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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판에 심심치 않게 등장하는 보이콧이라는 말은 사실 아일랜드 귀족의 재산 관리인이었던 찰스 보이콧(Charles Boycott)의 이름이다. 귀족의 영지를 관리하던 일을 한 보이콧은 자신의 지위를 이용해 지역 노동자들을 학대한 갑질의 전형이었다.

갈수록 포악해지는 보이콧의 행동에 분개한 지역 상인들이 조직적으로 보이콧에게 대항하면서 사태는 역전됐다. 상인들은 보이콧에게 물건을 판매하지 않았고, 지역 노동자들도 보이콧의 농장에서 일하기를 거부했다. 지역사회에서 배척당한 보이콧은 설 자리를 잃게 됐다. 이 사건 이후 보이콧이라는 말은 정치·경제·사회·노동 분야에서 부당한 행위에 맞서 집단이 조직적으로 벌이는 각종 거부운동을 의미하는 단어로 사용하게 됐다.

역사상 가장 유명한 보이콧 운동은 미국에서 일어난 몽고메리 버스 보이콧 사건이다. 킹 목사가 재직하던 앨라바마주에서 일어난 이 사건은 서양사에서 인종차별의 역사에 한 획을 그은 의미 있는 운동이었다. 1955년 12월 1일 로사 파크스라는 할머니가 버스에 타 백인전용 좌석 바로 뒷좌석에 앉아 있었다. 백인남성이 차에 오르자 자리를 내주고 뒤로 가 서서 가라는 버스운전사의 말에, 파크스 할머니는 이를 거부하다 백인 남자들에게 뭇매를 맞고 경찰에 체포됐다.

이 사건을 전해들은 당시 몽고메리주 덱스터 침례교회의 목사로 있던 27세의 킹은 파크스 할머니의 공판일 이었던 12월 5일부터 버스 보이콧을 전개하자는 성명서를 내고 보이콧 운동을 주도했다. 흑인 승객의 60%만 동참해도 대 성공일 거라고 예상했지만, 거의 100%가 협력을 하는 기적이 일어났다. 혼잡한 출퇴근 시간 동안 인도는 직장으로 그리고 다시 집으로 느긋하게 걸어 다니는 사람들로 가득 찼다. 이렇게 전개된 몽고메리 버스 보이콧 운동은 예상을 깨고 만 1년이 넘도록 지속됐다.

우리 정치에서는 보이콧의 유래와는 달리 불편한 보이콧이 수시로 등장했다. 가장 최근에는 자유한국당 당권 레이스에서 전당대회 날짜를 놓고 보이콧 하는 사태가 벌어지고 있다. 자유한국당 선거관리위원회는 전당대회 일정 연기 여부 등을 논의하기 위해 전체회의를 개최한 결과 "전대 연기는 없다"는 기존 입장을 고수했다.

박관용 선관위원장은 회의 직후 기자들과 만나 "전대 일정을 재고하자는 이야기는 없었다"고 말했다. 이어 오세훈 후보 등 당권주자들이 2주 이상 전대 연기를 주장하며 전대 보이콧을 선언한 것에 대해 "그 사람들 사정"이라며 "우리와 관계 없다"고 거듭 강조했다.

보이콧을 선언한 당권 주자들의 명분은 북미회담으로 전당대회 홍보 효과가 사라질 것이라는 주장이지만 선관위는 이에 동의하지 않고 있다. 하필이면 북미회담일에 전당대회가 겹쳐져 볼썽사납게 된 것은 맞지만 그렇다고 몇달전부터 예정된 전당대회를 두고 보이콧을 외치는 이들의 명분도 그리 당당해 보이진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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