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일휘소탕 염혈산하(一揮掃蕩 染血山河). 이순신이다. 도망간 군주에게 뱉은 서해맹산(誓海盟山)보다 눈앞에서 민초를 도륙하는 왜구에게 지른 한마디가 더 결기롭다. 한번 휘둘러 산하를 피로 물들이는 한 사내의 기개를 곳곳에서 인용한다. 언제나 우리에게 충(忠)의 본질을 생각하게 하는 그가 이 여름 염천 산하에 소환됐다. 열두 척의 배로부터 서해맹산까지 대통령과 그의 장자방은 이순신의 혼과 밤마다 교신한다.

지난 주말, 그 뜨거운 염천 햇살을 피해 수많은 이들이 봉오동전투장을 찾았다. 걸출한 배우들의 농익은 연기로 되살아난 봉오동은 먹먹했다. 국가가 지켜주지 못하는 백성은 농락의 먹잇감이다. 능욕과 멸시의 현장에 국가는 없다. 왕궁의 유품을 전리품으로 나라를 팔아먹은 앞잡이들이 궁궐의 담을 넘을 때 남해의 용이 된 장군의 피는 바다를 물들였을 법하다. 다시 광복의 날이 왔다. 8월이 오면, 8월만 되면 대한민국 사람들의 심장은 박동수가 달라진다. 일제강점기의 시간 동안 벌어졌던 이야기나 아버지의 아버지, 어머니의 어머니가 당했던 폭압과 비인간적인 현장을 오버랩해서만은 아니다. 우리도 모르게 흐르는 압제의 공포에 짓눌린 유전인자가 8월이면 다시 살아나 흥건한 외침으로, 뚜렷한 요구로 펄떡거린다. 

삼일운동 100주년인 올해, 하필이면 이 시점에 왜구의 후예, 패전 망나니의 자손 아베는 대한민국의 심장을 저격했다. 바로 그 총구가 부메랑이 되어 지금 이 땅에 반 아베의 물결이 염천하늘을 촛불로 달구는 상황이다. 우리의 광복절인 8월 15일, 아베의 나라는 패전일이다. 그들의 왕이 항복을 선언한 굴욕의 날, 군국주의와 제국주의의 완장을 찬 A급 전범들이 합사된 야스쿠니는 일본 우익의 야합이 번떡이는 날이기도 하다. 올해는 아예, 아베가 직접 야스쿠니에 머리를 조아려야 한다고 우익들은 목젖을 세우고 있다. 해마다 패전일이면 일본 우익들은 과거를 부르는 일장기를 휘두르며 군국주의 시대의 추억을 소환하는 노래를 틀어댔다. "천황 폐하 만세"가 야스쿠니를 진동할 무렵, '대일본제국 해군' 마크가 선명한 노쇠한 전역병들이 나팔을 분다. 이 기세로 독도를 넘고 울릉도도 삼킬 기세다. 

화려한 과거는 향수를 부른다. 초등학교 때 반장 안 해본 사람이 없고 옛날 자기네 집 금고엔 황금 돼지 몇 마리쯤 없던 집이 없다. 조상 중에 정승을 지냈거나 왜놈이나 오랑캐 수십쯤은 단칼에 베어버린 위풍당당한 선조의 무공을 전설처럼 간직한 우리네의 과장법은 술잔 뒷담화로 지금도 오르내린다. 일본의 지금이 딱 그 수준이다. 한참 밟아 비틀어 놓았던 '조센징'이 고개를 쳐들고 턱밑까지 호흡을 뱉아낸다. 지금 밟아야 한다. 때를 놓치면 다시 기회는 오지 않는다. 외할아버지, 기시의 가르침이 잠깐 스친다. 아베는 다시 한번 '앗싸리'를 외친다. 

과거가 그리운 시점은 현재의 불만이 잔을 채울 무렵이다. 허전하면 과거가 생각나는 법이다. 이사부 장군이 창검을 꽂고 눈을 부라리던 오랜된 과거, 동해 바다엔 왜구가 득실거렸다. 국가도 민족도 별 의미 없던 시절, 먹고살기 위해 노략질을 일상으로 삼던 무리들이 우리 땅을 제집 마당처럼 들락거렸다. 질서를 잡고 절차를 밟으라고 금을 긋고 예를 가르친 시간, 왜놈은 밝은 날엔 머리를 조아리다 어두워지면 관가의 창고를 털고 민가를 덮쳤다. 그 숱한 반복의 역사 속에 그들이 배운 건 훔친 것을 내 것으로 만들어 오래 간직하는 법이었고 그 학습이 19세기 제국주의를 만들었다. 그래도 뿌리는 한줄기다. 소서노 할머니가 주몽과 결별하고 새로 찾은 땅, 아리수 터전에 깃발을 꽂고 백제를 세웠을 때, 한 무리의 피붙이들이 섬나라를 개척했다. 태양신을 받들고 삼족오 문양을 가슴에 품은 것이 일본의 오래고 먼 과거다. 하지만 지금의 일본은 소서노 할머니로 시작한 자신의 과거가 영 개운치 않은 모양이다. 그래서 그들은 또다시 100년 전의 그들로 돌아갈 태세다. 

