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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 울산으로 들어오는 사통관문에 '역동의 산업수도'가 깃발처럼 펄럭였다. 그리고 한참 뒤 울산의 리더들은 그 산업수도에 문화의 옷을 입혔다. 왜, 어떤 옷을 지어 입혀야 하는지를 제대로 고민하지 않은 채 사시사철 형형색색 다채로운 옷을 입혔다. 이유는 간단했다. 전국의 모든 지자체가 문화를 미래 먹거리로 삼자 마음이 급했다. 놓치면 후회할 거예요라고 누가 속삭이는 것처럼 이것저것 마구잡이로 옷을 만들었다.

스토리텔링도 하고 전설과 설화를 끌어다 장승처럼 세웠다. 울주의 일곱 개 봉우리가 이상한 나라의 일곱 귀신 이야기로 둔갑하고 없던 길과 생뚱맞은 길이 새롭게 지도에 그려졌다. 백로가 학이 되고 썩은 해안이 생태 복원의 사례로 둔갑했다. 돈이 될지 모른다니 마음이 급했다. 놓치면 정말 후회할까 봐 장삼이사 아무개나 줄을 세워 문화첨병으로 완장을 채웠다. 그리고 10년 세월이 흘렀다. 이제 정말 대한민국은 문화가 밥이 되는 시간이 왔다. 백범의 예언처럼 문화로 융성한 나라, 히잡까지 벗어 던지게 만든 문화의 힘이 반도체보다 더 큰 수출 효자상품이 됐다.

역사와 문화, 그리고 산업이 만나는 도시로 만들겠다는 울산은 어떤가. 10년 동안 수많은 책이 나왔고 무수한 행사를 펼쳤다. 문화인재를 양성하고 스토리텔러를 길러냈다. 그런데 그 결과는 어떤가. 지난주말이다. 울산에서 50년 이상을 살아온 몇 사람과 울산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기회가 있었다. 시작은 박정희 때문이었다. 그들의 어린 시절 박정희는 신화적 존재였다. 군복 입은 장군이 지휘봉 휘날리며 납도 바닷가에서 폭파 버튼을 누른 후 울산은 검은 연기가 하늘을 덮는 근대화의 기수가 됐다. 그 기억을 가진 이들이 박정희로 시작된 울산의 반세기를 필름처럼 상영했다. 놀라운 기억력이다.

만국기와 태극기를 흔들며 경부고속도로 언양선 개통식에 나갔다는 S 씨는 박정희 아니었으면 오늘의 울산이 없었다며 여전히 박정희를 흠모했고 그 말에 흥분한 P 씨는 무슨 소리냐며 잠시 흥분지수를 높였다. P 씨의 주장은 박정희 때문에 울산이 오늘의 규모로 성장한 게 아니라 울산만의 특수한 지리적 지형적 환경적 특성이 오늘의 울산을 만들었다는 자긍심이었다. 그러자 K 씨가 P 씨의 말에 형용사 몇 개를 얹었다. K 씨는 지역 언론에서 읽었다며 일본이 일제강점기 때 울산을 공업도시로 만들겠다며 밑그림을 그렸고 그 기반 위에 박정희가 공업센터를 건설했노라고 자랑처럼 한마디를 거들었다. 

이쯤에서 정말 궁금해진다. 울산공단은 언제 시작된 것인가. 비밀은 일제강점기의 울산 공업도시계획이지만 사실은 그보다 훨씬 전, 1,000년을 거슬러 가야 이야기를 풀어낼 수 있다. 너무 먼 이야기 말고 가까운 일제강점기만 더듬어 보자. 야만기의 일제는 대륙침략이 본격화된 1930년대 말에 조선공업화와 병참기지화 정책을 추진하면서 울산을 공업도시로 개발키로 했다. 조선축항주식회사 대표 이케다 사다오(池田佐忠)가 울산공단을 만드는 데에 앞장섰다. 그는 1936년에 울산의 축항(築港)과 공업도시계획을 구상했다. 그가 밝힌 울산의 공업도시 입지조건은 15가지였다. 지금 울산이 산업수도로 변신한 입지조건과 동일하다. 

여기까지는 이날 모임에 함께한 이들도 언젠가 들었던 이야기였다. 맞다, 그랬지를 연발했다. 하지만 다음이 문제였다. 울산은 이케다 사다오라는 왜놈의 눈에 찍혀 공업도시가 된 게 아니라 1,000년 전 국제무역항으로 이름난 과거의 학습효과가 일제에 리모델링으로 거듭난 것이라는 설명에서는 후렴구가 사라졌다. 그리고 필자는 한발 더 나아갔다. 반구대암각화에 새겨진 가죽배로부터 울산은 7,000년 조선기술의 모태가 됐고 겨울을 알리는 떼까마귀가 북방민족의 한줄기를 몰고 와 북방문화의 꽃을 피웠다, 그 증좌가 우사산국으로 탈해의 달천철장으로 웅촌 검단의 북방 유적으로 족적을 남겼다. 그런 문화적 토대가 신라의 상업중심항만으로 자리했고 울산의 성장이 통일신라의 토대가 됐다.

