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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2년 울산공업센터를 시찰하는 군복 차림의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과 울산 출신인 이후락 국가재건최고회의 공보실장(왼쪽 첫번째). 울산상의 제공
1963년 울산공업센터를 시찰하는 군복 차림의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과 울산 출신인 이후락 국가재건최고회의 공보실장(왼쪽 첫번째). 울산상공회의소 제공

공업도시 울산의 역사를 듣기 위해 한삼건 교수와 울산박물관에서 만났다. 이 곳엔 울산의 주요 산업현황과 산업발달사를 체계적으로 정리한 산업사1·2관이 상설전시관으로 운용 중인 때문이다. 울산의 근대산업에서부터 미래형 산업도시로의 비전을 담은 안내와 전시물이 간략하지만 체계적으로 정리돼 있어 지역 산업사를 이해하기에는 제격인 곳이다.
 
울산시가 대통령 공약으로까지 반영시켰지만 결실을 맺지 못한 국립산업기술박물관 건립의 아쉬움을 그나마 달래고 지역의 공업발전사를 조금이라도 이해할 수 있는 장소이기도 하다. 한 교수는 이곳에 그동안 확보했던 각종 전시자료와 영상자료를 제공해 울산의 공업역사를 쉽게 이해할 수 있게 하는데 적잖은 도움을 주기도 했다.
 
# 울산이 공업센터로 지정된 진짜 이유
울산이 지금의 특정공업지구, 공업센터로 지정된 이유와 배경은 무엇일까. 울산상공회의소가 1981년 펴낸 '울산의 성장과정과 지역적 특성'이라는 제목의 연구보고서에서는 그 이유를 △울산이 가진 입지적 특성의 우수성 △당시의 정책 입안자가 대부분 군인이어서 6·25의 경험을 살려 안전한 울산의 위치를 고려 △ 경제인협회 명의의 울산개발 건의 등 세 가지로 꼽고 있다.
 
그러나 한삼건 교수는 전혀 다른 이유를 제시한다.
"일본제국이 울산을 임해공업지역 적격지로 결정해서 실제로 개발을 추진했기 때문에 이미 검증이 됐고, 일본인이 남긴 수백만평의 공장 부지가 국유지(적산)으로 남아 있어서 개발 비용이 그만큼 절감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박정희 정권에 의한 울산공업센터 지정 과정이 너무나 일사천리로 진행된 것도 한 교수의 이 같은 주장을 뒷받침 해 주고 있다. 

울산개항장 지정. 최종 출고 불투명
1963년 울산개항장 지정 알리는 경축탑이 세워진 중구 학성동 울산역 앞을 지나는 울산시민들. 울산상공회의소 제공
1964년 5월 7일 열린 대한석유공사 울산정유공장 준공식. 국가기록원 영상캡처
1964년 5월 7일 열린 대한석유공사 울산정유공장 준공식. 국가기록원 영상캡처

울산특정공업지구 지정 과정을 날짜별로 보면, 1962년 1월 4일에 울산공업센터 지정 가능성에 관한 토의와 조사단이 결성된다. 이어 3일 후인 7일부터 14일까지 조사단에 의한 울산 현지 조사가 이뤄진다. 조사 도중인 10일에는 지금의 전경련격인 경제인협회가 울산을 공업센터로 지정해 달라는 건의서를 제출한다. 1월 13일에는 제1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이 발표되고 25일에는 울산특정공업지구 의결주문이 있었다. 25일에는 울산특정공업지구가 결정돼 공포된다. 이어 마침내 2월 3일에 울산군 대현면 매암리 납도 언덕에서 울산공업센터 기공식이 열린다.

울산공업센터 지정 가능성에 대한 첫 논의가 있었던 1월 4일부터 기공식이 있었던 2월 3일까지 불과 한 달여만에 국가 백년대계 사업이 기획되고 추진된 것이다. 이후 4개월 뒤 울산시가 탄생한다. 이처럼 공업도시 탄생이 마치 짜여 진 각본이 있었던 것처럼 일산천리로 진행된 것이다.
 
한 교수는 이를 두고 "짧은 기간 내에 국민들에게 가시적인 성과를 보여야 하는 군사정부로서는 다른 것을 돌아볼 여유도 대안도 없었던 것 같다"고 분석했다.

