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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영 이사 겸 편집국장
김진영 이사 겸 편집국장

한 해의 시작을 반구대암각화에서 이야기 하려는 사람들이 북적거렸다. 지난 주말 신년 연휴 암각화 박물관의 모습이다. 놀랍다. 딱 1년전만해도 썰렁하기 짝이 없었는데 비대면 코로나 19 시대에  암각화박물관은 문전성시다. 인근 대곡박물관에도 유례없이 많은 이들이 암각화를 보기 위해 눈빛을 반짝거렸다. 반갑고 벅찬 모습이다. 울산시민만 있는 것도 아니다. 부산에서 창원에서, 멀리 청주에서도 왔다. 들뜬 기분에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지만 몇 마디 주고받다 박물관 직원들의 사회적 거리두기, 대화금지 지침에 입을 닫았다. 울산을 찾는 이들이 가장 먼저 반구대암각화와 천전리각석을 둘러보고 울산박물관으로 향하는 모습은 감격적이다.
 
올해는 반구대암각화가 세상에 나온지 50년이 되는 해이다. 딱 50년전 1971년 겨울, 바로 한 해 전 천전리각석을 세상에 알린 동국대연구팀이 다시 한 번 울산을 세계에 알렸다. 엄청난 사건이었지만 우리의 문화재 당국은 진가를 몰랐다. 아는 만큼 보이는 법. 모르니 그저 바위 위의 그림쯤으로 여기고 방치했다. 한 나라의 유물이나 유적, 과거의 흔적은 그 나라의 위상과 국민들의 자긍심과 직결되는 중차대한 문화유전자다. 그런데 우리 문화재 당국은 그 부분을 간과했다. 금관이거나 청자류의 도자기거나 구슬이거나 철제 부장품이거나 돈 되는 유구라면 달랐을지도 몰랐다. 이끼와 잡풀이 뒤섞여 형태조차 잘 보이지 않은 바위 그림이 세상에 알려졌지만 후속대책은 내몰라라했다.

신이 난 쪽은 고고학자들과 연구자들, 그리고 애송이 사학도들이었다. 암각화가 세상에 드러난 이후 20여년의 세월은 그랬다. 다소 과장이라 말하겠지만 사실이다. 수천년 숨어 있던 바위그림들이 단 20년의 시간동안 마구잡이로 두들겨 맞았다. 탁본은 기본이고 슈미트헤머라는 당시로선 첨단장비의 드릴질까지 벌어졌다. 두들겨 맞고 분칠당하고 구멍까지 뚫린채 그도 모자라 여름이면 물에 잠겼다. 천전리각석은 더 심했다. 아예 노천에 드러난채 오가는 이들이 툭툭 건드려도 아무런 제지가 없었다. 그 시절 누군가 떼어간 각석의 돌조각을 붙이면 또다른 암각화 하나가 나올거라고 오래된 이들은 이야기 한다. 연구를 허가한다며 탁본을 용인하고 지질을 파악한다고 드릴질에 눈감았다. 그동안 반구대암각화 보존문제에 어깃장을 놓았던 문화재 당국이 그런 세월을 보냈다.

바위의 기억, 염원의 기록 천전리 암각화 책.

반구대암각화와 천전리각석은 우리 인류문화사에서 결정적인 문화유전인자이자 증거물이다. 한민족이 어디서 왔고 어떤 문화적 유전인자를 가진 부류인지를 명정한 흔적으로 말해주는 증좌다. 그래서 반구대암각화가 세상에 알려진 50년전의 울산과 그 이후의 울산은 완전히 다른 상징으로 구분된다. 반구대암각화나 천전리 각석이 없었다면 울산은 그저 신라의 배후 항만이거나 국제무역항이라는 역사적 지리적 차별성 정도로 이야기 할 수 있을지 모른다. 8세기 당시 세계 4대 도시였던 서라벌의 물류항만 울산, 그 위상이 오늘의 산업수도로 이어졌다고 이야기 하는 정도로 울산 사람들은 만족해야 했겠지만 50년 전부터 사정이 달라졌다. 바로 인류의 이동흔적, 문화 유전인자의 전파경로가 바위 위에 새겨져 있기 때문이다.
 
바이칼 호수 인근인 시베리아 우르쿠츠크에는 시스킨스키 암각화가 있다. 반구대암각화만큼 시련과 고초를 겪은 이 암각화는 반구대암각화를 새긴 사람들의 뿌리를 이야기해 준다. 사실 이 암각화 이외에도 바이칼 인근 지역은 우리 민족과 많은 유사성을 갖고 있다. 이 때문에 한민족이 시베리아 바이칼 지역에서 출발했다고 생각하는 학자들이 자료를 조사하고 유사성을 찾기 위한 연구를 하고 있다. 지난 2008년 내몽골 적봉에서 한국형 암각화가 발견됐다. 고려대 한국고대사 연구팀이 발견한 이 암각화는 바이칼에서 시작된 암각화의 흔적이 한반도 동쪽 끝 울산으로 연결되는 결정적 단서가 됐다. 내몽골 암각화는 천전리각석에 새겨진 방패형 검파형 암각화의 기원을 찾는 중요한 증거물이 됐다. 특히 내몽골 지가영자 유적의 남쪽 사면 바위 군락의 상단부에서는 울산 천전리암각화를 축소해 놓은 것과 같은 마름모모양, 동심원모양, 사람 얼굴모양 등의 암각화가 나와 학자들의 가슴을 달구기도 했다. 바로 인근에서는 적석총과 빗살무늬 토기로 대표되는 홍산문명이 발굴돼 그 연관성에 연결고리를 더했다. 이 때문에 학계에서는 바이칼과 내몽골, 홍산문명과 한반도 동쪽 끝 울산으로 이어지는 고대 인류의 이동이 바위그림으로 선사인의 이동을 말해준다고 이야기 한다. 
 
