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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 바람이 불면서 총선 정국의 군불 때기가 시작됐다. 포성은 여당에서 먼저 울렸다. 이철희 표창원 임종석으로 이어지는 젊은 피들의 불출마선언의 진동은 요란했다. 간헐적인 불출마 선언은 있었지만 좌고우면이 주특기인 야당은 헛발질만 했다. 총선기획단의 경로당 걸개그림은 패착이었다. 바로 이때 구원투수가 등장했다. 김세연이다. 3선의 김세연 의원이 불출마를 선언하며 야권에 숨통을 열었다. 그런데 문제는 불출마의 단서조항이었다. 황교안과 나경원의 동시불출마는 명분이었고 '한국당은 좀비정당'이라는 표현은 미래에 방점을 둔 깃발이었다. 그러자 황교안이 움직였다. 지소미아 시한임박과 선거법·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법이라는 패트열차를 멈춰세우겠다며 곡기를 끊었다. 

야당대표의 단식결기에 조롱이 시작됐다. 이번에도 박지원이다. 박지원은 황 대표의 단식 시작과 함께 SNS에 감초발언을 이어갔다. "드디어 황 대표께서 21세기 정치인이 하지 않아야 할 세 가지 중 두 가지 이행에 돌입한다" "단식, 삭발, 의원직 사퇴 중 현역 의원이 아니기에 의원직 사퇴는 불가능하지만 '당대표직 사퇴 카드'만 남게 된다"며 "이런 방식의 제1야당으로는 국민의 눈높이에 부응할 수 없다"고 비판했다. 입이 간지러운 이재정도 가세했다. 그는 황 대표의 단식을 두고 "황제 단식이다. 황 대표 옆에는 마지못해 함께하는 당직자들이 있겠지만 국민 손에는 차가운 바람만 있다"고 비난전에 나섰다. 그래도 주말을 넘긴 황 대표의 단식은 이어지고 있다. 핏기가 사라진 그는 "죽을 각오로 시작한 단식"이라며 보수통합과 패트열차 정지를 위해 자신의 목을 내놓았다고 선언했다. 

중국의 춘추시대의 정치는 오늘의 정치는 물론 우리네 삶의 지혜를 얻는 데도 유용한 텍스트다. 손자병법을 가장 먼저 제대로 알아본 이는 오나라 합려였다. 그는 당장 손무를 불러 자신의 책사로 두고 싶었다. 글과 사람이 같은 수는 없는 법. 합려는 손무의 머리를 시험하고 싶었다. 합려는 손무에게 궁녀들을 훈련시킬 비책을 물었고 합려의 속을 읽은 손무는 궁녀들을 무장시켰다. 그리곤 궁녀들을 향해 이렇게 외쳤다. "이제부터 그대들은 궁녀가 아니라 병사다. 군령이 생명이니 따르지 않을 때는 처단할 것이다. 지휘하는 대장은 특히 엄중히 책임을 물을 것이니 명심하라" 

합려가 벌인 놀이쯤으로 생각한 궁녀들은 사태의 심각성을 모른 채 손무의 명령에 교태를 짓기까지 했다. 몇 차례 명령에도 장난판이 된 훈련장을 보며 합려는 눈빛이 변했다. 계속된 명령에 낄낄거리는 궁녀들이 아예 퍼질러지자 손무의 눈빛도 변했다. "몇 번을 알려도 장난을 치니 지휘관부터 책임을 묻겠다" 궁녀들의 지휘관으로 명령한 합려의 두 애첩이 책임을 져야 했다. 도끼를 휘둘려 애첩의 목을 차려는 순간, 사태의 심각성을 알아차린 합려는 다급하게 소리쳤다. "손공! 그대의 용병 능력은 그만하면 충분히 알겠소. 그 아이들은 장난으로 생각했을 뿐이니 용서하세요" 손무의 결정은 단호했다. "전하, 저는 이미 군왕으로부터 대장으로 임명을 받은 몸입니다. 군대에서는 대장의 권위가 절대적이며, 비록 왕명이라고 해도 통하지 않습니다" 말이 끝나자 손무의 도끼는 애첩의 목을 갈랐다. 그 뒤 새로운 지휘관을 임명하고 구령을 붙이자, 일사불란했다. 애첩을 잃은 합려는 손무를 신임하고 그때부터 군무를 맡겼고, 오나라는 춘추 시대의 강자로 급부상했다.

자유한국당이 공천 물갈이를 선언했다. 자유한국당 총선기획단은 21대 국회의원 총선거에서 현역 의원 절반을 물갈이하기로 방침을 정하고 이를 위해 3분의 1 이상 컷오프하는 내용의 공천 룰을 발표했다. 현역 3분의 1 이상 컷 오프 기준은 지역구 의원에게 적용되는 살생부 기준선이다. 이대로라면 현재 한국당 지역구 의원 91명 중 하위 30명가량이 공천에서 배제된다. 비례대표(17명) 및 총선 불출마자까지 포함해 전체 의원(108명) 중 절반은 잘려 나가는 셈이다. 당장 반발이 거세졌다. 영남권을 중심으로 기득권에 똬리를 튼 일부 의원들은 "수치를 정해놓고 잘라내는 것이 의미가 있느냐"며 보여주기식 인적 쇄신은 개혁공천이 아니다며 반기를 들고 있다. 니가가라 하와이식이다. 지난 19대 총선 때 새누리당(한국당의 전신) 현역 의원 교체율은 41.7%, 20대 총선은 23.8%였다. 돌이켜보면 현역 교체가 절반 수준 가까이 간 선거는 대체로 승리했다. 여든 야든 그랬다. 안주보다 혁신을 바라는 유권자의 표심이 만든 결과다. 

