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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구대암각화를 품고 있는 대곡천의 전경. 김동균기자 justgo999@
반구대암각화를 품고 있는 대곡천의 전경. 김동균기자 justgo999@

오묘하다. 호흡으로 마주하던 길을 하늘에서 바라보면 새롭다. 울산의 시작을 이야기하는 탯줄 같다. 수만 전 년, 선사의 시대 울산의 원형이다. 이 땅의 산하에 사람이 살면서 길이 생겼다. 길과 길이 연하여 소통이 있었고 그 소통의 결과가 역사다. 길의 근원은 물줄기다. 흔히 천이라 부르는 강의 원류다. 산자락에서 이어진 무수한 갈래의 천이 혈맥을 움직이고 그 움직임의 진동이 숱한 이야기를 만들었다.
동아시아 인류사를 유추해 보면 이 땅의 역사는 북방이 시원이다. 그래서 선사인이 만든 이 땅의 첫 길은 북으로 향한다. 그 출발에 그들의 발원이 새겨 있고, 그 발원의 간절함이 물길에 닿아 바다로 향한다. 바로 태화강 100리의 시작, 대곡천 아홉구비, 구곡이다.

# 과거부터 현재까지 이어지는 살아있는 자연사박물관
울주군 두동면 천전리와 언양읍 대곡리 일대를 지나는 대곡천 계곡은 선사로부터 역사시대와 근대, 그리고 현대를 관통하는 살아 있는 자연사 박물관이다. 선사인이 남긴 세상에서 가장 독보적인 바위 그림이 있고, 신라와 고려, 조선 세 왕조에 걸쳐 선조들이 남긴 발자취도 뚜렷하다. 그래서 한국 문화의 뿌리라는 데 어깨가 으쓱하다.

대곡천 계곡은 대자연의 굴곡지점이 인문학적 지도로 그려진 몇 안 되는 곳이다. 사계절과 밤과 낮, 맑음과 흐림의 경계에서도 단연 독보적이다. 당연히 시인 묵객들의 발길이 이어졌다. 전국 곳곳에서 만들어진 구곡가(九曲歌)를 좇아 대곡천 계곡의 아름다움을 노래한 구곡가가 이 곳에도 있다. 조선 정조 때의 도와(陶窩) 최남복(崔南復, 1759-1814)은 수옥정(漱玉亭)을 지어 백련서사(白蓮書社)를 열고 후학을 양성하면서 백련구곡가(白蓮九曲歌)를 지었다.

조선말의 언양 출신 선비 천사(泉史) 송찬규(宋璨奎, 1838-1910)는 반계구곡음(磻溪九曲吟)을 지었다. 반계는 대곡천의 다른 이름이다. 일곡부터 구곡까지 아홉 굽이의 빼어난 풍광을 노래했다. 그들 구곡가에 따라 일곡에서부터 구곡까지를 글자로 새긴 큰 바위 가운데 4-7곡까지는 찾아볼 수가 있다. 나머지 5개는 안타깝게도 사연댐과 대곡댐에 잠겨버렸다.

반구대암각화가 1971년 12월 25일  크리스마스날 동국대 학술조사팀에 첫 모습을 드러 내고 있다. 문명대 동국대 명예교수 제공
반구대암각화가 1971년 12월 25일 크리스마스날 동국대 학술조사팀에 의해 첫 모습을 드러 내고 있다. 문명대 동국대학교 명예교수 제공

 # 아홉 굽이 빼어난 풍광에 시인 묵객 발길 이어지던
울산에 살고 있는 많은 사람들은 자신이 살고 있는 지역의 역사를 알아갈 때마다 깜짝깜짝 놀라는 현장을 목격한다. 대곡천이 바로 그 현장이다. 대곡천에 들어선 사람들은 자신이 살고 있는 울산이 한반도 정주문화의 출발지이자 북방민족의 '유토피아' 대장정의 끝자리였다는 사실부터 고래문화의 다양성이 집결된 반구대암각화가 우리보다 세계인이 더 경이롭게 여기고 있다는 사실에 이르기까지 '문화적 충격'에 빠진다.

