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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영 전무 겸 편집국장
김진영 전무 겸 편집국장

# 흉노의 전설, 뿌리를 찾는 작업
봄빛이 완연하다. 흔히 봄이 되면 시국과 세상사를 연결해 사용하는 말이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이다. 이 말의 어원에 흉노가 있다. 한나라 원제 시대의 절세미녀 왕소군(王昭君)의 이야기다. 왕소군은 한나라 궁녀 신분이었지만 황제의 사랑을 받지 못했다. 뇌물로 멋진 초상화를 그리지 못한 까닭에 추녀로 그려진 인물화만 보고 황제는 그녀를 버렸다. 낙안(落雁). 하늘을 나는 기러기가 왕소군을 보면 땅에 떨어질 정도의 절세미녀였던 그녀는 결국 한나라가 조공을 바친 흉노의 황실로 시집을 간다. 이를 두고 후대 시인 동방규가 시를 읊었다. '이 땅에 꽃과 풀이 없으니 봄이 와도 봄 같지 않다. (호지무화초(胡地無花草)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 이 시에서 나온 구절이 춘래불사춘이다.

왕소군의 이야기를 풀었지만 실상은 흉노가 핵심이다. 흉노(匈奴). 동아시아 초창기 북방민족을 이야기할 때 자주 등장하는 이름이 흉노다. 흉노라는 명칭의 어원은 아직 정확하게 밝혀지진 않았지만 '흉(匈)'은 'Hun'(혹은 'Qun')의 음사(音寫)이며, 'Hun'은 퉁구스어(Tungus)에서 '사람'이란 뜻으로 해석하는 쪽이 우세하다. 하지만 '노(奴)'자는 여러 설이 분분하다. '종'이나 '노예'를 뜻하는 노를 스스로 불렀을 가능성이 없는 만큼 흉노의 노는 중국의 한족이 조상들의 치욕을 구설로 극복하기 위해 비하의 용어를 사용한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해 보인다. 마치 동북아시아의 뛰어난 민족들을 동쪽 오랑캐를 뜻하는 동이(東夷)로 부른 것과 다르지 않다. 

북방의 지배자 흉노는 대륙의 주인임을 자처한 한족에게 치욕의 대상이었다. 기마술과 궁술에 능하고 철제무기로 무장한 흉노에게 중국의 초기 왕조들은 철저히 짓밟혔다. 조(趙)와 연(燕)은 연전연패로 사실상 복속된 나라였고 시황제가 천하를 통일할 때까지 대륙은 흉노를 섬기며 살아야 했다.

시황제가 흉노를 친 뒤 뒷감당이 두려워 과거 왕조의 여러 산성을 연결, 서쪽의 간쑤성(甘肅省) 린타오에서 동쪽의 랴오둥(遼東)에 이르는 5,000㎞의 만리장성을 쌓은 것도 이 때문이다. 시황제 전대까지 조공을 바치고 공녀를 바친 오래된 치욕의 역사는 흉노의 철옹성 같은 국방력과 군사의 위력을 잘 드러낸다. 바로 이 흉노, 고대 동아시아 초원의 지배자들은 어디서 와서 어디까지 흘러간 민족일까. 그 연구를 20세기 말부터 지금까지 러시아와 프랑스, 미국의 고고학계가 내몽고 지역을 뒤지며 파헤치고 있다. 

울산에서 반구대암각화의 훼손문제가 사회적 관심을 끌던 지난 2007년 무렵, 내몽고 적봉지역에서 한국형 암각화가 발견됐다. 반세기전, 1970년 울산 천전리각석을 시작으로 반구대암각화, 고령, 경주 석장동, 안동 수곡리 등 20여곳에서 확인된 한국형 암각화는 그 기원을 놓고 학자들의 해석이 분분했다. 울산박물관 관장을 지낸 최광식 교수는 지난 2007년 당시 고려대 탐사팀을 이끌고 중국 내몽고 적봉 일대를 조사했다. 성과는 상당했다. 초원과 사막의 경계에서 한국형 암각화를 찾았다. 동심원과 마름모, 방패모양 등 기하학무늬가 새겨져 있었고 사슴과 사람 얼굴, 사냥의 모습이 뚜렸했다. 
 

반구대암각화와 연관성이 있는 것으로 알려진 내몽고 적봉에서 발견된 한국형 암각화 모습.
반구대암각화와 연관성이 있는 것으로 알려진 내몽고 적봉에서 발견된 한국형 암각화 모습.

# 반구대암각화는 인류사의 타임머신
흉노의 이야기로 시작한 것은 바로 내몽고 적봉에서 찾아낸 한국형 암각화의 뿌리를 이야기하기 위해서다. 먼저 동아시아의 역사부터 풀어보자. 흔히 동아시아는 중원과 북방이 수없이 충돌했다가 휴전과 잠정적 평화, 이동과 내란, 그리고 또다시 전쟁으로 이어지는 연결지점으로 해석할 수 있다. 

