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울산시민과 역사를 같이하는 태화강은 이제 태화강 국가정원이라는 이름으로 전국을 대표하는 명소로 자리잡았다. 사진은 하늘에서 본 십리대밭교 일대 태화강.
울산시민과 역사를 같이하는 태화강은 이제 태화강 국가정원이라는 이름으로 전국을 대표하는 명소로 자리잡았다. 사진은 하늘에서 본 십리대밭교 일대 태화강.

태화강은 울산의 자랑이다. 태화강은 울산시민과 역사를 같이하는 울산의 젖줄 같은 소중한 강으로 울산시민의 자존감을 높여주는 강이다.
 
예부터 시인묵객들은 태화강 풍광을 시로 담아냈고, 오늘날에 이르러는 태화강 국가정원이라는 이름으로 울산에서 나아가 전국을 대표하는 명소로 우뚝섰다.
 
예부터 우리나라는 좋은 경치를 꼽을 때 8가지, 12가지를 꼽아 8경(景), 8영(詠), 12경(景)으로 불렀다. 8경의 유래는 중국의 소상팔경(瀟湘八景)을 본 따 붙여졌다는 것이 통설이다. 중국 명승지 호남성 동정호 남쪽 언덕 양자강 중류 소수(瀟水)와 상강(湘江)이 합쳐지는 근처의 아름다운 경치 8곳을 그린 송나라 시대 '소상팔경도'라는 회화에서 팔경이 시작됐다고 본다.

임진왜란때 소실됐다 지난 2014년 복원된 태화루.
임진왜란때 소실됐다 지난 2014년 복원된 태화루.
태화루를 둘러보는 한삼건 울산대 명예교수와 전우수 기자.
태화루를 둘러보는 한삼건 울산대 명예교수와 전우수 기자.
2008년 7월 철거되기 전 태화루 부지에 있었던 로얄예식장의 모습.
2008년 7월 철거되기 전 태화루 부지에 있었던 로얄예식장의 모습.

# 태화강 이름, 643년 창건 태화사서 기인
이 소상팔경은 고려와 조선시대를 거쳐 사대부계층이나 서민대중 사이에까지 유행하면서 병풍이나 화첩에 즐겨 8경을 그려왔다.
 
12경 역시 중국의 무산 12봉에서 유래했다고 전해진다. 동양의 신선사상과 연결되면서 우리나라에도 많은 정서적 영향을 끼쳤던 것이 무산십이봉이다.

중국의 명산인 무산의 아름다운 12개 봉우리를 무산십이봉(巫山十二峰)으로 불러왔고, 일찍이 이태백과 두보를 비롯한 많은 시인묵객이 무산의 십이봉과 열두 봉우리 사이를 흘러가며 만들어낸 협곡의 아름다움을 찬미했다. 문무왕이 만들었다는 안압지에도 무산 12봉이 재현되는 등 우리나라 미술과 문화에도 문화적 정서에 상당한 영향을 미친다. 울산 남산 12봉도 이런 경향과 무관하지 않다.

이는 울산 8경 대신 지금의 울산 12경이 만들어지는 중요한 판단 기준이 됐다. 울산 8경의 흔적들은 옛 문헌 여럿에서 나타난다. 1454년에 나온 세종실록지리지는 당시 전국 각 지역의 사회·경제·행정 등의 사정을 종합적으로 반영하고 정리해 놓은 책으로 지역의 경관을 소상팔경의 표현 형식을 그대로 모방해 전하고 있다.
 
여기에서도 울산을 대표하는 8경이 등장한다.
 
'성루화각'(城樓畵角)이라 해서 세종 초기에 완성된 병영성 규모와 튼튼함을 찬미했고, '전함홍기'(戰艦紅旗)라 해서 왜구의 침범에 대비해 포진해 있는 우리 전함에 나부끼는 붉은 깃발의 위용을 그렸다. 또 '동봉일출'(東峯日出)이라 하여 동대산 봉우리에 아침 해가 솟아 오로는 경치를, '남포월명'(南浦月明)이라 해서 개운포 처용암과 죽도를 배경으로 한 잔잔한 달밤의 바다를 예찬했다. 또 '산사송풍'(山寺松風)이라고 해서 함월산 백양사에 올라 송림 사이에 불어오는 시원한 바람을 8경의 하나로 꼽았고, '조대소우'(釣臺疏雨)라고 낚시를 하고 있는 노인의 여유로운 모습을 경치로 꼽기도 했다. 또 염촌담연(鹽村淡烟)이라 하여 삼산에 있는 소금가마에 피어오르는 몇 줄기 연기와 펼쳐진 경치를 8경에 포함시키기도 했다.
 
