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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석근 향토사학자

부친 백만건으로 부터 물려받은 큰아들 백만술(白萬術)은 이승만 대통령시절(1954년경) 국회의원에 출마하여 낙선했다. 그 뒤 경상남도교육위원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방어진읍 전체에서 가장 돈 많은 백만술은 읍민들에서 백고무신 한 컬레를 돌릴 만큼 재력가였기에 그를 두고 “먹고 보자 백만술" 이라할 만큼 돈을 뿌렸다.
당시 6·25전쟁으로 부산으로 밀려든 피난민들의 가장 절박한 문제가 호구지책이었다. 시급하게 해결할 방법은 고래잡이 외에는 뾰족한 수가 없었다. 세계 2차대전에 패전한 일본도 전쟁이 끝나고 피폐해진 국민들의 식량 충족을 위해 포경 밖에는 대책이 없었다. 다급해진 현실을 해결하기 위한 해결법이 고래잡이였던 것이다. 이에 이승만 대통령은 미 8군 사령관 하지 중장을 불러 다그쳤다. “고래잡이 포경선 출어를 허가하시오. 그렇지 않겠다면 당신네 나리에서 구호품(식량등)을 더 지원하도록 하시오" 라고 호통쳤다. 하지중장은 좌불안석 어쩔 줄 몰라 하다 하는 수 없이 포경선 출어를 허가했다. “각하, 포경선이 바다로 나가되 연안포경만 가능하게 해야합니다. 먼바다로 나가면 비행기의 폭격을 받을 수 있으니 위험합니다" 라고 했다. 그때는 밀고 당기던 낙동강을 사이에 두고 치열하게 전쟁을 하고 있던 때라 하지중장도 매우 염려를 하면서 어쩔 수 없이 이승만의 성화를 허락할 수밖에 없었다.

 

# 싼 돈으로 한두 끼니는 거뜬히 해결
6·25 전쟁으로 한동안 묶여있던 포경이 허용되자 물찬 제비처럼 방어진, 장생포에 포경을 기다리던 포경선이 일시에 탐경에 나섰다. 이때 백만술의 어성호는 감포 앞바다로 나아 갔다. 이때 포수가 이만출(李萬出)이다. 그는 17세부터 포경선 제3 청진호에 승선하여 33년간 포경선을 탔다. 처음 탄 배는 정어리 잡이 목선을 개조한 포경선이었다. 이때만 해도 바다에 고래가 많아서 1년에 36마리를 포획할 만큼 전성기였다. 방어진 수산중학이 방어진 중학교로 개칭되면서 실습선 이던 배는 백천건에게 양도되어 어성호란 포경선으로 개조됐다. 원래 이만출은 방어진에서 왕고래집을 하다 포경선에 승선하였고 화장을 거쳐 포수까지 승진했다.
당시 고래고기는 피난민들에게는 구세주나 다름없는 먹거리였다. 싼 돈으로 소고기와 비슷한 육류를 여러 사람이 한두 끼니를 해결할 수 있는 신의 음식이나 다름없는 것이 바로 고래 고기였던 것이다. 고래의 수요가 피난민들로 급증하자 이 기간이 포경업으로썬 전성기 그 자체였으나 그 당시에는 포경선이 바다로 나아가려면 포경포의 화약을 경찰성(방어진과 장생포 지서)에서 총포화약취급 허가를 가진 사람이 아니면 화약의 대여가 금지되어있었다.

 

1935년 방어진 어업장.
1935년 방어진 어업장.

 

