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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주 울산시에서 장기간 자리가 비어있던 울산박물관장을 새로 임명했다. 신임 관장은 대곡박물관장으로 일하던 신형석 관장이다. 신 관장은 박물관에 특별한 가치관을 가진 사람이다. 그는 박물관에 대해 "과거를 통해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을 확인하고, 개인과 지역의 미래 비전을 제시하는 콘텐츠 창작소이자 도시의 브랜드"라고 주장해 왔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탁월한 신념을 드러내는 탁견이다. 대곡댐 건설로 인한 수몰지역 문화유산을 보존하기 위해 만든 대곡박물관을 선사문화의 중요한 문화유산으로 자리 잡게 한 공로가 그냥 나온 것이 아니라는 이야기가 나올 법하다.

실제로 신 관장은 대곡박물관장에 임용된 직후 그다지 많지 않은 7억원의 예산을 들여 작은 박물관을 울산 서부지역 대표 박물관으로 발전시켰다. 울산 역사문화를 다룬 차별화된 특별전을 연속으로 기획하고 지역사 전시도록과 학술자료집 기획·제작물을 무려 9권이나 발간하는 등 지역사회에 박물관과 문화유산에 대한 인식 확산에 기여한 평가를 받았다.

기억에 남는 전시가 여럿 있지만 필자는 '태화강 100리 길' 기획 전시를 잊지 못한다. 보슬비가 포슬포슬 내려앉는 아침, 대곡박물관을 찾았을 때, 전시실은 이미 만원이었다. 경기도에서 충청도에서 먼 길을 마다하지 않고 찾아온 관람객들이 전시장에 가득했다. 바로 대곡박물관의  인적 자산인 관장이 기획한 콘텐츠가 태화강과 이 땅의 역사를 더욱 풍성하게 만든 현장이었다.

그뿐이 아니다. '학성, 학이 날던 고을 울산'은 자취를 감춘 울산 학을 되살려야 한다는 당위성을 일깨운 기획이었고 언양에 대한 기획전시나 울산의 숲에 대한 근대사적 조명은 지역 문화유산에 대한 애정을 깊게 만들었다. 

울산의 시원이자 문화발원지인 대곡천에 두 곳의 박물관이 있다. 바로 암각화박물관과 대곡박물관이다. 이곳에 두 곳의 박물관이 들어선 것은 대곡천 자체가 한반도 선사문화의 문화원형이 자리한 곳이기 때문이다.

대곡천은 선사문화의 시발점이지만 무엇보다 산허리를 감아 도는 계곡 전체가 신비로운 기운으로 가득한 곳이다. 바로 태화강의 시작점인 셈이다. 아주 먼 옛날 이곳은 북방인류와 남방인류가 교차해 새로운 문화를 만들어낸 융합의 현장이었다. 시간이 지나 문명인들이 역사를 남긴 이후에는 신라인들의 유토피아로 자리했다. 

천전리와 반구대, 두 암각화가 자리한 대곡천은 그 경치가 수려하고 골짜기마다 웅혼한 기상이 서려 흔히 백련구곡이라 불린다. 계곡의 정점에 천전리각석이 있다. 화랑의 정신세계가 산하에 서려 오묘한 기운을 뻗친 곳이 대곡천의 출발점이라면 그 상류에 발복의 문양으로 축원하던 제단이 천전리각석이고 그 물길 헤쳐 사연댐과 만나는 지점이 반구대암각화다.

수천 년 전 이곳에 터 잡은 이들은 햇살 거두는 시간, 스크린 벽면처럼 빛이 응집된 바위벽에 무수한 고래를 새겼다. 그 고래가 태화강을 가로질러 동해로 이어지는 꿈을 매일 밤마다 꾸었고 그 꿈의 마지막은 거대하고 압도적인 귀신고래 한 마리 끌고 올라와 대곡천 너럭바위 한편에 풀어 헤치는 일이었음 직하다. 그 신성한 기운이 흐르고 메아리치는 곳이 태화강 상류 대곡천이다. 그래서 대곡천을 두고 많은 전문가들은 한국문화답사 1번지, 선사문화 1번지로 선정하는 데 주저하지 않고 있다.

 

울산박물관 전경. 울산신문 자료사진
지난 7월 울산박물관 전경. 울산신문 자료사진

 

바로 그 문화의 타임캡슐이 묻힌 울산이었지만 그동안 박물관 하나 없었다. 바로 그 박물관이 10년 전 울산에 들어섰다. 한참 늦은 건립이었지만 울산에 박물관이 들어선 것은 대한민국 어떤 곳의 박물관보다 의미 있는 사건이었다. 한반도 동남쪽 끝, 귀신고래 바로 돌아 북녘 얼음바다로 머리 향하는 이 땅이 오래고 먼 과거의 역사를 품고 있음을 번듯하게 알릴 공간이 이제야 들어선 셈이다. 아무것도 아닌 것 같지만 울산박물관은 그런 엄청난 콘텐츠를 품고 있는 인류사의 보고다. 

