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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성은 울산의 뿌리다. 태화강변에 사람이 모여 살기 시작하면서 문명이 싹을 틔웠다. 그 문명의 뿌리가 결실을 맺은 곳이 학성이다. 울산의 역사가 시작된 지점이다. 신라말 고려초를 주름잡던 거상 박윤웅이 학성의 옛 주인이라면 지금의 학성은 신라 천년의 무역항과 임란전후 핏빛 역사를 되살린 울산인들이 주인이다. 그래서 학성은 역사시대 이후 울산의 뿌리다.  

 

학성은 울산왜성을 빼고 이야기하기 어렵다. 지금의 공원에 성이 만들어진 것은 아마도 임진왜란 훨씬 이전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국제무역항인 고대 울산의 지정학적 상황을 볼 때 울산왜성이 있는 곳은 조망권 1급지로 망루나 성곽이 존재했을 가능성이 높다. 이미 존재했던 성곽을 중심으로 왜장 가토가 일본식 성곽을 지었을 것이라는 추론이 가능하다. 이는 울산왜성 축성이 불과 40일만에 가능했다는 기록이 증명해 준다.

#포로 등 1만6천명 동원 울산읍성·병영성 헐고 40일만에 축조
1597년(선조 30년) 왜장 가토는 내륙에서 조명연합군에게 대패한 뒤 울산에 최후의 방어선을 구축했다. 가토가 구축한 울산의 최후 방어선은 울산왜성의 축조로 더욱 견고해졌다. 기록에 따르면 가토는 1만 6,000여 명의 병사를 동원해 밤낮으로 왜성 축조에 나섰다. 병사라고 하지만 실제 노동력은 포로로 잡혀 온 울산의 장정들이 도맡았을 가능성이 크다. 왜장 가토는 당시 울산 읍성과 병영성의 성곽을 헐고 돌과 목재 등 기존 자재를 이용해 40일 만에 최후의 방어선인 왜성을 완성했다. 그 성이 7년 전쟁의 마침표를 찍은 울산성전투로 무너졌다. 

임진왜란을 떠올리며 시선을 위쪽으로 돌리면 눈길이 충의사에 닿는다. 충의사는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중 왜군을 격파한 울산지역 의사(義士)들의 애국정신을 기리기 위해 그 위패를 모신 곳이다. 잘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지만 임진왜란 당시 전국에서 가장 먼저 의병이 발기한 지역이 울산이다. 왜군이 부산포를 공격한 것이 1592년(선조 25년) 4월 13일이었고 울산의 청년들이 기박산성에서 항전을 결의한 것은 불과 십여 일 후였다. 기박산성은 지금 울산 북구 중산동쯤으로 추정되고 있다. 기박산성에서 구국의 결의를 한 울산 의병들은 임란 7년 내내 혁혁한 전공을 올렸다. 

도산성전투도. 정유재란 당시 조·명연합군이 왜군이 머물던 울산 도산성(학성)을 에워싼 전투 상황을 병풍에 그린 그림. 울산시 제공
도산성전투도. 정유재란 당시 조·명연합군이 왜군이 머물던 울산 도산성(학성)을 에워싼 전투 상황을 병풍에 그린 그림. 울산시 제공

#기박산성 구국결의한 울산의병, 임란 7년간 혁혁한 전공 세워
개운포에서 3차에 걸친 해전을 벌였고 병영성 탈환과 울산성전투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젊은이들이 목숨을 던지며 나라를 지켜냈다. 전란이 끝나자 선조는 이들의 전공을 치하하고, 당시 울산군과 언양현을 통합해 울산을 도호부로 승격하는 조치를 단행했다.

바로 이들의 희생을 기리기 위해 울산시는 1994년 2월 사당 건립에 들어가 2000년 6월 모두 10동의 건물을 완공해 충의사라고 이름 붙였다. 목숨을 내놓은 열사들의 위패가 모셔진 제당에 오르면 왜성과 태화강, 울산항이 한눈에 들어온다. 왜성이 발아래 포복 자세로 고개를 굽힌 자리, 이곳에 조명연합군은 울산성 전투의 야전사령부를 설치하고 가토의 심장을 겨눴다.

