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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휴 동안 울산의 외곽을 한 바퀴 돌았다. 반구대암각화부터 언양읍성과 옹기마을을 돌아 간절곶에서 환한 햇살 맞고 장생포와 대왕암을 거쳐 정자해변까지. 바이러스에 감염된 명절이지만 5일간 이어진 연휴는 여유 그 자체였다. 인파가 붐비는 관광지에서 걱정스런 표정이 이어졌지만 가능한 개인 방역에 애를 쓰는 모습을 통해 이제는 방역이 일상화됐다는 느낌도 받았다. 말 그대로 이번 추석 연휴 기간 울산의 주요 관광지는 코로나19와는 별개인 세상이었다.    

울산의 외곽을 둘러보면서 유난히 반구대암각화로 가는 길에서는 사연이 많았다. 언양에서 경주로 향하는 길 이름은 반구대로다. 일부 내비게이션 제작사들은 반구대로를 달리다 암각화 주변에 이르면 "여기는 선사시대 기록물이 새겨진 반구대암각화가 있는 곳입니다"라는 친절한 안내 멘트가 나온다고 하지만 필자는 아직 그런 멘트를 들어본 적이 없다. 

이번 연휴에도 그랬다. 울산에 살지 않는 지인들은 반구대로 향하는 초입부터 왜 이 길 이름이 반구대로인가를 물어왔다. "울산은 도로 이름이 특이한 것들이 많다"며 "법대로, 이예대로 등등 생각나는 것이 그런데 이 이름은 어떤 사연이 있나"며 물어본다. 그런 질문을 듣고 나서 울산을 둘러보니 참 불친절하다. 반구대암각화든 간절곶이든 대왕암이든 장생포든 어디를 가도 낯선 이들을 친절하게 맞아주는 콘텐츠는 없다. 하물며 태화강국가정원은 생뚱맞다. 입구에 심플한 디자인의 입간판만 있을 뿐, 이곳이 대한민국 제 2호 국가정원이며 왜 태화강이 국가정원으로 만들어졌는지에 대한 이야기는 안 보인다. 

울산시가 얼마 전 이예대교로 불리던 태화강 신설 교량 이름을 '국가정원교'로 정했다. 이름을 지은 지명위원회는 울산 시민뿐만 아니라 태화강 국가정원을 방문하는 방문객에게 누구나 알 수 있는 인지도 높은 다리 이름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이 이름을 지었다고 부연설명을 달았다. 이예대교가 국가정원교로 바뀐 이유가 인지도 때문이라니 딱히 할 말은 없지만 그 다리로 통하는 길 이름은 국가정원길이 아닌 것도 수상했다. 그 길의 이름은 이예로다. 십중팔구는 이예로를 지나며 "이예로가 뭐지?"라는 질문을 받거나 하게 된다.  

몇 해 전 조선 첫 통신사 이예의 여정을 따라 대학생들이 '통신사의 길, 사행 1만리' 여정에 나선 적이 있다. 조선통신사 관련 기록물의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를 기념한 이 행사는 조선통신사 바닷길유적 탐방사업 일환으로 실시됐다. 바로 그 통신사의 길에 선봉에 선 인물이 울산 출신 외교관 이예다.

농소~옥동 연결도로인 이예로. 이 도로가 왜 이예로인지 아무런 설명이 없다.
농소~옥동 연결도로인 이예로. 이 도로가 왜 이예로인지 아무런 설명이 없다.

조선 초기 인물인 이예는 근대 이전 대일외교를 주도한 전문 외교관으로 평가받는 인물이다. 일본 땅을 처음 밟은 것은 1,400년이었다. 여덟 살 때 왜구에게 잡혀간 어머니를 찾기 위해 대마도에 갔지만 성과 없이 돌아왔다. 이후 43년 동안 조선통신사 등으로 40여 차례나 일본에 파견돼 한·일 간 정치·문화 교류를 이끄는 외교사에 업적을 남겼다. 이예의 업적은 조선 초 한일관계의 근간이 된 계해약조(癸亥約條·1443) 체결을 주도한 것이 첫째다. 계해약조는 대마도 왜인들의 무역과 근해 어업을 허용하는 대신 무역선 숫자 등을 대폭 제한한 조약이다. 

울산시청 앞에는 이예의 업적과 연관된 조선통신사의 길이라는 표지석이 있다. 이 표지석은 말 그대로의 표지석은 아니다. 표지석은 사실을 바탕으로 고증을 거쳐 설치하는 것이 맞지만 울산의 조선통신사 표지석은 그야말로 그냥 기념하는 돌에 불과하다. 조선통신사 일행이 지금의 울산시청 앞을 지나가지 않았기 때문이다.

조선통신사 일행은 서울 숭례문 앞 표지석을 시작으로 경기도 용인시, 충북 충주시, 경북 문경 안동 영천 경주를 지나 울산과 양산을 거쳐 부산에 도착했다. 울산을 통과한 통신사의 행렬은 정확한 기록은 없지만 경주를 지나 양산으로 가는 길이었으니 지금의 동헌이 위치한 울산도호부를 지났을 것으로 보인다. 

