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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기쁘다

천양희

바람결에 잎새들이 물결 일으킬 때
바닥이 안 보이는 곳에서 신비의 깊이를 느꼈을 때
혼자 식물처럼 잃어버린 것과 함께 있을 때
사는 것에 길들여지지 않을 때
슬픔을 침묵으로 표현할 때
아무것도 원하지 않았으므로 자유로울 때
어려운 문제의 답이 눈에 들어왔을 때
무언가 잊음으로써 단념이 완성될 때
벽보다 문이 좋아질 때
평범한 일상 속에 진실이 있을 때
하늘이 멀리 있다고 잊지 않을 때
책을 펼쳐서 얼굴을 덮고 누울 때
나는 기쁘고

막차 기다리듯 시 한편 기다릴 때
세상에서 가장 죄 없는 일이 시 쓰는 일일 때
나는 기쁘다

△천양희: 부산 출생. 이화여대 국문과 졸업. 1965년 '현대문학' 시 발표로 작품활동 시작. 시집 '새벽에 생각하다'외 다수. 육필 시집 '벌새가 사는 법'. 산문집으로 '직소포에 들다' 외 다수. 소월시문학상, 현대문학상, 대한민국문화예술상, 공초문학상, 박두진문학상, 만해문학상 등 수상.

도순태 시인
도순태 시인

살면서 기쁜 일이 얼마나 자주 있을까? 그리고 세속적인 기쁨보다 오롯이 자신의 심연을 차분하게 채워줄 기쁨을 위해 얼마나 노력하며 살까? 시인의 기쁨을 따라가다 보면 삶에서 기쁨을 찾아 가는 길이 그리 멀지도 어렵지도 않음을 일러준다. 욕심 없이 세상을 바라볼 수 있는 여유와 익숙함에 안주 하지 않는 성실이 기쁨을 만들어주는 열쇠임을 알게 한다. 또한 안에서 끄집어 낸 뜨거움을 승화시켜 시를 쓰는 일 기쁨의 방점임을.

'막차를 기다리듯 시 한편 기다릴 때' 행에서 온몸 피가 멎는 듯 당겨오는 짜릿한 공감을 안겨준다. 뭇 사람에게는 아무것도 아닐 수도 있지만 시인에겐 그 기다림은 고독하면서도 행복한 시간임을, 새벽녘 서쪽으로 옮겨가 혼자 빛나고 있는 붉은 별 화성처럼 모두 잠든 시간에 시를 기다리는 사람의 사유는 고요히 빛나는 것이다. 나직하면서도 조용한 시의 분위기에서 커다란 울림을 안고 걸어가는 큰 사람의 걸음을 보는 듯 삶의 성찰이 시의 처음부터 끝까지 기쁨을 찾아가는 행보임을 알 수 있다. 시간의 어떤 순간이나 부분을 의미하는 '때'를 포착한 정직한 사유가 자유로운 것 또한 시인의 노림수가 아닐까.

여러 권 책 쌓아놓고 차례차례 한 권씩 읽는 즐거움 있었다. 그러다 '책을 펼쳐서 얼굴을 덮고 누울 때' 밑줄 친 행이 열어주는 내밀한 속사임은 누구와도 나누고 싶지 않은 기쁨으로 오래 기억하듯 시인의 소박한 기쁨들이 가슴 찡하게 아름답다. 시 쓰는 일이 기쁨이 되고 즐거움이 되는 삶이 詩인 순간, 고운 가르침으로 새해를 열어준다. 도순태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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