# 고래가 노래하고 다산을 기원하며 춤 추던 곳
대곡천의 절정은 반구대암각화다. 여기에 서면 고래울음이 들린다. 디지털 망원경의 초점을 고래에 맞추면 햇살과 그림자가 무연히 감춰버린 귀신고래가 울음소리만 토해낸다. 좀처럼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고래와 숨박꼭질을 하다보면 어느새 오후 4시, 바위 표면에서 고래가 춤을 춘다. 반구대는 세상의 빛이 열리는 시간이 아니라 어둠으로 향하는 발원의 시간, 침묵과 묵상의 시간에 하늘과 만나는 자리다.

1972년 3월 반구대암각화 첫 유적조사에 나선 동국대학교 학술조사팀. 문명대 동국대학교 명예교수
1972년 3월 반구대암각화 첫 유적조사에 나선 동국대학교 학술조사팀. 문명대 동국대학교 명예교수 제공

 반구대암각화는 상상력의 보물창고다. 수많은 시인들이 이곳에 서서 영감과 감성의 뒤섞임을 걸러내 빛나는 언어로 노래를 지었다. 그 노래들은 모두가 과거로부터 현재로 이어지는 우리 삶의 궤적을 그렸지만 이야기는 없다. 반구대암각화에 살던 선사부족 아버지와 아들의 이야기나 고래사냥을 둘러싼 여러 부족간의 목숨 건 전쟁이야기, 부족장의 딸과 전사의 사랑이야기는 아쉽지만 아직 없다. 그 이야기는 수천년전 어느 골짜기 계곡의 물길이 가뭄으로 끊어지듯 사라졌다. 그 사라진 이야기가 다시 꿈틀거리는 날 반구대암각화는 과거의 유산이 아니라 오늘 우리에게 애틋한 의미로 다가올 수 있기에 혈맥을 파르르 떨게 할 이야기를 기다리고 있는지도 모른다.

1970년대초 집천정 앞 대곡천과 반구대의 모습. 제공 : 문명대 동국대학교 명예교수
1970년대 초 집천정 앞 대곡천과 반구대의 모습. 문명대 동국대학교 명예교수 제공

반구대 돌아 천전리각석으로 향하는 길에는 봄이 기다린다. 석가산 능선 위로 물오른 새잎들이 햇살에 발가벗긴채 겨울을 벗겨내는 모습이 신선하다. 그 기운을 벗 삼아 내딛는 시민들의 발걸음을 각석앞에 도착해 바라보고 있으니 그 발자국 소리가 가슴을 쿵쿵대며 다가오는 듯하다. 천전리각석이다. 천전리 지형은 오묘하다. 석가산을 휘감은 대곡천 물줄기를 따라 가면 지형이 벌거벗은 나신으로 마주한다. 그 정점은 인간의 성기다. 항공촬영을 하지 않고도 선사인은 이곳이 어떻게 인간의 상징과 닮아 있음을 알았는지 놀랍기만 하다. 그 상징의 끝에 선사인들은 다산의 숭배문양을 새겨 축원의 춤사위를 펼쳤다.

반구대암각화가 세계유산 우선등재 목록에 올랐다. 대곡천은 명승지정을 예고했다. 이제 제대로 엮어가면 대곡천은 세계인의 선사문화 1번지로 거듭나게 된다. 선사인이 첫 발을 내디딘지 수천년이 지난 시간, 오늘의 우리에게 대곡천은 우리의 정체성을 찾기 위한 새로운 과제를 던지고 있다. 무심하게 선을 긋고, 길을 내고 전신주를 박아 불 밝힌 자리가 원시문화를 찾아 가는 이 땅의 뿌리길로 거듭나고 있다. 그 길을 문화관광벨트화 하기 위해 노력하는 만큼 그 과 뿌리에 대한 학습과 통찰이 절실한 시점이다. 김진영 편집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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