1960년대 울산석유화학공단내 정유공장의 모습. 울산상의 제공
1960년대 울산석유화학공단내 정유공장의 모습. 울산상공회의소 제공

# 울산공단 개발에는 기초 텍스트가 있었다
박정희 정권이 가시적인 성과를 내기 위해 참고했던 울산공단 개발의 기본 텍스트는 무엇이었을까. 한 교수는 일본의 일간지인 '서일본신문' 1965년 8월 11일자를 주목한다. 이 신문은 '맨 얼굴의 한국'이라는 울산공업센터 르포기사를 실었다.
 
『재미있는 것은 울산개발은 2차 대전 중의 일본 측 유산이 고스란히 반영된 점이다. 항만은 조선축항주식회사가 인구 50만의 공업도시 육성을 목표로 계획한 항만 축조와 같고, 현재의 정유공장은 전쟁말기 일본이 북한에서 이설한 조선석유 시설부지를 활용하고 있다. 공업용수 조사도 일본 식민지 시기에 완료된 것을 대부분 그대로 활용한 것 같다.』
 
이 신문은 울산공업센터 개발이 일본이 그려놓은 인구 50만의 공업도시 육성 목표 계획을 그대로 반영했다고 기술하고 있다.
 
여기에서 밝힌 일본의 울산공업도시 계획은 이케다 스케타나라는 사람에 의해 만들어졌다. 한 교수에 따르면 이케다는 1928년 조선총독부의 승인을 받아 지금의 부산 자갈치시장이 있는 남포동 지역의 부산남항을 개발한 인물이다. 이케다는 만 52세가 된 1937년 울산항 축항 및 인구 50만 공업도시 계획 수립을 시작했고, 1941년에는 조선총독부로부터 여천동 등지의 바다 매립 면허를 취득한다.
 
이후 1942년 12월에 울산개발 계획을 조선총독부로부터 최종 허가 받았고 이를 기념해 1943년 5월 11일 지금의 학성공원에서 인구 50만 공업도시개발 기공식을 성대하게 개최한다.
 
한 교수는 "이 같은 계획에 따라 울산은 공장부지 매입과 항만 매립공사, 철도부설 등의 공사가 진행되고 원산에 있던 조선석유공장 이전이 70% 정도 진척돼 가던 1945년 8월 15일 일본이 항복하면서 모든 개발은 중단되게 이르렀다"면서 "이케다가 추진하던 울산개발계획을 박정희 정권이 1962년 1월 울산공단개발로 이어갔다"고 했다. 이케다의 울산개발 계획이 중단된지 17년만의 일이다.

한 교수는 "그러나 이케다의 울산개발은 어디까지나 대일본제국을 위한 병참기지 건설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을 뿐 '울산을 위한 계획'은 아니었다. 이 점은 해방 후 1962년에 추진된 박정희 정부의 울산공업센터 계획에서도 동일하게 읽히는 대목이다. 당시 국가재건최고회의는 '겨레의 빈곤탈출'이라는 혁명정부의 공약을 실천하기 위한 수단으로 울산을 선택했다. 울산공업도시 개발은 분명 성공했지만, 울산에서 살고 있고 앞으로도 살아갈 사람들에게는 공업만 생각하고 달려온 지난날의 빛나는 성과만큼 그림자도 짙은 것이 사실이다"고 지적했다.
 
1962년 2월 2일 울산공업센터 기공식 하루 전. 울산공업센터 기본 개요가 국내 언론을 통해 발표된다. 제1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의 상징인 울산을 인구 50만의 공업센터와 문화도시로 종합개발하다는 게 내용의 핵심이다.
 
울산에 정유공장, 석유화학공장, 비료공장, 종합제철소 및 화력발전소와 공장지구, 상가지구, 주택지구 등을 건설하며 1억 6,170만㎡에 1,197억환의 원화와 2억 526만 달러의 외자를 집중 투자한다는 계획이 소개됐다.
 
정유공장은 대현면 고사리의 구 조선석유부지 등 66만㎡에 1962년 9월 착공해서 64년 5월에 준공하며, 비료공장은 달리2구의 구 울산비행장지역 132만㎡에 1962년 6월 착공해 1964년 12월에 준공한 것으로 돼 있다. 제철공장은 64년 4/4분기에 착공해서 1967년 완공 예정이라고 밝혔다.
 
