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상] 강변따라 이어진 교량·대숲 근현대 울산 변천사 오롯이 품어
[+영상] 강변따라 이어진 교량·대숲 근현대 울산 변천사 오롯이 품어
  • 전우수 기자
  • 2021.01.07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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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U+] 우리가 몰랐던 울산
일제강점기 최초 근대식 교량 구 삼호교
공해주민 이주로 개발된 삼호동·다운동
한반도 최초 비행장 연결 역할한 울산교
1971년 왕복 2차선 첫 개통 태화강변道
지역사 중요한 의미 시설·상징물 곳곳
태화강 중류에 놓인 구 삼호교, 삼호교, 신 삼호교 등 3개의 삼호교는 근현대 울산의 변화와 발전사를 지켜봐 온 중요한 시설로 주목받는다. 사진은 삼호교(오른쪽), 구 삼호교(가운데), 신 삼호교 전경.  김동균기자 justgo999@
태화강 중류에 놓인 구 삼호교, 삼호교, 신 삼호교 등 3개의 삼호교는 근현대 울산의 변화와 발전사를 지켜봐 온 중요한 시설로 주목받는다. 사진은 삼호교(오른쪽), 구 삼호교(가운데), 신 삼호교 전경. 김동균기자 justgo999@

태화강에는 역사나 사회적으로 중요한 가치를 가진 시설물이나 상징물이 여럿 있다.
그 중에서 태화강 중류에 놓인 구 삼호교, 삼호교, 신 삼호교 등 3개의 삼호교는 상징성이 크다.
한삼건 교수는 이 3개의 교량들은 울산의 근현대 변화와 발전사를 지켜봐 온 중요한 시설로 주목했다.

# 근현대사 중요한 상징성 지닌 3개 삼호교
구 삼호교는 태화강에 가설된 최초의 근대식 콘크리트 교량이라는 수식어가 붙어 있다. 1924년에 건설된 이 다리는  폭 450cm, 길이 150m로 태화나루를 통해 강남과 부산으로 연결되던 길을 바꾸어 놓았다.

일제강점기, 군수산업의 효과적인 관리와 울산과 부산 간의 내륙교통을 원활히 하겠다는 목적에서 건설된 교량이다. 현재는 교각과 교량이 노후 되면서 차량 통행은 금지되고 보행자 전용 교량으로만 사용하고 있다.

구 삼호교는 2004년 9월에 등록문화재 제104호로 지정됐다.
불고기단지와 연결된 2차선 삼호교는 1959년에 가설됐다. 준공 당시 길이는 256m, 폭은 7.8m였는데 1984년에 확장하면서 콘크리트교였던 이 교량은 H빔 철골로 보강됐다.

차량왕래가 가장 활발한 신 삼호교는 1997년에 완공됐다. 길이는 458m, 폭은 35m다.
남구와 중구를 잇는 이 3개의 삼호교는 교량의 각도가 조금씩 다르다. 처음 세워진 구 삼호교는 강의 흐름방향에 맞춰 직각으로 건설됐고, 이후 잇따라 신설된 두 개의 삼호교는 도로의 길이와는 상관없이 연결도로나 도시계획 방향에 따라 가설됐다는 점에서 큰 차이를 보인다.

울산을 찾는 백로와 떼까마귀의 주요 서식지인 남구 무거동 와와마을과 삼호대숲의 전경.  김동균기자 justgo999@
울산을 찾는 백로와 떼까마귀의 주요 서식지인 남구 무거동 와와마을과 삼호대숲의 전경. 김동균기자 justgo999@

# 공해 이주사업 삼호·태화·다운지구 택지 개발
한 교수는 태화강 중류에 자리 잡고 있는 주택가도 울산공업 변천사에 중요한 가치와 의미가 있다고 했다.
지금의 삼호동 와와마을 일대와 태화동 불고기 단지 일대, 다운동 일대가 모두 이들 공해주민 이주사업에 의해 개발된 곳이기 때문이다. 1980년대 까지만 해도 삼호교 인근은 논밭이었다. 이런 곳이 대규모 택지로 조성된 것은 울산공단의 공해주민 이주사업 때문이었다. 1962년 1월 27일 울산이 특정공업지구로 결정·공포되고 그 이듬해부터 울산석유공장이 건설되면서 현지 주민들의 이주사업은 시작됐다.

