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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마 싶었지만 고난의 행군을 강행했다. 무려 3,800㎞, 66시간의 대장정이다. 갈 때에 부푼 꿈이 있어 뉴스의 초점이 된다지만 돌아오는 길까지 왕복 7,600㎞는 거의 코미디 수준이다. 아무리 할아비의 코스프레로 인민에게 신비주의를 각인시키고 싶었다지만 30년 전 동독에서 수입한 삐걱거리는 열차로 중국 대륙을 종단하는 왕복 일정은 북한을 국제사회에 비정상국가라는 이미지를 더욱 굳건하게 했다. 그마저 결과조차 허망했다. 베트남 하노이에서 대북제재 완화라는 보따리를 들고 가리라던 꿈은 물거품이 됐다. 

하노이 담판이 실패로 끝나자 여론은 둘로 갈렸다. 북한이 구체적인 비핵화 조치를 내놓고, 미국이 그에 상응하는 대북제재 완화 등을 풀 것이라는 전망으로 낙관론을 점친 쪽은 그래도 파국은 아니다며 애써 봉합수술에 나섰다. 애초부터 비핵화는 말장난이며 결국 김정은의 복심은 핵보유국 인정에 있다는 무용론을 이야기하는 쪽은 가면이 벗겨졌다며 대북정책 방향 선회를 주장하고 있다. 

팩트는 이렇다. 회담이 끝난 뒤 트럼프는 "북한이 전면적인 제재 해제를 요구했다"고 파국의 책임을 북으로 돌렸고 리용호의 입을 빌린 김정은은 "아니다. 우리는 제재 일부 해제를 원했다. 유엔 제재 결의 11건 중 5건, 그중에서도 일부다"고 외쳤다. 문장을 그대로 해석하면 11건 중 5건의 해제를 요구한 북의 주장은 전부가 아니라 일부가 맞다. 리용호는 트럼프가 하노이를 떠난 새벽 긴급 기자회견을 열어 "우리 요구는 유엔 제재 결의 11건 가운데 2016 ~2017년 채택된 5건, 그중에 민수(民需)경제와 인민생활에 지장을 주는 항목들만 먼저 해제하라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심야의 기자회견은 이례적이지만 트럼프의 주장대로 전면해제 요구가 기정사실화 되면 파국의 책임을 덮어쓴다는 부담이 작용했다. 전부가 아니라 일부라는 항변은 곧바로 부메랑이 됐다. 폼페이오 미 국무장관이 즉각 재반박했고 미 국무부 고위 당국자도 북측의 주장을 '말장난'으로 규정했다. 

미국 측의 주장은 이랬다. "북측이 원하는 제재 완화는 기본적으로 무기를 제외한 모든 제재를 아우르는 것"이라며 11개 중 5건의 제재는 사실상 모든 완화라고 본다는 입장이었다. 국무부는 또 "북한이 이런 제재 해제를 조건으로 제안한 영변 핵시설 폐기는 영변 단지 일부의 폐쇄였다"고 했다. 또 트럼프 대통령이 김정은 위원장에게 "통 크게 하라. 올인하라"고 주문했다고 전했다. 

상상력을 발휘해 보자. 하노이행 특별열차 안에서 어떤 일이 있었을까. 김정은은 트럼프와 2차 회담을 추진하면서 가능한 아니, 전적으로 회담 장소는 하노이가 되어야 한다고 실무진을 다그쳤다. 60시간이 넘는 열차 행군도 이미 이때부터 마음속으로 결심을 굳혔다. 하노이를 회담장으로 고집한 김정은의 복심은 이랬다. 

할아비인 고 김일성 주석의 이미지 정치를 활용하겠다는 생각이 첫째였다. 김일성은 1958년과 1964년 두 차례의 베트남을 방문했다. 평양에서 열차를 타고 중국 베이징(北京)까지 이동한 뒤 베이징에서 중국 항공기를 빌려 타고 하노이로 날아간 할아비의 길을 가겠다는 의도였다. 이를 통해 체제선전과 대미 협상력 강화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을 수 있다고 믿었다. 

두 번째는 66시간의 열차 행군은 트럼프에게 북한과 중국의 특수 관계를 제대로 읽게 하는 후광효과가 있다고 믿었다. 마지막은 역시 주도권이었다. 열차가 달리는 시간 동안 세계의 언론은 열차의 동선을 따라 카메라를 맞출 것이기에 이만한 뉴스 독점 효과는 5시간짜리 비행기 방문으로는 누릴 수 없는 기회가 된다는 생각이었다. 

