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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로등

                                                                          이나혜 

가로등은 마을 이장님 같으십니다
더 높은 분 하느님 같으십니다

별말씀 없이
저녁마다 좁은 골목 안길을 있는 그대로
아주 부드럽게 살펴주십니다

땅거미가 진 골목 끝
구부리고 있는 지붕들과
쭈그리고 사는 사람들에게
햇빛보다 더 환한 불을 켜 주십니다

궁금한 것은
엊저녁 일어난 주공마트 집 사단(事端)을
가닥가닥 훤히 다 아시면서도
아침이면 뚝 시침을 떼시는 일

이장님께도 하느님께도
오늘은 무슨 일이 생기셨는지
수리공이 꼭대기에 올라가 있습니다

△이나혜: 1976년 전남 신안 출생. 한국방송통신대학교 문예창작콘텐츠학과 석사과정 졸업. 2016년 '문학청춘' 신인상. 2018년 인천문화재단 출판기금 수혜. 시집 '눈물은 다리가 백 개' 출간.

하느님이 뭐 별건가. 하느님 얼굴도 모르잖는가 우리는. 그러나 마을의 이장님은 동네에서 일어나는 일을 훤히 꿰뚫고 있다. 누구네 제사, 생일잔치, 환갑, 팔순, 길흉사를 죄다 꿰고 집집의 숟가락 개수까지 알고 있다. 대처에 나간 아들딸이 언제쯤 온다는 것은 기본이고 인사 올리려 경로당에 들어오는 음식의 물목까지도 알 수 있어 미리 상차림부터 대비를 한다. 새로 전입 전출을 하더라도 반드시 이장님을 알현해야한다. 올해는 어떤 농사가 유리할지, 거름, 비료, 농약도 이장님의 소관이다. 수도, 전기, 보일러가 고장 나도 이장님 손을 건너야 한다. 아픈 사람이라도 생기면 날 잡은 하루가 된다. 이렇게 묵묵히 동네를 내려다보며 궂은 일 도맡아서 만능 꾼으로 거듭거듭 나는 하느님 같은 이장님이시다.


요즘 집안에 갇혀 있다가 어쩌다 밖으로 나가보면 모두 마스크를 쓴 좀비 행렬밖에 없다. 손잡고 길을 가거나 웃으며 이야기하는 것도 먼 옛날이었지 싶다. 아래만 쳐다보고 걷거나 휴대폰을 들여다보며 표정도 감정도 사라진 좀비 같은 세월을 살고 있는 것 같지 않은가. 눈에 보이지 않고 냄새도 소리도 없는 이 역병을 만능꾼 이장님이 가만 두실 리가 없다.
 

박정옥 시인
박정옥 시인

낮의 고단함에 묻힌 조용한 밤. 이장님은 따스한 눈길로 온 마을을 내려다보고 계신다. 낮이고 밤이고 그저 묵묵히, 알면서도 모르는 척을 해야 할 때가 있는 것이다. 지금 이장님은 알면서 모른 척 시침을 떼고 우리를 내려다보며 궁리할 것이다. 이 역병을 이기는 힘은 우리가 갖고 있다는 걸 아신다. 우리 마음속에서 늘 다툼이 일어나는 것은 두 마리 늑대 때문이고 나쁜 늑대와 착한 늑대 중 누가 이기는지 지켜보고 계신다. 두 마리 중 우리가 어떤 늑대에게 먹이를 주는지 그 먹이를 받아먹고 크는 늑대가 이긴다는 것을 알고 계신다. 우리 마을 이장님은 하느님보다 위에 있다. 박정옥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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