김세연은 알고 있었다. 과거 여권의 기득권에 기댄 보수정당이 위기에 빠진 순간 어떻게 다시 민심을 얻을 수 있었는지 듣고 보고 배운 경험치가 있다. 바로 그의 선친 김진재 의원 이야기다. 5선 의원인 그의 선친은 당선이 유력하던 지난 17대 총선을 앞두고 불출마를 택했다. 당시 한나라당은 2004년 고 노무현 전 대통령 탄핵 열풍과 2002년 '차떼기' 사건으로 최대 위기를 맞았다가 기사회생했다. 17대 총선에서 50석도 못 건질 것이라는 당초 예상을 뒤엎고 121석을 얻었다. 당시에도 다선 의원의 용퇴가 줄을 이었다. 보수의 심장이던 부산에서는 김진재 의원을 비롯해 박관용 유흥수 등 3선 이상 중진이 대거 불출마했다. 물론 보수가 총선에 승리한 선거는 아니었지만 부산은 18개 선거구 가운데 17곳, 경남도 17석 중 14석을 한나라당이 차지했다. 이 중에 초선 의원이 부산과 경남에서 7명씩 나왔다. 열린우리당이 절대집권으로 한나라당을 심판할 것이라는 예상치가 완전히 빗나간 선거였다. 

앞선 총선의 경험치가 있기에 자유한국당의 젊은 피들은 개혁을 외친다. 자유한국당 초선 의원들은 당의 전·현직 지도부와 대권주자로 분류되는 중량급 정치인들을 향해 내년 총선에서 소위 '험지 출마'도 마다하지 말라고 요구한 것도 이런 맥락이다. 한국당 초선 의원 44명 가운데 25명은 이미 의지를 지도부에 던진 상황이다. 초선의원들은 한국당의 인적쇄신과 관련해서 "우리도 인적혁신을 하는 과정에 있어서 예외의 대상은 아니다"며 "초선 의원들도 통합과 총선 승리에 도움이 된다면 모든 기득권을 내려놓고 당에 (거취를) 일임하겠다"고 밝혔다. 이들은 "3선 이상 중진 의원들이 그런 용기나 큰 뜻을 품어줬으면 고맙겠고, 초선 의원들도 당의 결정에 따라서 어디가 됐든, 어떤 일이 됐든 시키면 하겠다"며 "공천에서 탈락해도 무소속 출마를 한다든지 당에 해를 끼치지 않고 거기에 승복하고 당을 위해 열심히 하겠다"고 뜻을 모았다. 그 응답이 김세연이었지만 그 이후는 기득권 싸움이 됐다. 말짱 도루묵이다. 

과거는 현재를 위해 잊을만하면 경구를 던진다. 개혁공천은 숫자로 하는 게 아니라 행동으로 하는 것이라며 연일 중진들의 결단을 요구하는 신호를 보내지만 귀를 닫았다. 당장 개혁공천의 총대를 멘 황교안 대표는 단식결기에 돌입하기 전 "총선에서 패배하면 물러나겠다"며 용퇴를 곡기 끊기로 바꿔버렸다. 총선 패배 후 용퇴는 자신의 뜻이 아니라 민심인데도 사오정 답변을 한다는 목소리가 터져 나온다. 

장외인사로 전락한 홍준표의 논평은 더 가소롭다. 그는 김세연의 불출마 선언이 나오자 "환영한다"면서도 스스로는 "장내로 들어가 마지막으로 인생을 정리하는 정치를 해보려 한다"며 "나를 두고 시비를 거는 것은 옳지 않다"고 자신을 향해 오는 험지 출마 압박을 일축했다. 홍 전 대표는 "내가 굳이 8년이나 쉰 국회의원에 다시 출마하려는 이유는 네 번이나 험지에서 한 국회의원을 한 번 더 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정권 교체를 위해서 마지막으로 여의도에 가야겠다는 것"이라며 깃발만 꽂으면 당선 가능한 지역구를 택할 뜻을 분명히 했다. 

바로 이 지점이 오늘의 자유한국당이 가진 한계다. 도끼로 찍어내리는 결단이 필요하다고 입으로는 떠들면서도 행동은 반대다. 니가가도 나는 안 간다는 하와이행 편도 항공권이다. 마이 묵었지만 아직도 배가 고프다는 쪽은 아랫목을 잊지 못한다. 아무리 군령을 외치고 도끼를 들어도 낄낄거림은 멈추지 않는다. 삼령오신이다. 그래서 기득권의 입에서 나오는 개혁공천이라는 외침은 구린내만 풍길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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