여기에서 주목할 것은 대부분의 시설이 계획대로 진행됐지만 비료공장 위치는 바뀌었고, 종합제철은 현실화 되지 못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한 교수는 "이병철 씨가 대표인 비료공장 부지는 달리2구의 구 울산비행장이라고 했지만, 이곳이 모래·흙 따위가 쌓여 이뤄진 충적지로 기반암까지 깊이가 너무 깊어 공장부지로 적합하지 않은 것으로 결론이 나면서 비료공장은 지금의 여천·매암동으로 바뀌었다. 또 종합제철공장 위치도 북구 염포·양정동 일대에서 지금의 매암동으로 바뀌었다. 북구 염포·양정동 일대가 삼산처럼 연약지반이어서 기초공사가 어렵고 공사비도 늘어나는 문제 때문이었다. 결국 건설비용을 마련할 길이 없어서 보류된 다음 한일국교정상화 이후 대일청구권 자금이 들어오면서 종합제철은 포항에 자리잡게 된다"고 설명했다.

울산 남구 선암동과 울산석유화학공단 전경.
울산 남구 선암동과 울산석유화학공단 전경. 
울산 남구 신선산에서 바라본 선암호수공원과 울산석유화학공단의 전경.
울산 남구 신선산에서 바라본 선암호수공원과 울산석유화학공단의 전경. 국내 최초의 공업용수 전용댐으로 조성된 선암댐은 현재 호수공원으로 다듬어져 시민들이 휴식공간으로 널리 찾고 있다.

# 종합제철이 계획대로 울산에 왔더라면…
당초 원안대로라면 지금의 백화점과 호텔이 들어선 삼산지역에 비료공장이 서고, 현대자동차가 자리잡은 지역에 종합제철이 들어서면서 울산의 지형은 지금과 전혀 다른 모습이 될 뻔 한 것이다.
 
울산이 공업도시로 조성되면서 함께 만들어진 것은 공업용수 공급을 위한 댐 조성이었다. 물은 각종 용기를 세척하거나 냉각 등의 제조 과정에서 꼭 필요한 자원이다. 울산에 산업단지가 조성되면서 공업용수 공급을 위해 축조된 댐은 사연댐, 대암댐, 선암댐이다.

이 가운데 선암댐은 공업용수 공급용으로 가장 먼저 축조됐지만 지금 현재는 시민을 위한 공원시설로 활용되고 있다. 1962년 공사가 시작돼 1963년에 완공된 중앙차수벽식 토석언제다. 선암댐은 사연댐과 대암댐 물을 받아서 인근 선암정수장에서 정수한 다음 각 공장으로 공급됐다. 이 과정에서 많은 실향민이 생겨났다.
 
한 교수는 "선암호수공원 입구에는 청송 심씨와 김해 김씨 50여 가구가 모여 살던 대리 마을이있었는데 댐 축조로 수몰됐고, 댐 둑의 북쪽 끝에는 13가구의 새터마을이 있었는데 이 역시 둑에 들어가면서 사라졌다"고 말했다.
 
현재 암각화 보존 논란을 낳고 있는 사연댐 역시 공업용수 공급을 위해 축조된 댐이다. 1962년 10월 12일 시작돼 1965년 12월 28일에 완공됐다. 댐 조성으로 대곡리 본동인 한실마을, 반구대 앞의 반구마을, 신리마을, 시당마을, 그리고 반연리의 아랫옹태마을, 세연동마을 등 1,000여 가구가 사연댐 물 속에 잠겨야 했다.
 
한 교수는 "공단 개발로 인해 울산이 지금과 같은 대도시로 발전했지만 고향땅을 공장부지로 제공해야 하고, 공업용수 공급을 위해 마을 전체가 물에 잠겨야 하는 아픔을 겪어야 했던 울산 사람들의 슬픈 역사도 함께 기억돼야 할 것이다"고 강조했다.    글=전우수기자 jeusda@·사진=김동균기자 justgo999@

 

●한삼건 교수
· 울산대학교 명예교수
· 일본 교토(京都)대학 대학원 공학연구과 건축학 전공 박사과정 졸업(공학박사)
· (현) 울산광역시 지역혁신협의회 위원장, 울산광역시 동구 도시디자인 위원회 위원장, 울산시민연대 도시센터 대표, 남구고래문화재단 이사, 울산광역시 문화재위원
· (전) 대통령직속 국가균형발전 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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