박물관은 애초에 전시의 공간이 아니라 학문을 논하던 공간이었다. 박물관은 BC 300년경 이집트시대에 알렉산드리아 궁전 무세이온(Mouseion)이 그 기원이다. 예술의 여신 뮤즈를 위해 마련한 이 공간에서 이집트인들은 과거의 유물을 옮겨 옛사람들의 지혜와 그들의 예술세계를 공부했다. 그들이 과거를 배우려고 한 것은 스스로에 대한 정체성을 찾기 위한 작업이기도 했지만 사실은 과거를 통해 내일의 방향을 읽으려는 시도였다.

그렇다. 박물관은 죽은 영혼과 죽어 있는 물상을 안치하는 장소가 아니라 살아 있는 자들에게 삶의 방향을 제시하는 공간이다. 파리에 가면 루브르박물관을 찾고 히드로 공항에 내리면 지도에서 대영박물관부터 찾아보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그들의 과거는 인류의 지난날이자 먼 옛날 우리 조상과 연결된 삶의 방식과 소통하기에 우리는 그들의 박물관에 기꺼이 비싼 입장료를 지불하는지도 모른다.

울산에 온 사람들은 무엇보다 첫 번째 행선지를 박물관으로 향하도록 연관 콘텐츠를 만들 필요가 있다. 굴뚝도시 울산, 산업수도 울산을 찾은 이들이 울산박물관을 먼저 찾아야 하는 이유는 분명하다. 울산에 오면 굴뚝의 역사, 산업의 역사가 즐비하리라는 상상을 하겠지만 천만에 말씀이다. 첫 행선지를 울산박물관으로 잡아 울산의 1만년을 찬찬히 살펴보면 생각이 달라진다. 

울산은 미안하지만 한반도 인류의 기원이 깃든 땅이다. 한반도의 동남쪽에 위치한 울산은 예로부터 사람이 살기 좋은 터전이 돼 우리의 선인들이 아득한 원시시대부터 육로나 해로를 따라 들어와 정착사회를 이뤄 살았던 곳이다. 

거짓말처럼 들리는 이 이야기는 울산박물관에 가면 확인할 수 있다. 서생면 신암리 유적이나, 장현동 황방산의 신석기 유적이 있고 석검이 출토된 화봉동과 지석묘가 있는 언양면 서부리의 청동기 유적이 있다. 어디 그뿐인가. 한반도 선사문화 일번지인 대곡천 일대의 암각화는 울산이 고대 한반도 정착민의 영험한 영역이었음을 그대로 보여 준다. 

세계 유수의 고고학자들이 울산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한 것은 최근의 일이다. 한반도의 동남쪽에 위치한 울산은 예로부터 사람이 살기 좋은 터전이 돼 인류의 여러 무리들은 아득한 석기시대부터 육로 또는 해로로 이 땅에 정착했다. 서생면 신암리, 장현동 황방산, 지석묘가 있는 언양면 서부리 등지가 그 증좌가 남은 곳이다.

이뿐이 아니다. 지금의 북구 중산동, 온산면 산암리, 언양읍 동부리, 삼동면 둔기리, 온양면 삼광리, 상북면 덕현리, 동구 일산동, 중구 다운동, 삼남면 방기리 등지에서 각종 고대유적과 유물이 연구기관과 대학박물관에 의해 발굴됐다. 모두가 이 땅에 사람이 살게 된 흔적이다. 남부권에서 전라도지역과 함께 고인돌의 흔적이 가장 많이 드러난 지역이 울산 인근 지역이다. 

울산의 유적에 대한 본격 발굴조사는 1961년 국립중앙박물관에 의해 이뤄진 울주군 온양 삼광리 유적이 최초다. 이후 현재까지 발굴조사가 이뤄진 유적은 110여 곳이고, 출토된 유물만 6만여 점에 달한다. 하지만 이들 유물을 보관·관리할 박물관이 없었던 이유로 출토 유물의 대부분이 외지로 빠져나갔다. 그 수량은 대략 전체 출토 유물의 80%에 육박하는 4만 7,000여 점이나 된다.

이 중에는 신암리 유적의 덧무늬토기와 황성동 유적의 이음식 낚싯바늘 등 신석기 유물을 비롯해 외광리 유적의 동물무늬 굽다리항아리, 대대리 하대 유적의 청동솥, 중산동 유적의 오리모양토기 등 보물급 유물이 다량 포함돼 있다.

게다가 간월사터와 장천사터, 운흥사터에서 나온 귀중한 불교 유물들도 김해와 동아대, 통도사 성보박물관 등으로 흘러간 상태다. 울산에서 발굴된 출토 유물을 소장하고 있는 곳은 중앙, 김해, 경주 등 세 개 국립박물관과 영남 지역 각 대학박물관 등 모두 24개 기관이나 된다. 이 가운데 지난 10년간 울산박물관으로 돌아온 유물도 있지만 여전히 남의 것이 된 유물이 대부분이다. 

이 부분에 대한 확실한 정리를 지금 시작해야 한다. 울산의 뿌리와 한반도 인류사의 기초를 규명하는 중차대한 일이다. 이 작업에 지금 울산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마음이 결집된다면 울산의 뿌리와 인류사의 미스터리를 제대로 그려나가는 원동력이 될 수 있다. 지금 당장 우리가 해야 할 일이다. 신임 울산박물관장이 직을 걸고 이 사업에 매달려 주길 당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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