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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영 이사 겸 편집국장
김진영 이사 겸 편집국장

지금 40대 중반 이상의 기성세대라면 누구나 기억하겠지만 오후 6시(여름철은 오후 5시) 거리는 부동의 자세가 됐다. 바로 국기하강식이다. 1982년쯤인가, 전두환 군사정권 시절 초반까지 이어진 이 의례는 비록 외형적이긴 하지만 1분 남짓한 시간 동안 모든 국민을 하나로 만들었다. 또 하나의 장면, 그보다 오랫동안 대한민국 극장에 가면 영화의 시작과 함께 애국가가 울러 퍼지고 관객들은 자리에서 일어나야 했다. 

독재시절에 대한 기억이다. 그 시절 황지우는 세태를 이렇게 비틀었다. <영화가 시작하기 전에 우리는/일제히 일어나 애국가를 경청한다/삼천리 화려 강산의/을숙도에서 일정한 군을 이루며/갈대숲을 이륙하는 흰 새 떼들이/자기들끼리 끼룩거리면서/자기들끼리 낄낄대면서/일렬 이열 삼렬 횡대로 자기들의 세상을/이 세상에서 떼어 메고/이 세상 밖 어디론가 날아간다...>

그런 기억이 한참 지나 거의 잊힐 무렵, '우리나라'의 광복회장 김원웅이 애국가를 작곡한 안익태의 과거행적을 비틀었다. 바로 친일적폐 청산이었다. 그는 광복절 날을 기다린 듯 등짝에 적폐청산을 짊어지고 이 땅에 남아 있다고 믿는 친일잔당을 향해 눈을 부라리며 버럭 고함을 질렀다. 광복회장다운 외침이자 기개였다. 그의 외침 앞에 버티고 선 연설대 상단에는 태극문양과 함께 있어야할 대한민국이라는 이름은 사라지고 '우리나라'라는 생뚱맞은 상징어가 그의 외침을 대변했다. 그 위세 때문일까. 김원웅은 한발 더 나아가 친일인사들에 대한 단죄도 주장했다. 지금 국립현충원에 안장되어 있는 친일·반민족 인사 69명의 묘를 이장해야 한다는 외침이었다. 

김원웅의 기개는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그는 지난 20일 국회 소통관에서 '에키타이 안(안익태)만주국 건국 10주년 음악회 영상 공개' 기자회견을 열어 민족반역자가 작곡한 노래를 국가로 정한 것에 대한 문제 제기를 하여 애국가 교체의 불을 지폈다. 그리고 다시 목청을 가다듬고 친일잔당이 아닌 국민을 향해 선언했다. 당장 내년부터 광복회 주최로 '나라사랑하는 국가(國歌)'를 공모하여 진정 누구나 국가를 사랑하며 자긍심을 갖고 뜨거운 가슴으로 목청껏 부를 수 있는 국가를 만들겠단다. 간단히 말해서 애국가를 바꾸겠다는 이야기다. 광복회장이라는 자리가 나라의 노래까지 바꿀 수 있는 자리인가 싶었지만 며칠 전 광복절의 풍경을 되짚어 보니 그럴 수도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역대 어느 광복회장이 요즘처럼 뜨거운 논쟁거리의 중심이 된 적은 없었다. 실제로 역대 광복회장은 여당의 뒷배이거나 은퇴한 정치인들이 스쳐지나가는 자리 정도였다. 그런 자리가 권력의 실세로 부각했다는 이야기가 나오고 국론통합에 앞장서야할 사람이 국론분열에 혈안이 됐다는 비난이 쏟아졌다. 여당에서는 잘했다, 시원하다는 응원의 메시지가 터져 나오고, 야당은 그의 행적을 뒤져 '니는 뭐 그리 깨끗하냐'며 연일 십자포를 쏘고 있다.

그런데 야당의 총질에 응대하는 김원웅의 말이 개운치 않다. "(내가 보수정권에 몸담은 것은) 생계 때문이었다"는 답변과 "저는 (과거를) 지우려고 생각한 바도 없고 지우려고 한 적도 없다. 오직 부끄러워하고 반성하고 있다. 원죄가 있어서 원칙에 더 충실하겠다는 것"이라고 항변했다. 자신이 과거 전두환 정권과 한나라당 당적으로 국회의원에 출마했던 부분에 대한 대답이다. 이 장면에서 진중권이 발끈했다. 진중권은 언론에 기고한 글을 통해 "(김원웅은) 유신정권과 5공 정권을 위해 일한 바 있다. 그저 '생계'를 위해 한 일이었다는 변명이다. 친일도 생계를 위해 했지 어디 굶기 위해 한 짓이던가? 그런 그가 친일이 묻었다고 애국가를 버리란다."고 김원웅을 정면으로 비판했다.

김원웅의 해명을 듣는 순간 윤흥길의 완장이 떠올랐다. 건달 종술이는 완장을 차는 순간 돌변한다. 노란 바탕에 파란 글씨가 새겨진 감시원 완장은 건달 종술이의 과거를 뭉개고 자신을깔보던 이들에 대한 절대권력의 징표가 된다. 서푼도 안 되는 권력에 취한 종술의 마지막은 당연히 허망했다. 저수지에 들어와 낚시질을 하는 이들은 원칙대로 손을 봐줘야 한다는 건달 종술의 위세는 그에게 완장을 채워준 최사장이라는 뒷배 때문에 가능했다. 하지만 최사장이 종술이에게 위임한 권한은 저수지라는 자신의 재산을 지키라는 것이지 낚시꾼들을 제압하라는 것은 아니었다. 생계 때문에 과거 정권에 부역했지만 이를 원죄의식으로 삼아 더 원칙을 지키며 과거의 부역자를 제압하겠다는 그의 입술이 새빨갛게 달아 오른 것처럼 보이는 이유다.   