여기에 등장하는 8경은 어느 특정 장소를 지칭하기 보다는 그때그때 느꼈던 곳곳의 아름다운 풍광을 예찬한 것들이다.
 
 

'달 그림자가 봉우리에 숨는다'는 뜻을 지닌 은월봉(남산) 정상에서 내려다 본 전경.
'달 그림자가 봉우리에 숨는다'는 뜻을 지닌 은월봉(남산) 정상에서 내려다 본 전경.

# 임진왜란때 소실 태화루, 2014년 복원 준공
이에 반해 장소가 선명하게 드러나는 8경도 있다. 1481년에 완성된 '동국여지승람' 내용을 보완해 1530년에 나온 '신증동국여지승람'이라는 지리지에는 울산 팔영(八詠)이라는 이름으로 울산의 대표적 경치가 소개된다.
 
태화루, 평원각, 망해대, 장춘오, 은월봉, 벽파정, 백연암, 개운포 등 8개의 경치가 바로 그것이다. 

태화루 남향에 걸린 한자현판(사진 위)과 북향에 걸린 현판.
태화루 남향에 걸린 한자현판(사진 위)과 북향에 걸린 현판.

지금의 태화강이라는 이름은 643년(선덕여왕 12) 자장율사가 창건했다고 전해지는 태화사에 기인한다.

자장이 당나라로 건너가 수도하던 중 중국의 태화지(太和池) 옆을 지날 때 한 신인이 나타나서 호국을 위해 황룡사에 9층탑을 세우라 하고, 또 자신의 복을 빌기 위해 경주 남쪽에 절을 지어주면 덕을 갚겠다고 했다.

자장은 귀국 후 태화지에서 만났던 신인을 위해 이 절을 창건하고, 중국에서 모셔온 불사리를 세 몫으로 나누어 이 절에 태화탑을 세우고 한 몫을 봉안했다고 전해지지만 그 뒤의 역사는 거의 전래되지 않고 있다.

한삼건 교수는 태화사 창건 시기와 관련해 진덕여왕(647~654)의 연호가 '태화'였다는 점에 주목했다.

삼국사기에 황룡사탑이 645년에 세워진 것으로 기록되고, 통도사 창건이 646년인 것으로 미루어 볼 때 태화사 창건 시기를 647년에서 649년 사이로 추정한다.
 
한 교수는 태화사지와 관련해 "동강병원 옆 반탕골에서 태화사지 12지상 부도가 발견됐고, 인근에 절골이라는 명칭도 나타나고 있다.

2010년 울산발전연구원 문화재센터가 태화루 부지에서 발굴한 7세기 관청과 사찰에서만 쓰였던 연꽃무늬수막새 기와 조각.
2010년 울산발전연구원 문화재센터가 태화루 부지에서 발굴한 7세기 관청과 사찰에서만 쓰였던 연꽃무늬수막새 기와 조각.

이런 점에서 볼 때 태화강 상하류를 모두 조망할 수 있는 위치라고 할 수 있는 태화동 하나로마트가 자리잡은 신기마을 일대가 절터일 것으로 추정된다.

신기마을이란 새롭게 만들어진 마을이라는 이름인 것도 이를 더 뒷받침한다"고 말했다.

1958년 울산여고 여학생들이 기념촬영을 하고 있는 태화강 용금소의 모습. 서영자 제공
1958년 울산여고 여학생들이 기념촬영을 하고 있는 태화강 용금소의 모습. 서영자 제공

보물 제441호로 지정된 태화사지 12지상 부도는 1962년 반탕골에서 발견돼 처음에는 경남도청이 있는 부산으로 갔다가 1983년 경남도청이 옮겨가면서 다시 울산 학성공원으로 옮겨졌고, 또 다시 2011년 울산박물관 개관과 함께 이곳으로 옮겼다.
 
팔경 중 하나인 태화루는 태화사를 세울 때 함께 건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임진왜란 때 소실됐다가 2008년 태화루 중창 건립자문위원회 구성 이후 2011년 9월 착공, 2014년 5월 14일 준공식을 가졌다.
 
