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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미반도 해안둘레길 두번째 구간인 선바우길. 바다 위로 길게 데크가 놓여 배를 타고 볼 수 있던  풍경이 사람들 곁으로 성큼 다가왔다.
호미반도 해안둘레길 두번째 구간인 선바우길. 바다 위로 길게 데크가 놓여 배를 타고 볼 수 있던 풍경이 사람들 곁으로 성큼 다가왔다.

코로나에 잠식된 일상의 출구는 여전히 보이지 않는다. 불필요한 접촉을 삼가고 가볍게 떠날 수 있는 여행은 드라이브가 제격이다. 비가 오락가락하는 아침, 낮은 하늘아래 포항으로 향했다.

 울산~포항 고속도로를 벗어나 연오랑세오녀테마공원으로 길머리를 잡는다. 연오랑세오녀테마공원은 포항시 청림동에서 시작한 호미반도 해안둘레길의 1구간의 백미다.

 여기서부터 둘레길은 925번 도로와 만나고 헤어짐을 반복하면서 해안을 따라 이어진다. 길은 쉼없이 파도를 넘고 산을 가르며 바람을 벗 삼는다. 가끔 마을을 스치며 사람들의 온기를 품기도 한다.

 둘레길이 열리면서 숨어있던 해안과 사람 사이의 거리가 가까워졌다. 사람들은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오던 이야기들을 다듬어서 기록했다. 쉽게 잊히고 가볍게 여길만한 것들이 의미가 더해졌다. 그래서 그 길에 서면 아름다운 풍경과 작은 것들이 주는 큰 울림에 자주 걸음이 멈춰 선다. 바다를 따라서 길이 흐르고 그 위로 사람의 삶이 흘러가는 것이다.

포항 호미반도 해안둘레길
포항 호미반도 해안둘레길

# 연오랑세오녀 전설 속으로
포항시 동해면 해안절벽 위에 조성한 연오랑세오녀테마공원은 멀리 철강공단을 마주하고 우뚝하다.
 신라 제8대 아달라왕 4년(157년) 동해 바닷가에 살고 있던 연오(延烏)와 세오(細烏) 부부가 일본으로 가게 되면서 신라의 해와 달이 빛을 잃었다가, 세오가 짠 비단으로 제사를 지내자 다시 빛을 회복하게 되었다는 설화를 바탕으로 조성됐다. 공원에는 연오랑세오녀 이야기벽을 시작으로 문화체험시설인 귀비고, 한국뜰과 방지연못, 영일만을 조망할 수 있는 일월대, 연오랑세오녀가 타고 간 듯한 거북바위, 초가집으로 조성된 신라마을, 철예술뜰의 예술작품 등 다양한 시설을 갖췄다.
 공원에서 보이는 영일만은 연오와 세오의 이야기들을 전하는 듯 출렁이는 잿빛 바람으로 가득하다.

둘레길 2구간 초입의 선바위.
둘레길 2구간 초입의 선바위.

# 자연이 만들고 빚은 선바우길
둘레길 두 번째 구간은 선바우길이라는 이름을 달았다. 동해면 입암리에서 흥환항까지 6.5㎞다.
 입암리라는 지명에서 짐작하듯 마을은 우뚝 선 바위의 시간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데크 초입에 자리한 6m 높이의 선바우는 마을의 상징적 존재다. 길게는 수억 년에서 짧게는 수천만 년 전 생성된 화산활동의 결과물이다. 오랜시간 파도와 바람에 깎이고 닳아 자갈이 도드라진 울퉁불퉁한 질감이 고스란히 전해진다. 약한 것들의 소멸과 강한 것들의 실존이 교차된 자연섭리의 현장이다.
 입암리는 십여 가구가 사는 작은 어촌마을이다. 지붕 낮은 집들이 웅크린 채 바다를 응시하고, 선창가 한켠에 내걸린 아귀가 그 전형을 보여준다. 아무렇게나 던져진 어구에서 어부의 고단함이 느껴진다. 바람을 피한 배들이 흔들린다.

풍화와 침식으로 깊게 패인 동굴이 인상적인 흰디기.
풍화와 침식으로 깊게 패인 동굴이 인상적인 흰디기.

  길은 암벽을 따라 바다 위 데크로 이어진다.
 조금 걷다보면 30여m 높이의 거대한 흰뿌연 절벽이 나타난다. '흰디기'라는 이름을 가진 이 거대 절벽은 화산 성분의 백토 때문에 흰색을 띠고 있어 '흰 언덕'으로 불렸고, '흰덕'에서 '흰디기'로 변음된 것으로 추정한다.

 또 옛날 노씨들이 처음 정착해 살 때 흥하게 돼라는 뜻으로 흥덕이라 했는데 음이 변해 '흰디기'로 불려졌다고 하기도 한다.

 풍화와 침식으로 곳곳이 패여 비현실적인 분위기를 자아낸다. 깊게 패인 구멍은 여러 명이 비를 피할 수 있을 만큼 깊고 흰디기 앞에서 소원을 빌면 부자가 된다는 전설이 있다.

 둘레길에서 닳고 닳아 수억 년 전의 속살을 드러낸 암석들은 모두 그럴싸한 이름을 얻었다.

 특히 2구간에서 이러한 독특한 형태와 지질로 인해 이름을 얻은 것이 십여 개나 된다. 남근모양을 닮아 남근바위, 흘러내린 물줄기가 바위를 깎아 4줄기 골이 파인 폭포바위, 여왕이 왕관을 쓴 듯한 여왕바위, 고릴라가 앞발을 내디디며 걸어가는 듯한 모습의 킹콩바위…. 억지스러운 면이 없진 않지만 이름과 비교해 그 형태를 유추하는 작은 재미로 볼만하다.

