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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0년 전, 1910년 경술국치로 일제에 나라를 빼앗긴 이후 시작된 탄압에도 굴하지 않은 곳이 있었다. 바로 울산 동구지역에 위치한 보성학교다. 
일제 강점기 때 우리말을 가르치던 보성학교는 민족교육의 요람인 동시에 독립운동에도 적극 참여한 울산지역 항일운동의 터전이었다. 당시 울산에서는 울산읍내, 중구 병영, 울주군 언양, 그리고 지금의 동구인 동면지역에서 매우 활발하게 항일운동이 전개됐다. 
동구 방어진에서는 일본인들이 대규모로 어업활동을 펼치면서 조선인들의 어장을 침탈하는 등 피해가 막심했다. 어려운 생활을 이어가던 조선인들은 대부분 교육을 받고 싶어도 경제적 여건이 되지 않아 학교를 다니지 못하는 학생들이 많았다. 이후 1919년 3·1운동을 거치면서 교육 열기가 확산하자 1922년 보성학교가 설립됐다. 
이러한 보성학교를 설립하고 초대 교장으로서 활동했던 성세빈 선생을 기리기 위해 최근 일산동 160-4 일대에 보성학교 전시관이 세워지기도 했다. 그러나 지금까지 성세빈 선생의 국가유공자 등재가 이뤄지지 않고 있어 지자체와 후손들, 역사학자들 그리고 동구 주민들의 애가 타고 있다. 편집자주
성세빈 선생. 동구 제공

17일 울산동구문화원 (부설)동구지역사연구소가 펴낸 동구문화 제10집에 따르면 최초의 사립 보성학교는 1905년 이후 전국적으로 사립학교 열풍이 불던 때인 1909년 세워졌다. 사립학교 설립은 개화기 한국인들이 근대식 교육의 필요성을 절실히 느끼고 있었다는 방증이다. 

설립을 주도한 인물은 성세빈의 아버지 성수원으로 의연금 출연에서 가장 많은 금액을 냈다. 그러나 1911년 공포된 조선교육령과 사립학교규칙의 제정 등으로 보성학교는 1912년 폐교된 것으로 추측된다. 

1919년 3·1운동 이후 민족운동의 일환으로 교육운동이 다시 일어나기 시작했다. 

성세빈은 1920년 4월 노동야학을 개설하고 동구지역 청소년들에게 정신 계몽과 더불어 문자를 보급했다. 1922년 지역 주민들이 기부금을 모아 새 건물을 짓고, 100여 명의 학생들을 모집한 뒤 야학 학생들까지 함께 교육하기 시작했다. 이것이 바로 보성학교다. 

보성학교 설립자인 성세빈 선생 생가가 동구 일산동 지역에 남아있다. 동구 제공
보성학교 설립자인 성세빈 선생 생가가 동구 일산동 지역에 남아있다. 동구 제공

1922년 사설강습회로 인가를 받아 설립된 보성학교의 교사들은 대부분 독립운동가들이었다. 

설립자이자 초대 교장이었던 성세빈을 비롯해 박학규, 성세륭, 김천해, 서진문, 장성준, 천호문, 이효정 등 독립운동을 했던 이들이 학생들을 가르치며 항일 의식을 고취했다. 

김천해와 서진문은 일본에서 노동운동에 관여했다. 다른 교사들은 1920년대 사회운동단체인 동면구락부, 5월청년동맹, 자오회, 울산군청년동맹, 울산청년동맹 동면지부, 신간회 울산지회 등 사회운동 단체에 참여했다. 

1929년 보성학교와 성세빈 선생, 그리고 제자들이 함께 찍은 사진. 동구 제공
1929년 보성학교와 성세빈 선생, 그리고 제자들이 함께 찍은 사진. 동구 제공

이 때문에 보성학교는 일제로부터 교원들의 사상이 불순하다는 명목으로 1929년 폐쇄명령을 받는 등 탄압받았다. 폐교 위기는 성세빈과 일제로부터 사상이 불온하다고 지목된 교사가 사퇴하면서 다행히 막을 수 있었다. 

일제강점기 당시 성세빈 선생 제적등본. 동구 제공
일제강점기 당시 성세빈 선생 제적등본. 동구 제공

학교 폐쇄 명령 위기 이후 성세빈을 이어 교장으로 임명된 이는 성세빈의 동생 성세륭이었다. 성세륭은 자오회 활동가로, 울산태화보통학교와 농소보통학교 교사로 근무하던 중 항일교육을 이유로 해직됐다. 

