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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영숙 수필가
정영숙 수필가

내가 편해지기 위해서라도 그를 용서해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쉽지 않았다. 머리로는 다 털어낸 미움이 가슴에는 여전히 남아 있었다. 미혹의 덫에 걸려 허우적대는 나를 꺼내고 싶었다. 혼자 산길을 걸으면서 거미줄처럼 얽힌 마음을 정리하고 싶었다. 

하늘이 잔뜩 낮게 내려앉은 날, 지리산 자락을 걷기 위해 마천으로 차를 몰았다. 늦은 시간에 혼자 떠나기가 망설여졌지만 용기를 냈다. 어둠이 내려앉을 때쯤 숙소에 도착했다. 지워버리고 싶은 한 사람의 모습이 잠을 훔쳐 달아났다. 뒤척이며 새벽을 맞았다. 아침밥을 먹는 둥 마는 둥 배낭을 꾸렸다. 지도를 들고 출발했지만, 골짜기 쪽의 눈이 많아 발품을 한참이나 판 뒤 영원사 들머리를 찾을 수 있었다. 

영원사 법당으로 들어가 부처님 앞에 무릎을 꿇고 한참이나 앉아 있어도 헝클어진 마음은 고요해지지 않았다. 영원사를 나와 상무주암으로 향했다. 지금 걷고 있는 이 길에서 나는 그를 용서할 수 있는 지혜를 얻을 수 있을까. 무릎까지 덮는 눈을 헤치며 힘들게 걷는 내 마음에 지난봄의 일이 파노라마를 만들었다. 

뜻하지 않은 상황에서 직장의 입찰 업무를 맡게 되었었다. 평소에 하던 일이 아니어서 낯선 데다 융통성마저 없는 성격이라 제대로 해낼지 걱정이 앞섰다. 법적인 절차가 따르는 일이라 무조건 원칙만 따르겠다는 생각으로 일을 진행했다. 별문제 없이 소모품 입찰이 마무리되어서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문제는 입찰이 끝난 뒤에 벌어졌다. 입찰이 잘 마무리되었나 싶었는데 함께 근무하는 선배가 추측성 험담을 늘어놓고 있다는 소문이 여기저기서 들려왔다. 특정 업체를 봐주었다는 말과 함께 영수증을 위조했다는 소문까지 퍼뜨렸다. '그러다 말겠지.' 하며 대응하지 않은 것도 문제를 확산시키는 데 한몫했다. 구구절절 해명하기도 기가 막히고 그렇다고 가만히 있자니 소문이 진실처럼 변해 진퇴양난이었다. 

일이 시끄러워지자 입찰 업무를 함께 보았던 사람들이 문제가 있을 수 없는 구조라고 해명에 나섰다. 입찰에 참여한 업체들이 모인 자리에서 각자 금액을 써서 바로 공개하는 방식이었기 때문에 누구를 속이거나 특혜를 줄 수도 없었다. 결국, 선배가 쓸데없는 험담을 늘어놓은 것으로 모든 일이 마무리되었다. 그렇게 의혹은 해결되었지만 믿었던 선배에 대한 불신이 상처로 남고 말았다. 그런 허무맹랑한 말을 퍼뜨린 이유를 물어보았으나 나를 두고 한 말이 아니니 개의치 말라며 얼버무렸다.

자신의 경솔함에 대한 사과는커녕 언죽번죽 사설만 늘어놓던 선배를 용서할 수 없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허무맹랑한 일을 사실처럼 퍼뜨렸던 선배에 대한 분노와 그런 선배를 용서하지 못하고 있는 자신의 옹졸함이 널뛰기했다. 누군가를 미워하거나 원망하면 자신은 그보다 갑절은 더 상해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용서가 쉽지 않았다. 나는 또 다른 늪으로 빠져드는 기분이었다. 

상무주암으로 오르는 가풀막진 산길에는 군데군데 눈꽃을 피운 산죽이 아침 햇살을 받아 수정처럼 빛났다.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에는 한천(寒天)의 쓸쓸함이 눈이 시리도록 파랗게 번지고 있었다. 

'머무름이 없는 자리'라는 뜻을 지닌 상무주암 앞에 서서 먼 산을 바라보았다. 천 년 동안 말이 없었을 지리산의 주 능선이 넓은 바다에 머리를 담근 채 인간의 업을 참회하고 있는 것 같았다. 스님을 뵙고 위로의 말이라도 듣고 싶었지만, 스님은 보이지 않았다. 암자 입구에는 대나무 빗장이 출입을 막고 있었다.

문수암으로 가는 길은 상무주암을 돌아 북쪽으로 나 있었다. 바위 절벽 아래 자리 잡은 문수암 댓돌 위에는 하얀 고무신 한 켤레가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낙숫물 소리와 함께 어디선가 불어온 한 줄기 바람이 암자 뒤의 바위를 사납게 두드렸다. 천 번의 계절이 가고 오는 동안 바위는 바람에 맞고 또 맞으면서도 오직 침묵으로 답하고, 바람은 저 홀로 윙윙 소리를 내며 휘돌다 부서지고 있었던 것일까. 바람과 바위는 서로를 거부하지 않고 각각의 모습으로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작은 것에도 틈을 주지 않으려고 바둥대는 나의 어리석음을 생각했다. 

눈이 너무 많이 쌓여 더는 산행이 어려웠다. 눈 덮인 산중에서는 산이 길이고, 길이 산이었다. 인적이 없으니 어디로 가야 하는지 물어볼 수도 없었다. 산 아래쪽을 향해 어슴푸레하게 난 길을 따라 걸었다. 걷던 길을 돌아보니 억겁의 시간을 넘나들었을 바람은 흔적조차 없고 내 작은 발자국만 자취를 남기고 있었다. 산길을 한참 더 내려가자 눈 덮인 길 위에 고무신 자국이 선명하게 찍혀 있었다. 문수암 댓돌 위의 고무신 생각이 났다. 발자국이 사람 사는 마을로 안내해 주는 것 같아 불안하던 마음이 놓였다. 그 길의 비탈진 내리막 끄트머리에 마을이 보였다. 

새털보다 더 가볍게 흩날리는 눈 속에서도 길을 잃는 것이 사람이니 사소한 일에도 마음이 상할 수밖에 없을지도 모른다. 옳고 그름을 분별하려던 마음도, 미안하다는 한마디를 들어야겠다던 생각도 모두 털어내기로 했다. 건너편 언덕배기에는 눈부신 겨울 억새가 온몸으로 바람을 맞으며 제 살을 닦고 있었다. 사람이 등 붙이고 살아가는 마을이 이르니 마음이 따뜻해졌다. 눈에 보이지 않는 갈등과 원망을 버리고 나니 마음이 지전(紙錢)처럼 가벼워졌다. 내 마음의 미움을 털어내고 나니 내가 자유로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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