애국가로 돌아가 보자. 작곡가 안익태의 '한국 환상곡'에 나오는 이 노래는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며 애국가로 지정됐다. 장엄하고 웅장한 이 연주곡은 안익태의 지휘로 1938년 아일랜드 국립 교향악단의 연주로 더블린에서 처음 연주됐다. 훗날 안익태는 이 곡을 다시 고쳐 한민족의 대서사시로 재구성했다. 하지만 비공식적으로는 베를린에서 부른 것이 처음이다. 안익태가 애국가를 작곡한 동기는 베를린 올림픽과 연관성이 있다는 것이 정설이다. 안익태의 애국가가 만들어지기 이전에는 작사자 미상의 애국가의 가사에 서로 다른 곡을 붙인 노래가 떠돌았다. 안익태가 애국가의 가사를 처음 접한 것은 1919년 3.1운동 때였고, 그 뒤 애국가가 스코틀랜드 민요 'Auld lang syne(이별의 노래)'의 곡조에 붙여 불리는 것을 안타깝게 생각해 작곡을 결심하고 1936년에 곡을 완성한 것으로 전해진다. 완성이 1936년인 것은 바로 그해에 베를린올림픽에 일장기를 달고 참가한 한국선수단 때문이었다. 친일행적을 가진 그가 조선인들과 자신이 만든 애국가를 부른 것은 김원웅식 단죄로는 어떤 해석을 해야 할지 궁금해진다. 

김원웅의 지적이 아니라도 안익태의 친일 논란은 끊이지 않는다. 한국환상곡을 작곡해 세계 곳곳에서 대한민국을 알리는 애국자였지만 과거의 행적에서 발견된 몇 가지 친일행적들이 그의 발목을 잡았다. 대표적인 친일행적은 바로 일왕을 찬양하는 노래를 만들고 이를 연주했다는 행적이다. 이 부분은 어떤 변명으로도 뭉개지는 문제가 아니다. 다만 우리 현대사가 이 부분을 몰라서가 아니라 알고 있었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안익태가 김원웅처럼 생계를 위해 친일 부역을 했다고 볼 수는 없다. 어쩌면 완장을 찬 건달 종술이처럼 스스로 앞장 서 일왕에 아부했다는 것이 진실에 가까울 수 있다. 그렇다고 해도 산 넘고 바다 건너 베를린에 온 동포들을 위해 애국가를 만들어 함께 노래한 부분을 뭉갤 수는 없다.

무엇보다 40년대 일제강점기 막바지에 만주와 일제무단 통치하의 조선 곳곳에서 동포를 하나로 만든 애국의 노래 민족의 노래로 애국가가 불리었다는 점은 역사다. 어디 그 뿐인가. 한국전쟁과 4.19, 광주민주화운동과 6월 항쟁, 그리고 촛불혁명의 순간순간 마다 애국가는 민중의 가슴을 타고 흘러왔다. 그 역사를 부정하는 이라면 김원웅의 주장에 동의할 수 있다. 김원웅 스스로 그 역사를 인정한다면 그 입을 닫는 것이 맞다.  

지난 주말인 29일은 우리민족이 뼈에 사무치는 경술국치일 이었다. 바로 그 전날 아베는 사임을 발표했다. 8월의 하늘에 태극기와 애국가가 더 힘차게 보이는 것은 장엄하고 깊은 선율만이 아니라 일제강점기와 해방을 지나 질곡의 세월을 달려온 민중의 피와 땀이 국기와 국가에 배여 있기 때문이다. 왜인들이 떠받드는 일본의 국가 기미가요는 고려시대 황제 찬양가인 정석가를 빼다 박은 노랫말이다. 그 노랫말에 곡조는 나치 독일의 음악가 프란츠 에케르트가 완성했다. 에케르트가 일왕의 생일 기념곡으로 선물한 이 노래는 그야말로 현란한 아부의 메시지다. 메이지 일왕이 생일축가로 처음 들었을 때 스스로 도취돼 환희를 느끼자 아부신공을 자랑하는 눈치빠른 신료들이 아예 국가로 만든 역사를 가진 노래다. 그 기미가요를 우리 선조들은 하루에 1번 이상, 또한 각종 집회나 학교 조회시간, 일본 국기 게양과 경례 뒤에 반드시 부르는 수모를 당했다.

그 오욕의 역사를 품은 것이 대한민국이다. 부역자를 처단하고 부관참시하자는 말은 해방 직후에는 유용한 역사바로세우기다. 하지만 오늘의 시대에 친일적폐몰이는 어떤 수사를 달아도 의도가 순수해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광복 75년을 맞은 그날 왜, 광복회장은 대한민국이라는 신성한 국호를 지우고 '우리나라'라는 생뚱맞은 구어체를 연설대에 걸었는지부터 해명하는 것이 더 급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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