# 개체 수 많아 1년 36마리 포획하기도
탐경 시간이 한시 다듭한 상황에서 화약 수급으로 어려움을 겪던 백만술은 고민하다 우연찮게 동부국민학교(화진초등학교전신)에 근무하는 김이국 선생이 화약취급 면허를 가지고 있다는 소문을 듣고 한달음에 검은 짐차를 타고 학교로 찾아갔다. 수업 중인 김이국 선생의 교실로 찾아가 “김선생님 나 좀 봅시다" 하고는 교실 밖으로 나와 “오늘부터 선생일은 그만두고 우리 회사의 '화약 주임' 으로 근무해주시오. 급료는 선생의 두 배는 드리겠습니다"라고 제의했다. 마다할 이유가 없는 김이국은 그날 이후로 방어진의 백만술 포경회사에서 화약주임이 되어 최대의 예우를 받았다.
당시 부산공업고등학교(부산공전 5년제 전신)는 일본인들이 설립해 필요한 기술들을 공부하는 인재 양성을 위한 교육기관이었다. 내노라하는 수재들만 모였고 입학에서 졸업까지 모두 일인들의 독무대에 김이국은 입학시험 1등으로 합격하여 수석으로 졸업한 엘리트였으나 졸업 후 해방이 되자 마땅하게 취직할 자리가 없어서 고향에서 우선 초등학교에 근무하게 되었다. 하지만 그를 발굴하여 적재족소에 앉흰 인물이 바로 백만술, '방어진의 백만장자' 였다. 김이국의 입사로 그동안 원활하게 수급이 이루어지지 못했던 총포화약의 취급이 쉬워지면서 장생포의 포경선단 보다 한발 앞서 탐경에 나설 수 있게 되었다. 당시의 백만술과 백상건이 거느린 포경선은 8척이였고, 그외에도 구득호, 대동호, 청진호, 형제초, 삼해호, 정흥호, 백경호가 있었다.

 

1960년대 후반 화진에서 바라본 대왕암공원.
1960년대 후반 화진에서 바라본 대왕암공원.

 

# 아래 위 턱뼈 대왕암공원 입구 설치
1953년 휴전 협정이 채결되면서 부산에 머물던 이승만 대통령과 3부 요인들이 다시 서울로 수복되면서 밀려들었던 피난민들의 정체도 많이 해소되었다.
하지만 여전히 부산 국제시장은 군수물자와 외래 상품으로 북새통을 이루는 생존경쟁의 현장이었다.
50년대가 저물어 가던 때 어성호는 감포 앞바다에서 대형 고래를 포획하여고 사투를 벌였다. 당시의 포수는 이만충 이었다. 포경포 한 방을 쏘아서는 대형 고래(참고래:18미터)의 숨을 끊기가 어려웠다. 고래가 멀리 도망치거나 물속에 가라앉기 전에 빨리 끌어올리려면 두 번, 세 번 포를 쏘아 끌어올려야만 했다. 하지만 100톤에 가까운 대형 고래를 끌어올리려면 구형 마닐라 호프는 아무래도 약했다. 처음 명중되지 않고 빗맞은 고래는 배를 끌고 먼바다를 향해 끝없이 도망쳤다. 갑판 아래 차곡히 쌓였던 500발 로프는 삽시간에 다 풀려나가고 이제 겨우 10여 미터밖에는 여유가 없었다. 배는 고래가 끌고 가는 가속에 의해 선수는 반 이상 수면에 잠기고 우현(고래 끌어올리는 옆 삼)에 바닷물이 넘쳐들어 기관실로 쏟아졌다. “기관실에 물이 들어온다! 줄을 잘라라!" 기관장의 다급한 목소리가 공허하게 광활한 바다 위로 흩어졌다. 줄이 풀려나가는 이물의 도르래에서 가속으로 불꽃이 튀었다. 갑판장은 손도끼를 들고 줄이 풀려나가는 도르래에 물을 뿌리며 선장의 명령만 기다렸다. 절체절명의 순간 줄을 끊으려는 찰나에 배의 선수가 갑자기 수면 위로 정상적으로 떠오르며 포경선이 중심을 잡았다. 그렇게 1시간 가까이 끌고 가던 고래가 힘을 다해 수면 위로 긴 물기둥을 뿜으며 떠올랐다. 구사일생이었다. 하마터면 배가 전복되어 수중고혼이 될뻔한 절박한 순간이었다. 그렇게 사투를 벌이며 잡은 참고래는 힘겹게 항구로 끌고 와 방어진 포경 선원들과 어민들의 환영 속에서 동진포구 해체장에서 청룡도 칼을 든 해부사들에 의해 난도질당했다. 현재 대왕암공원 등대 입구에 세워져 있는 아치형 턱뼈가 그 때 감포 앞 바다에서 포획한 참고래의 아래 위 턱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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