이후 울산의 공해문제로 주민들의 이주사업이 본격화 된 것은 1980년대다. 당시 공해주민 이주사업은 철거된 주민들의 재정착을 위해 울산시내 삼호지구, 태화지구, 다운지구 등에 총 77만2,000여㎡의 택지가 개발돼 공급됐다.

1981년 울산의 공해오염지구 주민 이주사업이 본격적으로 시작됐고, 1985년 이주대책사업이 확정, 공고된 이후 1986년 여천동, 1987년 매암동, 1988년 부곡동, 황성동, 용연동, 용잠동의 순으로 진행됐고, 1998년에서야 공해이주사업의 행정적 절차가 마무리 됐다.

한 교수는 "이 사업은 공해에 시달려 온 주민들의 건강은 구했지만, 졸지에 정든 고향집과 땅을 버려야 하는 실향민의 아픔을 남겼다. 공업단지 개발로 인한 이주사업은 원주민에게는 삶의 터전에서 쫓겨나와 낯선 곳에서 새롭게 터전을 일궈야 하는 아픔을 주었다"면서 "하지만 태화강변 중류에 태화교 인근 강변처럼 초고층 건물이 들어서지 않고 지금의 모습을 갖추게 된 데는 지구단위계획으로 단독주택이나 상가가 들어올 수 있도록 제한을 두었기에 가능했던 일이었다"고 회고했다.

일제강점기 울산의 첫 근대교량인 구 삼호교와 부산·언양 방면을 잇는 신작로(아래)의 모습. 울산신문 포토DB
일제강점기 울산의 첫 근대교량인 구 삼호교와 부산·언양 방면을 잇는 신작로(아래)의 모습. 울산신문 포토DB

# 조선 영조 '학성지'에도 기록된 태화강 대숲
태화강을 더욱 태화강답게 하는 것은 역시 푸른 대나무다.

삼호교에서 태화교에 이르는 태화강 양안에 드넓게 펼쳐진 대숲은 예전부터 '오산대밭'으로 불렀다. 떼까마귀와 백로가 철을 바꿔서 번갈아 날아드는 태화강 대숲에 대한 기록은 조선 영조때(1749년)에 씌어진 '학성지'에 나타난다.

학성지에는 '태화나루 서쪽 수 리 쯤에 있는데, 강에 임한 작은 언덕으로 경치가 좋고, 예전에 부사 박취문이 지은 만회정이라는 정자 앞에는 대숲이 있으며, 정자 아래에는 관어대(觀漁臺)라는 세 글자가 새겨진 낚시터가 있다'고 기록된다. 애초부터 태화강에 자생하는 대숲이 있었다는 얘기다.

대숲이 지금처럼 넓은 범위에 걸쳐 조성된 것은 일제강점기 때 울산수립조합 창립위원이었던 '오까다'라는 북정동 거주 일본인에 의해서였다.

한 교수는 태화강에 대숲을 조성한 것은 관상용이 아닌 경제적 가치를 염두에 둔 것으로 해석한다.
한 교수는 "이 태화강 대숲이 일제강점기 때 그저 관상용으로 심어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홍수방지목적도 생각할 수 있지만 무엇보다 경제적 이득이 있었기에 대규모 대밭 조성이 가능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실제로 성남시장 앞 시내버스 정류장 일대에는 1970년대까지만 해도 이곳의 대나무를 사용해서 광주리와 바구니 같은 죽제품을 만들던 공방이 있었다"고 말했다.

1970년대 남구에서 바라 본 울산철교와 울산교의 모습. 울산신문 포토DB
1970년대 남구에서 바라 본 울산철교와 울산교의 모습. 울산신문 포토DB

# 태화강 본류에 설치된 최초 근대 교량 울산교
태화강의 시설물 중에 특별히 주목해야 할 시설물이 울산교다.
철근콘크리트로 된 울산교가 준공된 것은 1935년 8월 말이었고, 9월 3일 준공식을 갖는다.
초기의 울산교는 나무다리였다. 태화강 사이에 있었던 모래섬인 중도를 기준으로 강북쪽의 다리를 울산교로 불렀고, 강남쪽 다리를 성남교라고 했다. 목조 교량이었지만 태화강 본류에 설치된 최초의 근대 교량이었다.