아마도 열차가 베트남을 향하는 동안 김정은은 김혁철과 리용호, 그리고 김영철을 불러다가 수시로 대책회의를 했을 것으로 보인다. 파국은 꿈에도 예상하지 못한 채 열린 대책회의에서부터 이번 회담은 엇박자가 났다. 재구성하면 이렇다. 물론 필자의 상상력이다. 남조선에서 그동안 여러 가지로 군불을 떼 줬으니 개성공단이나 금강산은 기본으로 보면 대갔지(김정은). 물론입니다. 철도연결이나 공동조사 등 실질사업에서도 남조선이 제제 예외를 승낙 받았던 걸 보면 그 정도 완화조건은 기본일 꺼라 봅네다(김영철). 트럼프가 재선도 있고 탄핵도 거론되고 하니 똥줄이 탈 거야(하하)…살짝만 댕겨도 줄줄이 따라올 거니 첨부터 통 크게 나가는 게 어때(김정은). 지난번에 몇 군데 쾅쾅 폭파도 해댔으니 영변에 쓸모없는 시설 몇 개 터뜨려준다고 하고 받아내면 될 거 같습네다(리용호). 툭하면 사랑한다, 존경한다고 하니, 내레 참 부담스럽고 쑥스럽단 말이야(김정은)열차는 달리고 북한 지도부의 웃음소리가 레일에 깔렸던 시간이었다. 일장춘몽. 하노이 선언에 대한 기대는 한국과 미국은 물론, 북한에서도 대단히 컸다. 북한 매체들은 김 위원장의 평양 출발 소식과 하노이 도착 소식 등을 신속하게 보도했다. 최고지도자의 행보를 뒤늦게 내부에 알려왔던 그간의 보도 행태와는 달랐다. 북한은 이번 회담에서 충분한 성과를 낼 수 있다고 보고, 그 성과를 선전하기 위해 주민들에게도 관련 내용을 알리며 기대감을 키워왔다. 

트럼프는 김정은을 한껏 띄워 영웅으로 만들고 그 우월감이 빅딜을 표출하게 만들 수 있다고 착각했고 김정은은 트럼프의 립서비스를 들으며 정치적 수사라고 생각하면서도 반복적인 칭송에 고무돼 어쩌면 자신의 생각대로 트럼프가 제재완화의 카드를 보여줄 것이라 오해했다. 물론 그 믿음의 전초는 남쪽의 바람몰이도 크게 작용했다. 만나기만 하면 금강산도 풀리고 개성공단도 돌아갈 것이라는 기대감을 심어준 쪽은 문재인 정부였다.

아니나 다를까 회담이 파국으로 끝난 뒤 청와대의 공식 입장은 놀라울 정도였다. 김의겸 대변인의 입을 통해 나온 공식 반응은 이랬다. "트럼프 대통령과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오늘 정상회담에서 완전한 합의에 이르지 못한 점은 아쉽게 생각합니다. 하지만 과거 어느 때보다도 의미 있는 진전을 이룬 것도 분명해 보입니다. 두 정상이 오랜 시간 심도 있는 논의를 진행함으로써 서로 상대방의 처지에 대해 이해의 폭과 깊이를 확대한 것으로 평가합니다. 특히 트럼프 대통령이 밝힌 지속적인 대화 의지와 낙관적인 견해는 다음 회담에 대한 전망을 밝게 합니다. 트럼프 대통령이 북한의 비핵화 조치와 연계해 제재 해제 또는 완화 의사를 공개적으로 밝힌 점은 북미 간 논의의 단계가 한층 높아졌음을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무엇이 진전인지 어떤 부분이 전망을 밝게 하는지 아무리 따져봐도 이해할 수 없는 대목이다. 

곧바로 문 대통령은 3·1운동 100주년 기념사를 통해 보충 설명을 했다. 문 대통령은 "2차 북미정상회담도 장시간 대화를 나누고 상호이해와 신뢰를 높인 것만으로도 의미 있는 진전이었다"면서 "특히 두 정상 사이에 연락 사무소의 설치까지 논의가 이루어진 것은 양국 관계 정상화를 위한 중요한 성과였다"고 주석을 달아줬다. 대통령의 말을 통해 진전의 이유가 설명됐다. 장시간 대화를 나눴다는 점이 진전이며 립서비스로 나온 이야기들이 성과란다.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듣게 되면 아집의 파이는 한없이 커진다. 동맹국의 입장은 물론 대북 강경파와 온건파의 이야기까지 실타래처럼 엉켜 있는 트럼프의 입장과 핵 없는 협상을 꿈꾼 적이 없는 김정은의 입장은 출발부터 달랐다. 비행기와 기차라는 이동수단의 차이만큼 완전히 다른 두 사람에게 희망을 이야기하는 것은 물론 이해할 수 있다. 평화라는 단어가 주는 한반도의 미래를 너무나 소중한 가치로 인식해야 한다는 문 대통령의 철학도 소중한 가치다. 

문제는 핵을 포기할 생각이 없는 자의 입에서 나오는 말들을 거짓인 줄 알면서도 미화하는 것은 이야기가 다르다. 거짓을 쉽게 뱉어내는 입은 변화를 읽을 수 없지만 눈빛은 흔들리기 마련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하기에 하는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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