#태화강∼울산왜성∼학성2공원 잇는 5.7㎞ 구간 탐방로
학성은 울산의 오래된 이름이다. 기록에는 지금의 학성동과 복산동 일대로 추정되는 '학성'이 신라 말기에 계변성(戒邊城)으로 부르다가 신학성(神鶴城)으로 개칭했다지만 영물인 학이 이 지명에 등장하는 것은 대체로 특정 인물의 신격화를 위한 수단으로 보인다. 바로 그 인물이 박윤웅이다.

옛사람들로부터 이어지는 이야기는 이렇다. 이 일대가 '신학성'으로 불리게 된 것은 신라 효공왕 5년에 한 쌍의 학이 울어 이 지역의 사람들이 신학(神鶴)으로 불렀는데 사실은 박윤웅의 출생을 미화하려 했던 스토리텔링으로 보는 것이 맞을 것 같다. 망국의 길을 걷던 신라말, 울산의 호족이었던 박윤웅은 오늘로 치환하면 울산에 기반을 둔 재벌이었다.

지금의 반구동으로부터 아래로 개운포에 이르기까지 울산은 고대 통일신라의 국제무역 통로의 중심이었다. 울산왜성의 동쪽을 따라가다 만나게 되는 울산의 고대 항만시설 유적이 그 증좌다. 한 건설업체가 대규모 아파트를 지어놓은 이곳은 신라의 대외 교류를 엿볼 수 있는 당(唐)대 중국제 자기(해무리굽 자기) 출토와 항구 배후시설을 보호하기 위한 시설로 추정되는 목책시설(나무울타리)이 확인됐다. 이는 곧 이 일대가 고대 울산항으로 추정할 수 있는 근거로 볼 수 있다.

정유재란 당시 왜장 카토 기요마사가 쌓은 학성(도산성(島山城), 울산광역시 문화재 자료 7호)에 울산읍성의 돌을 빼내 성을 쌓은 흔적이 남아 있는 남쪽 성벽.  김동균기자 justgo999@
정유재란 당시 왜장 카토 기요마사가 쌓은 학성(도산성(島山城), 울산광역시 문화재 자료 7호)에 울산읍성의 돌을 빼내 성을 쌓은 흔적이 남아 있는 남쪽 성벽. 김동균기자 justgo999@

#박상진 의사 기념비·구강서원 등 지역 역사 따라 걷는 길
울산의 국제무역항 흔적은 바로 울산이 로마~중국 광주~경주로 이어지는 해양실크로드의 동쪽 끝 또는 신라 최대의 무역항이라는 학설을 뒷받침하는 근거가 되는 셈이다. 바로 그 국제무역항을 통해 부를 축적한 박윤웅이 자신의 근거지로 삼은 곳이 학성이다. 박윤웅은 신라의 멸망 앞에서 신라와 함께 고려에 투항하지 않고 독자적으로 미리 투항할 정도로 세상의 흐름을 미리 읽을 줄 아는 눈을 가진 인물이었다. 이 때문에 울산은 신라가 멸망한 직후 망국의 수도에 연대해 있었지만 박윤웅은 고려의 개국공신이 되고 학성은 흥려부라는 이름으로 명맥을 유지했다.

#울산의병 위패 모신 충의사 오르면 태화강·울산항도 한눈에
바로 이곳에 울산 태화강~학성공원(울산왜성)~학성2공원을 잇는 '학성역사체험 탐방로'가 조성됐다. 총연장 5.7㎞ 구간으로 문화자료(제7호) 울산왜성(학성공원), 대한광복회 총사령을 지낸 고헌(固軒) 박상진 의사 기념비,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당시 왜군과 맞서 싸운 울산 지역 의사 227위를 모신 충의사, 포은(圃隱) 정몽주, 회재(晦齋) 이언적 유학자의 위패를 모신 구강서원 등이 자리하고 있는 곳이다. 바로 이 탐방로를 따라가면 비교적 울산의 근대와 마주할 수 있다.

울산왜성을 걷다 보면 지금도 성벽 곳곳에서 전쟁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곳이고, 충의사는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당시 왜군과 맞서 싸운 울산지역 의사와 이름 없이 순절한 무명제공신위(無名諸公神位)를 함께 봉안하고 있다. 이곳은 곧바로 박상진 의사 기념비와 더불어 애국충절의 정신을 되새길 수 있는 살아 있는 울산 정신문화의 산실로 면면히 이어지고 있다.  김진영 편집국장 cedar0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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