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김진영 전무 겸 편집국장
김진영 전무 겸 편집국장

# 고속도로 특수 누리는 영남루
지난해 말 지리산과 울산을 관통하는 고속도로 일부구간이 열렸다. 국토의 남단 동서를 잇는 대역사 가운데 1구간이다. 혜택은 밀양이 제대로 보고 있다. 울산과 밀양이 30분대로 좁혀졌다. 밀양시가 흥이 났다. 길이 열리자 울산이나 양산 쪽 관광객들이 밀양의 소비지수를 끌어올리고 있다는 보도도 있다.

실제로 필자는 현장을 목격했다. 휴일 오전 길을 나섰다. 청량에서 시작된 고속도로는 반복되는 터널구간을 지나자 밀양이 눈앞이다. 감쪽같다. 토목기술의 발전상을 30분안에 파노라마처럼 보여주는 대역사다. 영남알프스의 아랫도리를 관통하고 만나는 밀양은 친숙하다. 밀양강이 휘돌고 영남루가 우뚝하다. 마치 태화강변에 서 있는듯한 착각이다.

여기서부터가 문제였다. 휴일 점심 무렵 영남루는 붐볐다. 편액을 살피는 사람, 누각에서 사진을 찍는 가족들, 앞뜰을 거닐며 지나온 자취를 뒤적이는 이들까지. 대부분 울산사람이다. 고속도로가 열려 호기심에 왔다는 울산시민, 말로만 듣던 영남루를 한번 보고 싶어 왔다는 동구 방어진 주민, 열에 일곱은 울산사람들이다. 

고속도로가 열리는 시점을 예견했는지 경상남도와 밀양시는 영남루 일대를 새롭게 단장해 놓았다. 영남루는 보물 제147호다. 문화재청과 경남도의 지원을 받은 밀양시는 사업비 153억 원을 투입해 영남루 일대를 복원했다. 가능한 원지형에 가깝도록 공간을 복원하고 누각 주변을 다듬고 밀양읍성을 되살렸다. 눈에 띄는 부분은 영남루 누각 주변의 공간 구조를 복원하는 작업이었다. 주변에 산발적으로 지어진 개인시설물과 사유지들을 일괄 매입해 공원을 조성했다.

3년여간 진행된 공사로 밀양읍성과 동문이 복원됐고 영남루 관람로 정비와 역사문화공간 조성사업이 마무리됐다. 여기에 영남루를 중심으로 걷고 싶은 길을 만들어 밀양강 친수공간을 꾸몄다. 한 바퀴 돌아보니 제법 운동이 될 만큼 공간구조가 넓었다. 읍성과 누각 사이에 밀양강이 설핏 내비치는 풍경에다 아랑의 전설에 사명대사의 애국충정까지 스토리로 입혔다. 부럽다.

영남루는 신라시대 영남사라는 사찰이 있던 자리에 누각이 만들어진 것이 화재로 소실됐다가 19세기 중반에 다시 지어진 역사를 가졌다. 평양의 부벽루와 진주 촉석루를 합쳐 조선 3대 누각으로 자랑삼은 공간이니 이정도 정비는 당연하다 싶었지만 영남루를 거니는 동안 자꾸만 태화루가 밟히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지난해 쯤으로 기억된다. 울산발전연구원 유영준 박사가 '태화루 랜드마크 기능 강화 및 관광 활성화 방안'을 제시했다. 태화루를 울산의 랜드마크로 삼아 이를 관광명소로 부각시키기 위해서는 반드시 태화강 국가정원과 태화루의 연결성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는 이야기였다.

유 박사는 보고서에서 지난 2014년 복원된 태화루가 울산의 상징적인 장소로 이야기는 되고 있지만 실제로는 인지 수준이 떨어진다고 지적했다, 실제로 조사를 하니 관광객은 물론 시민들조차 태화루를 울산의 대표 관광자원이나 랜드마크라고 생각하지 않는다는 이야기였다. 무엇보다 태화강 국가정원과 인접한 장소성은 있지만 주변에 고층 건물이 점차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데다 단절된 느낌이 있어 관광지라기 보다는 따로 독립된 공간으로 인식하는 경향이 있다는 지적이었다. 

태화루 전경. 2020. 11.4 울산신문 자료사진
태화루 전경. 2020. 11.4 울산신문 자료사진

 # 태화루의 핵심은 연결성이다 
우리가 매일같이 시선에 두고 사는 태화루는 엄청난 역사와 스토리를 가진 누각이다. 기록이나 증거가 많지 않아 천년을 훌쩍 넘긴 세월을 이야기 하거나 신라 고승 자장율사와 태화사의 이야기는 믿거나 말거나 수준이 됐지만 분명한 것은 누각의 위치와 뿌리다. 기록을 들춰보면 태화루의 원형격인 태화사는 신라 때인 647년 건립된 것으로 나와 있다. 태화루의 기록은 따로 없지만 고려 성종이 997년 울산을 찾아 태화루에 올라 신하들과 연회를 열었다는 기록은 분명하다.