한 교수는 "태화루가 있던 터는 조선시대 고지도를 보면 사직단터로 나타난다. 아마 그 전에는 태화루가 있었을 것이다. 이후 로얄예식장 등 고층 건물이 들어서면서 옛 모습이 영원히 사라질 뻔 했던 곳이 시민 힘으로 중창된 것은 굉장히 큰 의미가 있다. 태화루 중창 작업 논의가 급물살을 타게 된 계기는 태화루 터에 아파트 신축 공사 신청이 들어오면서부터다. 옛 태화루를 중창해야겠다는 울산시 행정 의지와 시민 염원이 한 뜻으로 모여 지금의 태화루가 있게 됐다. 만약 그렇지 않았으면, 지금의 자리에 고층 아파트가 차지하고 역사적 장소도 사라졌을 것이다"고 당시를 회고했다.
 
이 태화루는 김극기나 정포, 이곡 등 많은 선비들이 남긴 시문을 통해 문학의 산실 역할을 해왔던 곳이다.
 
# 태화강변 절경 내려다보는 은월봉·장춘오
임진왜란으로 태화루는 불탔지만 그 현판은 오랫동안 울산객사 종루에 걸려있었고, 이는 다시 학성 이씨 월진문회 이휴정에서 소장하고 있다가 2011년 울산박물관에 기증돼 보관 중이다.
 
현재의 태화루 현판은 용금소 방면의 남쪽에는 현재 울산박물관이 보관하고 있는 한자로 된 태화루 편액을 본떠 달고, 북쪽에는 서예가인 소헌 정도준 선생이 쓴 한글 현판을 달았다.
 
한 교수는 태화루 맞은편 지금의 태화시장 쪽에 아직도 남아 있는 옛길에 대한 보존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우정동 당수나무를 중심으로 언양에서 울산읍까지를 잇던 옛길이 태화루 인근 도시개발이 이뤄지면서 사라지고 잊혀져 가고 있다는 것이다.
 
"태화시장과 태화루를 가로지른 국도 7호선이 생겨나기 전까지만 해도 태화루 부지 앞에는 는 500년 이상 울산사람들의 삶의 체취가 뭍어 있는 옛길이 있었고 지금도 일부가 존재하지만 관리나 보존이 되지 못하고 있다."
 
한 교수의 주장대로라면 태화루의 마당은 지금과 같은 쌈지 마당이 아니었을 것이다.
 

울산의 젖줄 태화강과 남구(왼쪽)와 중구를 연결하는 태화교의 모습. (파노라마 사진)
울산의 젖줄 태화강과 남구(왼쪽)와 중구를 연결하는 태화교의 모습. (파노라마 사진)

태화루 인근의 또 다른 영(詠) 가운데 하나로 평원각(平遠閣)이 있다. 정각인 평원각은 지금 그 흔적조차 없지만 고려 말 문신인 정포(1309~1345)는 울산으로 유배됐다가 남긴 울산 팔영을 통해 평원각 정취를 이렇게 적었다.
 
'누각 밖은 강, 절에 임했고, 문 앞에는 바다 건너는 배 있네. 천년에 남긴 원망스러운 버들, 둑 가에 방초는 무성하게 푸르네. 화려한 기둥은 아침 해에 빛나고, 붉은 난간은 저녁연기 속에 떠 있네. 노는 사람들이 여기 올라 구경하는 뜻은, 아득히 눈에 가득한 좋은 산천일세'(울산역사교사 모임 번역본)
 
태화루에서 마주 보이는 경치 중에 또 은월봉이 있다. 문수산 줄기가 동쪽으로 뻗어 남산 12봉을 이루었고, 이 가운데의 명산이 은월봉(隱月峰)이다. 울산 남산 12봉 중에 옛 태화루에서 남산을 바라보면 달 그림자가 남산의 끝 봉우리에서 숨는다 해서 은월봉이라 전해진다. 이곳에는 2009년 6월 정면 3칸 측면 2칸인 2층 누각인 은월루가 세워졌다.

장춘오(藏春塢)는 지금의 이휴정 주변의 태화강변으로 사철 꽃이 피는 곳이 신기하다해서 붙인 이름이다. 권근은 태화루 기문에서 장춘오를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물이 다시 남으로 구부러지고 동으로 도는 곳에 산이 높다랗게 있어 물 남쪽에 버티고 섰는데, 이름 있는 꽃과 이상한 풀, 해죽(海竹)과 산다(山茶)가 겨울에도 무성하여 이를 장춘오(藏春塢)라고 한다' 

세월은 흘러 지금 이곳은 주택가로 변해 버렸다.      글=전우수기자 jeusda@ · 사진= 김동균기자 justgo999@

저작권자 © 울산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