특히 울산교는 태화강 남쪽 삼산에는 일본본토와 대륙을 연결하는 한반도의 첫 번째 비행장이 있었기 때문에 이 비행장과 이미 도시화가 진척되고 철도로 각 지역과 연결된 태화강 북쪽인 성남동, 북정동 일대를 본격적으로 연결해 주는 역할을 했다.

울산교는 1966년에 울산특별건설국의 발주로 기존 교량 폭 6m를 9m로 확장했다. 지금도 울산교에는 당시의 확장 공사 흔적을 눈으로 확인할 수 있다.

이후 울산교는 교량의 노후문제로 1994년 11월부터 차량 통행이 금지되고 인도교 전용으로 변경됐고, 2019년에는 지역 상권활성화 차원에서 일정기간 근처 맛집에서 배달음식을 시켜서 먹을 수 있는 야외 카페 공간으로 활용하면서 교량의 명칭을 '배달의 다리'로 명명하기도 했다.

# 울산수리조합 공사의 부산물 태화강둑
지금의 태화강변에 둔치와 둑이 생기고, 강변도로가 개통된 시점은 언제쯤일까.

태화강둑은 1928년부터 1932년까지 있었던 울산수리조합 공사의 부산물이다. 당시 조선총독부와 울산수리조합은 391만7,375평이라는 광대한 면적의 수리조합 공사를 시행했다.

한 교수는 "울산수리조합은 홍수에 안전한 농경지를 확보하겠다며 태화강에 인공제방을 만들고 지금은 시가지가 된 중구, 남구, 북구 일대 들판 약 400만평을 개발했는데, 이 과정에서 태화강 남북 제방이 모두 만들어졌다. 그런데 이 공사 이후 중구 구시가지는 상습 침수에 시달리게 됐으니 아이러니다"고 설명했다.

한 교수는 수리조합의 진짜 속내는 다른 데 있었다고 분석한다. 제방을 쌓는 과정에서 삼산들의 공유수면을 매립해 땅을 얻고, 논에 물을 대주는 물장사를 통해 수익을 얻겠다는 것이 더 큰 목적이었다는 것이다. 물장사와 논밭 만들기에는 성공했지만 이때부터 구시가지는 큰 비만 오면 속수무책으로 침수피해를 입어야 했다. 도시와 땅을 읽는 지혜 없이 눈앞의 이익만 탐했던 결과라는 지적이다.

중구 태화동 태화강변을 둘러보는 한삼건 울산대 명예교수와 전우수 기자.  김동균기자 justgo999@
중구 태화동 태화강변을 둘러보는 한삼건 울산대 명예교수와 전우수 기자. 김동균기자 justgo999@

# 초고층 아파트 난립 특색없는 강변 아쉬움도
태화강변에 도로가 처음 개통된 것은 1971년 8월 20일이다. 이 최초의 강변도로는 중구 성남동 울산교에서 태화교 부근까지 왕복 2차선으로 준공됐다. 그 후 1999년 4월 20일에 학성교에서 명촌교까지 강북 제방을 겸한 도로가 완전 개통되면서 지금과 같은 강변풍경이 갖추어졌다.

한 교수는 "제방이 결국 강변도로가 됐다. 국유지다 보니 도로 만들기가 쉬었고, 강변도로가 생기니 도시개발이 이어졌다. 그 과정에서 보다 치밀한 도시이용계획을 수립했다면 지금처럼 강변의 초고층 아파트들의 난립 등 특색 없는 강변이 되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꼬집는다.

한 교수는 파리 세느강, 런던 탬즈 강 등 강을 끼고 있는 세계 유명 관광지 강변에 박물관과 유원지, 휴게시설이 들어선 장면과 우리 태화강변과는 너무나 대조적이라고 안타까워했다.
 전우수기자 jeusd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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