개운포와 반구동 일대 항만시설이 울산의 국제무역항의 옛 기억을 증거하는데도 건설업자의 농간에 무지한 행정의 안일함에 콘크리트로 처바르고 외딴 유적지로 방치했다. 1,000년 전 이 땅이 어떤 항구였는지, 로마로부터 인도와 아라비아의 어떤 문화가 울산의 항만에 넘실거렸는지 아무도 궁금해하지 않으니 그냥 묻혀버렸다. 이야기가 이쯤 되자 자리에 있던 이들은 뒤통수를 긁적였다. 몰랐단다. 어렴풋이 풍문으로 들었던 것 같기도 하지만 별생각 없이 스쳐 지나갔고 이 도시에 살면서 학교든 선생님이든 어떤 이도 정면으로 이야기를 해준 일이 없다고 했다. 당연한 일이다. 산업수도, 공업도시 울산은 지난 반세기 그런 기억을 소환할 필요 없이 잘 먹고 잘살아왔다. 그래도 울산에 뿌리 박고 사는 이들이 자신의 뿌리를 제대로 알지 못한다는 일은 참 딱하고 슬픈 현실이다. 

도시의 역사는 사람의 역사다. 황성동 바닷가부터 대곡리 평원에 이르기까지 움막 짓고 고래 잡던 사람들이 이 도시의 첫 문화인이었다면 세계 최대의 배를 만들고 대륙을 달리는 자동차를 만든 사람들이 지금 이 도시의 주역이다. 처음은 사람이 도시를 만들었지만 그 사람들의 축적된 문화는 이제 도시의 튼튼한 내공이 되어 새로운 사람을 만든다. 사람도 달라졌고 역사도 축적됐지만 대한민국에서 울산은 여전히 변방이고 정부로부터 부당대우를 받는 도시다. 단적으로 반구대암각화 보존을 두고 변기통의 크기를 줄여 물을 절약하라고 국회에서 떠들어대도 찍소리 못하고 우물쭈물하는 게 울산의 현주소다. 그러다 언제부턴 가는 반세기 울산을 먹여 살린 댐을 헐어야 한다고 야단이다. 본질은 댐이 아니라 암각화인데 암각화를 살린 방법은 무시한 채 댐만 가지고 손가락질이다. 

말이 나온 김에 암각화 이야기 한 가지 더 해보자. 몇 사람이 포르투갈에 다녀온 이후 울산에서 벌어지는 해괴한 일이 있다. 바로 코아의 기적이다. 며칠 후엔 울산박물관에서 특별전까지 여는 코아 이야기는 암각화 보존의 좋은 사례다. 하지만 코아와 반구대암각화를 연결하는 일은 억지스럽다. 코아 주변은 산업수도도 아니고 근대화의 기수로 지형지물을 파괴하는 역사를 가진 도시도 아니다. 그저 부족한 전력을 공급하기 위해 수력발전용 댐을 만들기로 한 직후 암각화가 발견돼 보존운동이 벌어진 특별한 지역이다. 발전용 댐보다 문화재가 중요하다는 코아 주민들의 반발이 암각화를 보존한 사례는 문화유산의 자발적 보존 사례로 엄청난 가치를 가진다. 하지만 반구대암각화는 사연댐이 건설된 뒤 5년이 지난 겨울 말라버린 댐에서 발견된 크리스마스의 기적이다.

동네 사람들은 바위그림을 이미 알고 있었지만 가치를 몰랐고, 탁본으로 먹고사는 이들은 대박을 예감했다. 공업센터 건설 이후 울산공단의 용수공급은 대한민국 근대화의 젖줄이었고 이를 알기에 발견자부터 주민 행정 모두가 댐을 허물고 암각화를 살리자는 것은 생각조차 못 했다. 그런데 이제 와서 코아의 기적 운운하며 사연댐을 헐어내겠단다. 헐고 다듬어 원형보존 하겠다는 논리는 궤변이지만 아무렇지 않게 흘러 다닌다. 반구대암각화 주변은 이미 온갖 인공물로 변질됐는데 원형보존이라니 하고 싶지만 여전히 원형보존을 외치는 주둥이는 빨갛게 달아올랐다. 그때는 옳고 지금은 아니라는 논리는 위선이다. 암각화 앞에 물길을 내면 되는 일을 두고 무슨 야단인지 참 딱한 일이다. 

지난 10년 동안 새로운 물길은 안된다며 울산시민을 야단치던 문화재위원회가 새로운 시대를 만났다. 우리 말이 맞았다며 댐에 문을 내고 물을 빼란다. 그러니 울산사람들이 무시당한다. 울산에 한 번도 와보지 않은 이들이 서울에서 국회에서 학술대회에서 토론회에서 변기를 반으로 줄이고 먹는 물을 아껴 쓰라고 호통을 친다. 예, 예, 그렇게 하면 유네스코가 울산의 기적이라며 세계유산 동판 하나 던져줄 거라 생각한다. 대한민국 근대화를 위해 해안을 깎아내고 산을 허물고 땅을 갈아엎고 댐을 만들어 환경을 뒤집어 놓을 때는 입 다물고 있다가 이제는 원형보존이란다. 개구리가 배를 두드릴 일이다. 이런 정도의 부당대우에도 의견이 갈리는 도시가 울산이다. 지난 시절에 대한 공부가 없었던 결과다. 모르니 눈만 끔뻑댄다. 스스로 당당하면 허둥댈 일이 아니다. 그래서 우리가 사는 울산을 더 살피고 공부해야 한다는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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