그 첫 번째 지배자가 흉노였다. 흉노에 이어 선비족과 돌궐, 거란, 몽골, 여진 등이 북방의 역사를 이어 갔다. 당나라 이후 사료를 정리하거나 중원의 역사를 기록한 자들은 중원, 즉 대륙의 역사를 중심으로 그들의 역사를 기록했고 그 중심엔 자신들은 중화, 나머지는 오랑캐라는 식의 화이(華夷)라는 잣대로 기록을 남겼다.

하지만 이는 오로지 만리장성 남쪽의 역사관일 뿐, 동아시아 전체를 대변하는 관점은 아니었다. 중원의 역사를 동아시아의 중심에 놓고 세상을 이야기하려는 자들과 이를 자신들의 이익에 맞춰 대륙과의 직접 교류에 이용해 먹으려는 일본의 어용학자들이 동아시아 역사를 조작했다. 그 폐해는 한 세기를 호령할 정도였지만 울산과 한반도 남부 곳곳에서 암각화가 드러나고 환호유적과 청동기와 철기 유적이 쏟아지면서 왜곡의 사료는 곰팡이로 뒤덮였다.

지난 2009년 국립중앙박물관이 몽골공화국 중앙박물관과 협업을 통해 엄청난 발굴 성과를 발표했다. 몽골의 도르릭나르스 유적 발굴 성과였다. 도르릭나르스 유적은 흉노의 기마문화가 얼마나 찬란했는지를 잘 보여주는 엄청난 발굴이었다.

이 성과물과 함께 내몽고 지역에서는 또 하나의 엄청난 발견이 있었다. 바로 '허란커우 암화 경구' 계곡에서 드러난 1,000여 개의 암각화였다. 동심원이나 기하학적 문양부터 소와 말과 사슴, 새와 늑대 등의 동물화까지 시베리아 이르쿠츠크 일대에서 시작된 동아시아 암각화의 원형이 생생하게 드러났다. 학자들의 연구 결과 이 일대의 암각화는 신석기 시대에 시작됐다는 설이 유력하다. 이 암각화는 울산의 천전리각석처럼 후대로 이어져 춘추전국시대에 이르기까지 당대의 사람들이 새로운 새김질로 글자와 문양을 첨가해 수천 년의 기록물로 남아 있는 상태다.

우리나라 국립중앙박물관에서는 내몽고 지역이 한반도 초기 정착인들과의 친연성이 있다는 점을 근거로 지난 2002년부터 이곳을 조사지역으로 선정한 이후 여러차례 발굴 조사를 했다. 그 결과 이 지역 무덤에서는 흉노문화 연구에 중요한 많은 자료들이 출토됐다. 그리고 그 뿌리에는 바이칼 일대의 시스킨스키 암각화와 내몽고 적봉과 헤이룽강 일대의 암각화에서 드러나는 북방민족의 유전인자가 암석의 새김질로 이어진다는 점을 하나씩 축적하게 됐다. 바로 바이칼의 부리야트족부터 흉노와 한민족의 초기 정착인까지가 암각화라는 연결고리를 갖고 있다는 사실이 드러난 셈이다.

반구대암각화와 연관성이 있는 것으로 알려진 내몽고 적봉에서 발견된 한국형 암각화 모습.
반구대암각화와 연관성이 있는 것으로 알려진 내몽고 적봉에서 발견된 한국형 암각화 모습.

문화재청 문화재위원회 세계유산분과위원회가 11년만에 반구대 암각화를 세계유산 우선등재 추진대상으로 선정했다. 우선등재 대상지는 '대곡리 암각화'(국보 제285호)와 '천전리 암각화'(국보 제147호)를 아우르는 반구대 일대의 계곡이다.

해당 지역의 암각화는 '신석기 시대 인류 최초의 포경(고래잡이)활동을 보여주는 독보적 증거이자 현존하는 동아시아 문화유산 중 가장 이른 시기의 것'이라는 점에서 높은 평가를 받았다. 이제 남은 절차는 세계유산 등재신청 후보와 등재신청 대상 선정이다. 울산시에서는 내년 4월 등재신청 후보 신청을 시작으로 7월 후보 선정, 2023년 7월 등재신청 대상 선정, 같은 해 9월 등재신청서 초안 제출 등 절차를 밟는다는 계획이다. 

이같은 과정이 순차적으로 마무리되면 오는 2024년 국제기념물 유적협의회(ICOMOS) 평가를 거쳐 2025년 7월께 세계유산위원회 정기총회에서 세계유산 등재를 공식화 하기로 일정표를 짜놓고 있다. 중요한 것은 절차이기도 하지만 왜 반구대암각화가 세계인이 함께 보존해야 할 인류 유산인가를 밝히는 일이다.

바로 그 이유는 반구대임각화야말로 고래잡이의 생생한 백과사전이라는 인류문화적 독보성과 함께 동아시아 인류사의 이동경로가 숨은그림으로 새겨져 있다는 사실이 핵심이다. 지금부터 울산시와 학계가 중요하게 다뤄야 할 부분이 바로 이 지점이다. 물에서 건져내는 보존의 문제와 함께 인류의 이동경로를 규명하는 학문적 바탕에도 집중적인 투자가 필요하다는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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