문제의 시작은 징용판결이지만 어쩌면 그 뿌리는 1965년 한일청구권협정부터가 맞다. 군사정권의 탈출구는 경제도약이었고 미국의 눈치를 봐야 하는 일본은 적당한 타협으로 과거사를 덮고 정상 국가가 되기를 희망했다. 광화문 앞에서 무릎 꿇고 용서를 비는 퍼 포먼스도 없이 미래를 향해 친구가 되자고 악수할 수 있다니 얼마나 반가운 일인가. 당장 급전이 필요한 자는 일수 이자의 뒷감당은 생각하지 않는 법. 수완 좋은 왜구의 후예들은 맘 바뀌기 전에 얼른 도장을 찍었다. 그 결과가 반세기를 지나 욕창으로 터져 나와 고름이 흐르고 냄새가 진동한다. 

어물쩡 뒤로 물러선 전범 기업들은 주판만 굴린다. 전범기업인 미쓰비시 이야기를 해보자. 미쓰비시는 강제노역에 동원된 조선인들을 잔학하게 학대한 기업으로 유명하다. 미쓰비시는 2차대전 당시 원폭현장에서 살아남은 한국인들을 끌고 가 폐허가 된 나가사키에서 청소를 시켰던 기업이다. 그 미쓰비시는 오늘까지 강제징용을 인정하지 않고 침묵으로 일관한다. 그 침묵은 일본의 어제가 아니라 오늘이다. 굳이 미쓰비시 이야기가 아니어도 우리에겐 구마모토라는 도시 이야기도 있다. 울산사람들이 10년 가까이 오고간 구마모토 사람들은 다를까. 천만에 말씀이다. 그들은 한 번도 그들의 조상들이 오래전 울산 장정들을 끌고 가 노예보다 못하게 부려먹은 일과 열다섯 갓 넘은 처자부터 유부녀까지 마구잡이로 끌고 가 능욕을 벌인 일을 오늘의 울산 사람들에게 정면으로 사과하지 않았다.

말이 나온 김에 한 번 더 이야기해보자. 구마모토성은 어떤가. 울산 장정들과 처자들을 끌고 가 만든 성이 그들이 그토록 칭송하는 구마모토성이다. 구마모토성을 축조한 자는 조일전쟁 때 조선인 학살과 문화유산 파괴자로 악명이 높은 가토 기요마사다. 울산에 왜성을 지어 수비에 치중한 가토는 조일전쟁 7년의 역사 가운데 가장 처절한 전투로 알려진 울산성 전투를 맞이했다. 애마를 죽여 피를 마시고 인육을 먹고 버틸 수밖에 없었던 가토는 도망치다시피 본국으로 돌아가 자신의 영지에 성을 쌓았다. 바로 구마모토성이다. 가토가 쌓은 이 난공불락의 성을 밑바닥부터 쌓아 올린 이들이 바로 울산의 장정들이었다. 울산마찌는 구마모토의 조선인 강제 수용지역의 별칭이다.

가토는 조일전쟁 당시 수시로 울산의 장정들과 아녀자들을 본국으로 보냈다. 그 수가 정확하진 않지만 대략 수천 명은 넘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가토는 잡아간 울산사람을 울산마찌라는 이름으로 통제하며 성을 쌓았다. 울산마찌는 가토의 발바닥을 닦고 왜놈의 오물을 치우는 종살이로 끌려간 옛 울산인들이 무더기로 모여 살던 동네이름이다. 치욕의 역사, 능욕의 역사를 살피지 않은 우호협력은 개념 없는 이벤트다. 과거사에 대한 분명한 정리 없이 우호협력을 이어가면 한일청구권이거나 징용판결이거나 어떤 형태로든 잘못된 과거사는 우리의 발목을 잡게 되는 법이다. 당장 일본의 도시들과 맺은 자매결연이든 우호협력이든 함부로 악수한 과거사를 재검토해야 하는 이유다.  

가토 이야기를 한 김에 온산 앞바다에 뭉개진 채로 숨어 있는 목도 이야기를 해보자. 잘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지만 필자가 1990년 온산공단 방도리 앞 목도를 찾았을 때 이 섬을 지키던 노인이 전해준 이야기도 가토에 대한 구비전승 자료였다. 목도는 조일전쟁 당시 화살촉에 사용되는 대나무가 우거진 곳으로 유명했는데 왜장 가토는 이 섬의 풍광에 반해 별장을 짓고 유희를 즐겼다. 이 유희의 도구로 잔락한 울산의 어린 처자들은 가토의 농락거리가 됐고 그 원혼이 봄마다 동백으로 피어나 봄이 오기 전 목을 자르듯 핏빛 꽃송이를 떨어뜨린다는 이야기가 남아 전해지고 있다. 이 전설 같은 이야기가 사실이 아니길 바라지만 사실일 개연성이 더 높아 보이는 건 오늘의 일본 정치 지도자 때문이다. 그 왜구의 후예, 전범의 자손들이 회개하지 않고 할애비보다 더한 탐욕의 발톱을 드러낸다면 일휘소탕 염혈산하(一揮掃蕩 染血山河)로 목젖을 따야 할 날이 올지도 모를 일이다.

저작권자 © 울산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