울산의 경우 지난 2007년부터 도로명 주소 표기가 시행된 이후 3,722개소의 도로에 이름을 부여했다. 도로명은 도로명주소법에 따라 지명, 역사적 인물의 이름, 공헌자, 유적 및 문화재의 이름, 상징성 있는 공공시설물의 이름 등을 반영하는데 구·군이나 시에서 도로명주소 위원회를 열어 심의를 거쳐 결정하고 있다. 

문제는 이렇게 지어진 도로명 가운데 상당수는 배경지식 없이는 쉽게 그 의미를 짐작하기 어려운 경가 많다는 점이다. 대표적인 이름이 이예로와 박상진로다. 박상진은 일제강점기 때 활동했던 울산 출신의 독립운동가이며, 이예는 조선 초기 불안정하던 일본과의 관계를 안정시킨 울산 출신의 외교관이라고 이야기해주면 되지만 행정은 불친절하다. 그 정도의 배경지식도 없느냐고 면박을 줄지 모르지만 울산을 처음 찾은 사람에게 울산의 인물을 공부하고 오라는 건 무리다. 아니다. 울산에 살고 있는 사람들 가운데 상당수는 이예는 고사하고 박상진에 대해서도 알지 못하는 이들이 수두룩하다. 

울산에는 역사성과 상징성을 가진 곳이 의외로 많다. 우리나라 최초의 비행장이 들어선 곳이 삼산들이었다는 사실을 아는 이는 얼마 되지 않는다. 일제강점기 때 1921년 울산-경주간 철로가 만들어지면서 성남동에 건립된 울산 최초의 기차역과 학산동의 옛 울산역사터도 주목할 곳이다. 일제강점기인 1933년에 지은 옛 울산읍청사터도 기억할 곳이다. 이곳은 울산이 시로 승격되면서 한때 시청사로도 쓰였다.

1914년에 문을 연 울산 최초의 은행 옥교동 옛 상업은행터와 그 곁의 옛 울산상공회의소 건물은 근대울산의 핵심이다. 이곳에는 또 하나의 상징적인 역사가 있다. 전남 신안군 지도에서 시작된 24번 국도의 종점이 바로 여기다. 이곳에는 이를 기념하는 표지석이 있었지만 지금은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는다.

울산 체육의 요람이었던 복산동의 옛 울산공설운동장도 표지석이나 기념물도 없다. 울산이란 지명을 있게 한 우시산국의 중심지 울주군 웅촌면 검단리와 태화강의 이름을 낳게 한 태화사터와 울산도호부의 사직단이 있었던 중구 태화동 옛 태화동사무소 주변은 기념하고 상징해야 하지만 어떤 이도 관심을 갖지 않고 있다.  

얼마 전 울산 울주군에서 '지명이야기' 홈페이지 운영을 시작했다. 인문 지명지리정보 홈페이지 '울주군 지명이야기'는 지명과 관련된 자연마을 유래, 설화, 역사유적, 생활풍속, 종교, 언어, 정신문화 등 지명과 관련된 인문학적인 정보를 담고 있다. 이 내용에 GPS 위치가 포함된 디지털 지리정보로 가공해 유·무형의 향토문화를 보존하고 적극 홍보하기 위해 구축됐다.

앞으로 울주군은 지명 유래 조사나 지명 위치 찾기, 산업공단 조성 또는 댐 건설공사 등으로 사라졌거나 사라져 가는 옛 지명을 추적하는 것은 물론 조사·수집하고 기록하는 작업 등은 앞으로도 지속적으로 추진해 나갈 예정이라니 반가운 소식이다.

울산은 근대화의 기수이자 산업화의 중심지로 성장했지만 사실은 오랜 역사성을 가진 도시다. 그렇기 때문에 어느 도시보다 많은 문화적 자산을 가지고 있는 도시가 울산이다. 문제는 이같은 문화적 자산이 제대로 자리를 잡지 못한다는 점이다. 실제로 울산은 대내외적으로 역사성이나 문화적 전통성에서 소홀하게 다뤄지고 있고 지역민들조차 이 부문에 대해서는 잘못 인식하고 있는 경향이 짙은 것도 사실이다.

땅의 이름이나 도로의 명칭은 결국 우리 조상의 사고와 의지가 담겼고, 생활 풍습과 지역 문화의 발자취를 찾아볼 수 있는 귀중한 문화재라는 점에 근거하고 있다. 산업수도로 인식된 울산은 그동안의 공업단지 조성과 주거공간 확보 등에 따른 개발 과정에서 많은 지명이 파괴·변질돼 사라졌거나 사라지고 있는 안타까운 상황에 처해 있다. 지금부터라도 제대로 알고 바꾸고 고쳐 후대에 울산의 정신을 제대로 이어지게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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