옛날 선녀가 내려와 놀았다는 하선대. 갈매기만 차지한 너른 바위 위로 하늘이 낮게 내려앉아 있다.
옛날 선녀가 내려와 놀았다는 하선대. 갈매기만 차지한 너른 바위 위로 하늘이 낮게 내려앉아 있다.

# 선녀가 내려와 놀았다는 하선대
바다 위로 난 데크는 조그만 해안길로 내려서 자갈밭으로 이어지고 사철 푸른 소나무에 둘러싸인 채 다시 하선대를 향해 데크가 펼쳐진다. 하선대는 넓적한 모양의 바위섬으로, 예전 선녀가 내려와 놀았다고 해서 '하선대' 또는 '하잇돌'로 불린다.

 옛날 동해 용왕이 매년 칠석날 선녀들을 초청해 춤과 노래를 즐겼는데 용왕은 그 중  한 선녀를 왕비로 삼고 싶었으나 옥황상제가 허락하지 않았다. 용왕은 황제의 환심을 사기 위해 파도를 잠재워 인간들의 생활을 위해주자 감복한 황제가 허락했다. 용왕과 선녀는 자주 이곳에 와 행복한 시간을 보냈다고 한다.

 하선대는 데크에서 10여m 떨어진 바다 한가운데 위치한 여다. 파도가 넘고 바람이 스치는 가운데도 갈매기들은 익숙한 듯 휴식의 시간을 즐긴다. 하선대를 지나면 데크길이 끝나고 마산리로 접어드는 해안길이 이어진다.
 
# 아홉마리 용이 승천했다는 구룡소

2구간을 되돌아나와 차를 타고 대동배리에 이르면 3구간의 으뜸인 구룡소가 있다.
 마을 한켠에 차을 세우고 둘레길을 200여m 2구간 방향으로 걷다 보면 산길에서 내려오는 언덕에 전망대가 조성돼 있다. 전망대 왼편으로 구룡소가 발아래 펼쳐진다. 넓은 암반의 중앙이 깎여나가 가운데 부분이 연못처럼 바닷물이 찬 지형이다.

 아홉 마리의 용이 승천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져 구룡소라 불린다. 화산폭발로 생성된 집괴암을 파도에 자갈이 휩쓸리며 깎아 만든 접시형 구조로 아랫부분이 바다와 연결돼 바닷물이 위로 뿜어져 나올 때는 용트림을 연상케하기도 한다. 올망졸망한 파도가 연신 구룡소를 드나들고 낚시꾼 하나가 정물처럼 서서 어신을 기다린다.

둘레길 마지막 구간에 자리한 독수리바위.
둘레길 마지막 구간에 자리한 독수리바위.

# 바람과 파도를 고스란히 받아낸 독수리바위
구룡소를 나와 다시 해안을 따라 달려가면 구만리 못미쳐 샛길로 빠진다. 호미곶광장으로 가는 길 왼편으로 독수리바위가 숨은 듯 자리하고 있다. 이곳은 바람과 파도가 심한 날 청어가 뭍으로 밀려나와 까꾸리(갈고리의 경상도 방언)로 끌었다고 '까꾸리개'라고 부른다.

 이 겨울바다를 지배하는 건 바람과 파도다. 사람이 가늠할 수 없는 긴 시간을 바다 위에서 보낸 바윗돌이 바람과 파도에 제 몸을 맡겨 독수리 머리로 변했다. 그 고단한 풍화와 침식은 여전히 계속되지만 사람의 시간으론 알기 어렵다. 아둔하다는 듯 갈매기 한 마리, 보이지 않는 바람의 등을 타고 유유하다.

 일출을 배경으로 우뚝 선 독수리바위의 절경은 입소문으로 사진가들이 자주 찾는 곳이 됐다.
 길을 재촉해 호미곶광장에 서면 상생의 손이 반긴다. 바다와 육지에 마주 선 상생의 손은 청동의 질감으로 강하고 웅장하다. 뒤로 새천년기념관이 21년전 밀레니엄시대를 맞이하는 그날의 염원과 기쁨을 기억하는 듯 건재하다.  광장 왼편엔 호미곶등대와 등대박물관이 자리하고 있다. 24.4㎞의 호미반도 해안둘레길의 종점이다.

호미곶광장의 상생의 손. 청동빛으로 웅장하고 단단한 멋을 여전히 뽐내고 있다.
호미곶광장의 상생의 손. 청동빛으로 웅장하고 단단한 멋을 여전히 뽐내고 있다.

# 둘레길은 해파랑길로 이어지고
동해안의 길은 이렇게 모퉁이마다 절경을 펼쳐내고 이야기를 담았다. 사라지듯 이어지는 길에 사람들의 삶이 더해지고 코로나로 폐쇄된 일상을 벗어나는 통로가 된다. 스치듯 지나치는 나그네에게도 많은 메시지를 던져준다.


 둘레길 내내 따라붙던 바람에 폐 깊숙이 서늘하다. 청정한 느낌이다. 길 끝에서 길을 지우며 나타나는 바다, 산모롱이 돌아가면 아스라이 또 나타나는 길. 경주, 울산으로 이어지는 길이 해안둘레길의 또 다른 이름 해파랑길로 펼쳐진다.
 글·사진=김정규기자 kjk@ulsanpress.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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