 받았다.

새해에는 울산을 진정 '울산'이라는 이름값을 하게 만드는 일에 온힘을 쏟아야 한다. 울산의 공업화가 운명적임을 단적으로 상징하는 반구대 암각화와 달천철장의 유래를 깊이 인식한다면 울산을 산업의 도시를 넘어 역사문화의 도시로 만드는 일이야말로 울산인 모두가 수행해야 할 사명이다.
울산에 살고 있는 사람이 제 고장의 역사문화를 제대로 알지 못한다면 지역에 대한 자긍심은 결코 만들어지지 않는 법이다. 달천철장 이전의 석탈해 시절부터 쇠와 소금을 만들어내고 동해를 헤쳐나가는 조선기술을 가진 도시가 울산이었다. 그 힘이 신라 천년 아랍과 로마를 호령하는 상단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며 선진 문물을 교류했던 유전인자로 이어졌다. 한반도 첫 국제 무역항이었던 울산, 신라 불교문화의 전성기를 구가했던 울산,현대의 산업수도 울산은 그래서 오래고 깊은 역사를 가진 도시다. 그런 울산의 찬연한 역사문화를 부활시키는 일이 사람을 모이는 도시로 만드는 근본임을 제대로 인식해야 위기의 울산을 극복할 수 있다는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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