특히 조선조 때 간행된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는 권근(權近)과 서거정(徐居正)이 태화루에서 남긴 기록이 있는 것을 보면 임진왜란 직전까지 우뚝했던 누각임을 알 수 있다. 고려 명종때 사람인 김극기는 태화루시서(太和樓時棲)를 통해 자장율사가 중국에서 불법을 구해 사포로 귀국했다가 불력의 힘으로 태화사를 지었다는 기록을 남긴 것을 미루어 보면 예사로운 장소가 아니었다. 기록에는 자장이 석가모니의 사리를 가져와 경주 황룡사와 울산 태화사, 양산 통도사에 나눠 모셨다니 신라 왕실에서도 호국사찰의 으뜸자리로 울산을 꼽았다는 사실은 분명한 팩트다.

여기서 주목할 부분은 자장율사다. 자장은 신라의 고승이지만 호국불교의 상징으로 통하는 인물이다. 그 흔적이 울산에는 없지만 인근 통도사에 남아 있다. 자장암이다. 자장암에 가면 암자 벽면에 일대기가 그려져 있고 자장의 풀 스토리가 암자 곳곳에 숨어 있다. 장소성은 스토리가 있기 마련이다. 특정 장소에 이야기가 입혀지면 명소가 된다. 그 이야기는 시간과 공간을 따라 내용과 모양이 달라진다. 중요한 것은 원형이다. 바로 태화루에는 그 원형이 존재한다. 자장의 이야기부터 고려 성종의 이야기와 고려와 조선의 유학자들의 이야기가 흘러넘치는 곳이다.

그런데 지금의 태화루는 어떤가. 강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강변에 우뚝 섰지만 강 속에 있는 것처럼 외로운 섬이다. 단절의 공간이다. 지난 주말 오후 태화루를 찾았을 때 인적이 끊겨 있었다. 누각은 텅 비었고 태화시장 앞 쪽 간선도로만 차들로 붐볐다. 울산의 랜드마크로 수백억을 쏟아부은 복원된 누각이 그저 바라만 보는 배경으로 그려진 전시물이 돼 버린 셈이다.

오래된 이야기지만 태화루 복원공사가 한창일 무렵, 뜻있는 울산의 도시계획 전문가들이 울산시와 정치권 등에 태화루 일대의 공간구조 재구성을 건의 한 적이 있다. 당시 안을 낸 한 전문가는 얼마 전에도 태화루 일대를 지금이라도 재정비 한다면 울산의 랜드마크로 손색이 없는 장소성을 자진 곳이라고 열변을 토했던 기억이 있다. 그 당시 나왔던 안은 지금처럼 태화루를  방치한다면 이 공간은 외딴 섬처럼 고립된 공간이 된다는 점에서 출발했다. 누각은 사람이 모이는 공간이자 전망대의 기능과 휴식의 공간이라는 두가지 기능을 함께 하는 장소로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는 이야기였다.

구체적으로 지금 동강병원 끝자리부터 우정지하도까지의 공간을 완전히 바꿔 태화루 옆의 간선도로를 모두 지하차도로 숨기고 상부의 공간은 모두 태화루와 전통시장, 원도심과 국가정원으로 이어지는 연결된 공간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이야기였다. 탁월한 안이다. 누각은 전망대의 역할을 하지만 동시에 공간의 연결을 가능하게 하는 이음새 역할도 한다. 태화강 국가정원이라는 특별한 공간과 울산읍성과 병영성으로 이어지는 원도심의 중심에 태화루가 있다. 그 공간을 제대로 살린다면 태화강변의 콘텐츠는 풍성해진다.

핵심은 의지다. 울산이 새로운 먹거리로 수소산업을 이야기하고 4차산업을 이야기하지만 그보다 중요한 부분은 바로 역사성을 바탕으로 한 문화관광산업에 대한 관심이다. 대한민국 사람들이 굴뚝도시로만 생각하던 울산을 새롭게 보고 있다. 자신들이 모르던 울산을 만나기 위해 울산을 찾아오는 발걸음이 분주하다. 바로 이들에게 울산의 오래된 역사성을 오늘의 현장과 함께 보여줄 공간은 무수히 널려 있다. 울산은 그만큼 다양하고 풍부한 역사를 가진 도시다. 바로 그 장소를 찾아 옷을 입히고 다듬는 일을 울산의 리더들이 해나가야 한다. 지금도 늦지 않았다. 의지가 중요하다.

저작권자 © 울산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