외에도 보성학교 출신들은 적호소년단(동면소년회)과 5월청년동맹(울산청년연맹 동면지부) 그리고 신간회에서 활동하며 항일운동의 맥을 이어갔다. 적호소년회원이거나 울산적색비사사건(울산적색농민조합조직준비회사건, 울산독서회사건)에 개입된 10여 명의 청년 중 최도준, 김두생, 정진도도 보성학교 출신이었다. 

동면지역 사회운동의 근거지 역할을 하던 보성학교는 1945년 해방 직전 강제 폐교될 때까지 총 21회, 499명의 졸업생을 배출한 울산 유일의 민족사립학교다. 

보성학교 교사 출신 서진문(1928년 옥사, 건국훈장 애족장), 이효정(2009년 별세, 건국훈장 포장) 두 분은 2006년 독립유공자로 인정받기도 했다. 그러나 보성학교 초대 교장으로서 활동했던 성세빈 선생의 국가유공자 등재는 이뤄지지 않고 있다. 현재 보훈처 공훈심사과에서 운영하고 있는 독립유공자 포상 심사 대상자 선정은 대상자의 후손이나 관계자가 신청하거나, 보훈처가 직접 관련 사료에서 발굴하는 2가지 경우가 있다. 

성세빈·성세륭 선생의 후손인 성의영씨 역시 지난 2003년부터 여러 차례 서훈 신청을 위해 힘썼으나 번번이 거절당했다. '행적 이상'이나 '친일 의혹' 등의 이유였다. 

성세륭 선생의 막내 아들인 성의영(77)씨는 "성세빈 선생 서훈은 신간회 활동 사항이 미비하다는 이유로 거절당해 다시 행적을 찾아 보충해 신청하기도 했다. 최근에는 일본인과 관련된 양조장에서 활동한 경력이 문제가 됐다"면서 "해당 양조장은 당시 방어동 읍장 윤덕호씨가 일본인에게 주식을 전부 양도받아 경영했던 곳이고, 성세빈 선생은 그곳의 전무로 일했던 것뿐이다. 확실한 근거자료와 함께 항의문을 올렸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고 설명했다. 

보성학교 전시관에는 성세빈 선생의 유품인 탁자, 반닫이, 호롱불 등 3종과 1920~1930년대 항일운동 관련 기사 2점, 그리고 보성학교 졸업대장(복사본) 등이 전시된다. 동구 제공
보성학교 전시관에는 성세빈 선생의 유품인 탁자, 반닫이, 호롱불 등 3종과 1920~1930년대 항일운동 관련 기사 2점, 그리고 보성학교 졸업대장(복사본) 등이 전시된다. 동구 제공
성세빈 선생 사망 이후 제자들이 현 보성학교 터에 송덕비를 세웠다. 사진은 성세빈 선생 송덕비. 동구 제공
성세빈 선생 사망 이후 제자들이 현 보성학교 터에 송덕비를 세웠다. 사진은 성세빈 선생 송덕비. 동구 제공

동구도 보성학교 전시관을 세우는 등 성세빈 선생의 업적을 알리고 지역 역사의식 세우기에 힘쓰고 있으나, 서훈 지정이라는 결과로 이어지지는 않고 있다. 지난 7일 동구는 총 사업비 3억원을 들여 보성학교 전시관을 준공했다. 다만 코로나19 상황으로 인해 개관은 내년 초 가능할 것으로 보인다. 

전시관 내부에는 성세빈 선생의 유품 3종(탁자, 반닫이, 호롱불)과 1920~1930년대 항일운동 관련 기사 2개, 그리고 보성학교 졸업대장(복사본) 등이 전시된다. 또 지역 역사가들이 당시 상황과 역사를 설명하는 영상자료가 공개된다. 

동구 관계자는 "당시 양조장 허가권이 친일파나 일본인에게만 한정적으로 제공됐는데, 동구는 특이하게 조선인이 투자를 해서 받아냈다. 이를 두고 오해가 있는 것 같다"면서 "앞으로도 성세빈 선생의 서훈 지정이 이뤄질 수 있도록 후손들을 도울 계획이다"고 전했다. 

동구 주민들은 이미 충분한 자료와 다수 지역 역사가들의 검증이 있었음에도 서훈 지정이 이뤄지지 않고 있다는 게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는다고 입을 모은다.  김가람기자 kanye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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