반구대암각화로 대표되는 한국형 암각화가 발견된 지역은 만주다. 중국이 동북공정이라는 거대한 역사왜곡을 시작한 이유도 바로 홍산문명이라는 새로운 형태의 문화가 만주에서 발굴되기 시작하면서 부터다. 일제의 역사왜곡 선봉장이었던 고고학자 이마니시류가 1920년대에 홍산문명의 흔적을 발견했지만 일제는 이를 덮었다. 오히려 이마니시류와 조선학자 이병도를 앞세워 한사군의 위치와 내몽골과 만주에 뿌리내린 한민족의 역사를 조작했다. 그 조작의 흔적을 지금은 중국이 동북공정의 근거로 이용하는 아이러니가 벌어지고 있다. 참담한 일이지만 이 부분에 대한 이야기는 다음에 부연하기로 한다.    
 
1980년 초 만리장성 북쪽 요서 지방 일대에서 어마어마한 신석기 유적이 무더기로 발굴되기 시작했다. 그 문명의 흔적이 홍산문명이다. 한국형 암각화와 적석총, 빗살무늬토가와 환호라는 뚜렷한 문화유전인자가 울산과 연결된 한민족의 뿌리가 드러난 셈이다. 한민족 주류는 혈통적으로 몽골로이드계 인종에 속한다. 몽골로이드계 인종이란 오늘날 인류의 직계조상으로 간주되는 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가 출현한 후, 지금으로부터 10~5만년 전부터 이 땅에 살았던 사람들로 학계에서는 추정한다. 최초의 원주지를 떠나 오늘날 바이칼호를 축으로 그 연안과 동부 지역에 자리 잡은 인종집단이 그들이다. 바이칼에 터를 잡은 민족의 일단이 내몽골과 홍산을 거쳐 한반도로 이동했고 그 종착지가 울산이었다는 증거가 바로 반구대암각화다.

울산시 울주군 두동면 천전리각석의 전경. 2020. 7 울산신문 자료사진
울산시 울주군 두동면 천전리각석의 전경. 2020. 7 울산신문 포토DB

지금부터 딱 10년 전 국립중앙박물관에서는 획기적인 기획전시가 열렸다. '한반도의 청동기문화'라는 이름의 전시행사였다. 이 기획전시는 한반도의 뿌리와 우리 조상들의 이동 경로를 말해 주는 귀중한 자리였다. 그동안 한반도의 고대사는 왜곡과 훼손으로 방치된 역사였다. 그런데 개발이 1순위였던 현대에 들어 울산을 비롯한 전국 각지에서 의미 있는 출토 유적이 쏟아졌다. 말 그대로 기적 같은 일이었다. 임진강변 아슐리안 주먹도끼와 사연댐 공사 이후 수몰된 지역에서 발견된 암각화, 검단리 환호 등은 발견 자체가 기적이었다. 또 있다. 그 기획전에서 놀라운 유적지 하나가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바로 울산 옥현 유적이었다. 옥현 유적은 한반도 최초의 청동기시대의 논 터가 대량으로 발굴된 곳이다. BC 7세기경에 시작된 한반도 논농사의 첫 흔적이 바로 울산에 존재했다는 사실은 관람객들을 어리둥절하게 했다. 공업도시 울산에 한반도 최초의 논농사 유적이라니, 이런 식의 반응이었다. 
 
논농사의 첫 시작이 증명된 울산은 과연 어떤 곳인가. 우리나라 육지부에서 태양이 가장 먼저 뜨는 곳이 울산 땅 간절곶이다. 태양이 가장 먼저 뜬다는 것은 아주 오래전 인류에게 어떤 의미였을까. 태양의 기운이 모든 에너지의 출발로 여긴 북방계 인류의 한 무리는 그들이 신성시한 태양의 시작점을 쫓아 대륙의 끝으로 이동했다. 그 끝자락이 울산이다. 어쩌면 그 무렵 남방고래류의 이동 경로를 따라 북으로 향한 폴로네시안계 해양문화권 인류가 귀신고래를 만나 정착한 땅이 울산인지도 모른다. 바로 그 연관성을 이제 울산의 문화적 자긍심으로 이끌어내는 작업이 필요한 시간이다. 발견 50년을 맞아 7,000년 세월의 숨은 문화유전인자를 해독해 내는 거대한 사업이 그 어떤 산업보다 울산을 다시 위대하게 만드는 시작점이 된다는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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